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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버른앨리스 Mar 22. 2018

호주에서 출산,육아,난청아동 키우기 by 선아

두 아이의 엄마로 호주에서 사는 그녀의 이야기




이선아.

A.K.A 가예, 가온맘.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2년 전쯤 멜버른의 한 공원에서였어.

현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며 조국의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기원하는 자리였지. 쌀쌀한 늦봄 촉촉한 잔디밭에 앉아서 촛불을 들고서 지구 반대편에서 살고 있는 나의 가족과 친구들이 더 이상은 분노하고 고통받지 않아도 되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가슴으로 빌었어. 이 집회를 기획하고 진행한 갓 20살이 된 한인 학생회장이 마이크를 들고 왜 이런 집회를 나서서 준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였고 마이크는 청중들에게 돌아갔어. 이 곳, 멜버른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 다양한 나이와 직업의 평범한 교민들은 그렇게 밤이 깊어지도록 조국의 현사태를 한탄하고 걱정하며 이야기를 나눴어. 어떤 마음으로 이 집회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사랑하는 조국이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하고 치유 되지를 원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선아를 나는 그때 처음 보았어.

두 손으로 마이크를 꼭 잡고 그녀는 자기의 소개를 하였지. 단발머리에 앳된 얼굴의 여자아이는 놀랍게도 두아이의 엄마라며 자신을 소개하였지.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도 힘주어 자랑스러운 조국을 그 따위로 망친 데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였고 그녀의 아이들이 미래에 당당하게 조국이라 부를 수 있도록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어.

깊어가는 밤의 푸른 공원, 늦봄의 쌀쌀한 바람, 잔디밭에서 촛불과 서로의 온기에 기대 둘러앉아있는 사람들 사이에 그녀의 목소리는 울려 퍼졌고 나는 청중 중 한 명으로 그녀를 처음 만났지.


비슷한 또래에 함께 알고 있는 친구 (고해리 바리스타)가 있는 우리는 처음 만난 그날 함께 치맥을 뜯으며 스트레인저에서 지인이 되었어. 술자리 한 번에 그녀와 나는 서로 어딘가 비슷한 종류의 사람임을 알아보았고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약속하였지만 손이 많이 가는 가게 두 개를 키우는 나와 손이 더 많이 가는 아이 두 명을 키우는 선아가 시간을 맞추기는 쉽지가 않았지.





철 모르는 어린 엄마였던 그녀, 호주와 한국을 오가며 독박육아 8년을 보낸 그녀는 지금 누구보다 강한 엄마가 되었어.

여자는 강하고 엄마는 더 강하다더니. 원래 이렇게 단단한 아이가 엄마가 되서 이렇게 단단한 엄마가 된 걸까, 아니면 엄마라는 자리가 선아를 이렇게 단단하게 만든 걸까, 인터뷰를 하는 내내 나는 궁금했어.



나 진짜 할 말 많았어! 아무도 안 물어봐줘서 그렇지. 하하

하며 시작한 선아의 이야기는 한 글자도 한 문장도 버릴 게 없었어.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혼자 담아두고 살았을까. 이런 이야기들이 왜 이제야 세상에 나온 걸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녀의 이야기는 깊고 다양했으며 흥미로웠어. 호주와 한국에서의 출산 썰(?), 산후조리의 비교, 난청이라는 장애가 있는 딸아이를 호주와 한국에서 키우며 느끼고 배운 이야기들, 한국과 호주 양국에서 육아를 하며 느낀 다른 점에 대한 비교 등등... 다양한 주제에서 그녀는 깊은 성찰에서 우러나온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놀라운 점은 그 무거운 이슈들을 다 재미있고 유쾌하게 이야기하더라는 거야. 보통 이야기꾼이 아니더라고.





미리 말해두지만 꽤나 긴 이야기야.

그래서 일부러 소개글도 짧게 줄였어. 내 소개글을 읽는 시간에 선아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읽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네가 나처럼 이런 것을 궁금해한다면

 - 한국과 호주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어떤지, 호주라는 나라가 '장애'를 대하는 자세가 어떤지 궁금하다면, 한국과 호주에서 출산을 하고 산후조리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지 -

꼭 읽어봤으면 좋겠어. 꼭.


네 귀한 시간이 1분도 아깝지 않을 거야.

내가 꼭 장담할게!


거두절미하고 빨리 시작할게. 나의 열세 번째 인터뷰도 재미있게 잘 읽어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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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ALICE)  : 안녕, 선아!  정말로 반가워!

간단히 자기소개 좀 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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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SUNA) : 안녕, 반가워. 나는 선아라고 해. 올해로 8년 차, 30대 중반에 접어든 호주 이민자야.

포르투갈과 영국 혼혈인 남편과 함께 딸과 아들을 키우며 멜버른에서 살고 있어.

지난 7년간은 육아와 살림을 하며 전업주부로 살았고 지금은 다시 엄마가 아닌 사회 구성원으로 세상 밖으로 나가는 중이야. 현재는  FKA라는 정부지원 서비스 단체 (영어를 못하는 이민자의 자녀들이 보육시설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교육시설에 언어 서포터를 파견하고 통역, 교육 등의 활동을 하는 단체)에서 선생님으로 일을 하고 또 집 근처 쇼핑센터에 있는 폰 리페어 샵에서도 메니져로 일을 하면서 세일즈도 배우고 있어.

나는 사실 미술을 전공했거든. 그래서 요새는 위빙이라고 하는 '실을 엮어서 작품을 만드는 직조'에 완전히 꽂혀서 작품 활동도 하고 가끔 클래스를 열어서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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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말만 들어도 바쁘겠다. 소위 말하는 '경단녀, 전업주부'로 7년을 살다가 사회생활하게 된 거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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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사실 경단녀라는 말은 좀 민망해. 나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출산을 했기 때문에 사실 단절될만한 경력이랄까 하는 게 딱히 없었거든. (또르르..) 7년간 아이들의 엄마로 사는 일은 고단하지만 정말 보람찼어.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엄마가 아닌 다른 쓸모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

8년이라는 시간을 엄마로만 보내면서 내가 다시 사회에 적응을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었는데 생각과 달리 세일즈면 세일즈, 선생님이면 선생님 모두 마냥 즐겁고 재미있기만 했어.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해. 사실 기왕 사회에 발을 들인 김에 작품 활동을 하거나 사회생활을 더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은 정말이지 굴뚝같지만 이 정도로 지금은 만족해야 할 것 같아. 둘째인 가온이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첫째인 가예는 난청 아동이기 때문에 내 손이 필요한 일이 아주 많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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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호주에는 언제 어떻게 오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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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처음에 호주에 온 건 워킹홀리데이로 였고 13년 전 22살 때였어.

별로 대단한 생각으로 온건 아니었고 학교 선배가 갔다 왔다고 말하길래 나도 가볼까 해서 80만 원 들고 그냥 온 거야. 호주에 딱 떨어져서 내가 처음 느낀 것은 '어?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네?' 였거든. 타인의 시선에서의 자유로움을 느꼈고 이제부터는 내가 스스로 무엇을 선택을 해도 평가받지 않는다는 생각에 너무 기분이 좋더라.

 남자만 구한다는 주방보조일을 시켜달라고 빌다시피 해서 겨우 일을 시작했지. 쌀포대를 나르고 하루 종일 뛰어다니고 너무 힘들었지만 내가 무려 호주에서 돈을 벌고 살아남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감격스러운 시간이었어. 첫 주급을 받고 집에 가는 버스에서 스스로가 대견해서 엉엉 울었다니까!

바다를 좋아하는 나는 주말마다 호주의 넓고 파란 바다에서 수영을 했어. 본다이 비치에서 파도를 맞아서 팔이 부러지기도 했었는데 마냥 좋기만 하더라. 키친 핸드, 초밥 샵, 웨이트리스 등을 하면서 번 돈으로 워홀이 끝날 무렵 혼자 호주 동부를 50일 동안 배낭여행을 했었어. 지금 돌아봐도 내 인생 다시없는 최고의 자유와 행복을 누리던 호시절이었지.


비자가 끝나고 한국에 돌아오니 너무 답답했고 호주가 그리웠어. 다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지.

나 다시 호주 갈 거야. 다시는 한국 안 와.  

울면서 가지 말라고 잡는 아빠를 뿌리치고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 거라며 큰소리를 쳤고 그렇게 돈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학생비자를 발급받아서 다시 호주로 돌아왔어. 그런데 그렇게 다시 도착한 호주는 내가 생각했던 곳이 아니더라. 워킹 홀리데이 때는 일해서 번 돈을 아무 책임 없이 쓰고 즐기기만 하면 됐는데 이민을 염두로 한 유학은 너무 짐이 무거웠어. 호주 생활의 자유고 뭐고 개뿔 느낄 시간적 심적 여유가 없는 거야. 비자 때문에 가고 싶지도 않은 학교 가고 비자비 벌러 아르바이트하고 비자 연장하고 나면 또 학비 내야 하고 생활비는 언제나 쪼들리고. 그렇게 1년을 어학원에서만 있었는데 직업학교를 갈 돈은 죽어도 못 모으겠는 거야. 현실의 커다란 벽을 몸소 느낀 거지. 우울증도 심하게 왔었어. 집으로 가는 길에는 '사노라면'을 읊으면서 질질 짜고 그랬지. 오페라 하우스 앞에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밤낮 주말 주중 없이 일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 수렁에서 벗어나서 꿈꾸던 이민에 성공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 나의 간절함을 알아차린 메니져가 자기랑 하룻밤을 보내면 스폰서 비자를 해준다고 하는 거야. FUCK OFF!! 하며 뛰쳐나오고 그나마 있던 일자리도 잃었지. 비자 연장비 300불이 없어서 나는 한국에 다시 돌아와야 했어.


이민법이 뭔지도 모르고 돈도 이렇다 할 재주도 없으면서 젊은 객기 하나 믿고 현실에서 무작정 도망쳤던 어리석은 자의 처절한 실패였지. 천국 같았던 워홀 1년과는 정반대로 지옥 같은 학생비자 1년 동안 얻은 건 단 하나 그때 같이 살던 8명의 쉐어 메이트 중 한 명이었던 지금의 남편, 제이슨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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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호주에서 포르투갈 출신의 제이슨을 만나서 국제 연애를 하다가 결혼까지 하다니 인연이 신기하다. 너는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어떻게 또다시 만나서 결혼을 하고 예쁜 아이도 둘이나 낳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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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약 10개월 정도의 교제 끝에 우리는 비자 만료로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었어. 당시 남친이었던 제이슨을 꼬드겼지.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동방의 신비로운 나라를 기대하고 왔던 그는 강남을 보고서 여기가 뉴욕 맨해튼이 아니냐며 스파이더맨 나올 것 같다며 놀라워했어. 제이슨이 의외로 한국과 찰떡궁합이더라고. 포르투갈과 한국이 꽤 공통점이 많거든. 그곳도 다문화국가가 아닌 그들만의 국가야. 한국보다 더 시골 같고 구수해. 새치기도 잘하고 욕도 잘하고 정이 많다고 할까. 그래서 그런지 제이슨은 한국의 '정'이 있는 문화를 좋아했어. 한국 음식도 다 잘 먹고 잘 어울리고. 그는 무려 5년을 한국에서 일했어.


한국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양가에서 땡전 한 푼 받지 않았어. 그 달 너의 월급과 나의 월급을 모아서 식장을 예약, 다음 달 월급으로 사진 촬영 예약, 다음 달에는 드레스 예약해가며 결혼을 준비를 했고 학원에서 외국인 강사에게 제공한 원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지. 그리고 첫째인 가예를 가졌어. 영어 강사라는 직업은 아무래도 외벌이 가장으로서는 불안정했는데 다행히 삼성물산에 살아있는 영어사전의 역할로 취업도 하게 되면서 넉넉하지는 않지만 세 식구가 큰 어려움 없이 살았던 것 같아.

가예가 18개월이 되었을 때 삼성에서의 계약이 만료가 되었고 우리는 갈 곳이 없어졌어. 그때 마침 제이슨도 5번째 혹한기를 겪고는 이 한국의 겨울은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추위가 아니라며 한국을 떠나자고 할 때였거든. 시댁이 있는 포르투갈로 가자는 결론이 나왔어. 비행기표 끊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삼성에서 갑자기 호주 퍼스에 있는 주재원 자리가 났다고 당장 퍼스로 갈 수 있겠냐는 거야. 3일 후에 떠나야 한다고.

그렇게  급작스럽게 퍼스로 날아가서 생각지도 못한 호주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된 거지. 퍼스에서 주재원 생활에 적응할 때쯤 둘째인 가온이가 찾아왔고 그렇게 지금의 완전체 패밀리가 완성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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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용감하다. 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나는 사실 지금 임신을 해도 노산(?) 소리 듣는 나이인데 아직도 엄마가 된다는 것이 너무나도 먼일처럼 느껴져. 나 혼자만의 삶도 불안정해서 늘 불안하다는 생각을 하거든. 어린 나이에 미래가 불분명한 상황에 엄마가 되는 일이 두렵지는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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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출산이라는 것 자체가 당연히 두렵고 무서운 거야.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내가 하는 답이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임신이 열 달인 거라는 말.

당장 내일 아기를 낳아서 엄마가 되라면 세상 어떤 사람도 엄마가 되지 못하지만 열 달이라는 시간 동안 준비를 할 수 있거든. 열 달이라는 기간은 생각보다 길고 신체적으로 고되. 막달이 되면 아무 생각도 안 들고 빨리 방이나 빼줬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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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첫째는 한국에서, 둘째는 호주에서 출산을 했잖아.

비교해서 들려줄 수 있어? 병원 시스템이나 산후조리 문화 같은 것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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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첫째인 가예는 소위 출산아 연통계 한국 2위라고 하는 꽤나 큰 병원에서 태어났어. 첫 아이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곳이 안전하겠다고 생각한거지. 역시 의료 강국 한국답게 병원은 아름다웠고 세련되었고 북적거렸어.  출산 당일 나는 자던 중 양수가 터져서 급하게 출산을 위해서 병원으로 갔거든. 다행히 진통은 3시간으로 짧았고 나는 출산실로 옮겨졌어. 아이가 나올 때는 신랑이 들어가지 못하게 했는데 그래서 나는 함께 손을 잡고 진통을 할 때와 달리 홀로 아이를 낳아야만 했어. 아이의 정서를 위한다며 조명을 어둡게 하고 클래식이 나오고 있었지만 그곳은 누가 봐도 수술실이었고 간호사들은 자기 할 일 하느라 바빴어.

내가 으아 하고 소리를 지르니까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산모 그렇게 소리 지르면 힘 달아나서 애 못 낳아요!" 하더라고. 마침 진짜 아이가 문전에 있어서 힘을 빡 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간호사가 다급히 "잠깐만요! 지금 안돼요! 기다려요. 선생님 오셔야 해요!"하면서 나보고 힘을 주지 말라고 하는 거야. 아파 죽겠는데!???!!

드디어 선생님이 오셨고 힘을 주라며 두 간호사가 내 양 무릎을 내 귀까지 당기기 시작했어. 다리를 벌리고 눕는 Y자 의자에서 나는 부른 배를 안고 내 무릎을 귀까지 당기는 요가를 하면서 아이를 낳은 거지. 그렇게 가예가 태어났어.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이야.

내 아이는 바로 따뜻한 물에 씻겨져서 내 품에 약 5초 정도 안겨졌다가 간호사들 손으로 넘겨졌어. 아기가 너무 빨리 나와서 산소공급이 잘 안됐다고 하더라. 12시간 정도 호흡기를 껴야 한다고 하며 신생아 실로 옮겨졌어. 그래서 나는 가예를 낳은 그 하루 동안 가예를 보지 못했어. 호흡기를 하고 있을 가예를 생각하면서. 다음 날이 돼서야 상태가 호전이 되었다는 가예를 창문 너머로 처음 만났어. 그리고 처음으로 아이에게 젖을 물렸지.


둘째인 가온이는 퍼스에 있는 호주 공립 병원에서 낳았어.

내가 가온이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 한국에서 이슈가 된 다큐가 있었는데 자연주의 출산에 대한 내용이었어. 나는 그 다큐를 보면서 첫 아이를 낳았던 경험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어. 그래서 가온이는 여전히 병원에 가서 낳긴 하지만 최대한 의료진의 개입이 없이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호주는 아이를 받아주는 사람이 의사가 아니고 미드 와이프라고 산파가 받아줘. 한국은 조산원이 있고 그곳에 산파가 있는데 호주에는 산파가 병원에 있는 거야. 아이와 산모를 돌보는 전문가 들인 거지. 한국에서는 담당의사가 내 임신기간 진료를 체크 업해주었다면 호주에서는 미드 와이프들이 태아와 산모를 관리를 해줘. 출산 당일에도 미드 와이프들이 내 아이를 받아줬고.

새벽 1시에 진통이 와서 잠에서 깼어. 우리는 한번 겪어봤기 때문에 비교적 능숙하게 준비해서 병원으로 갔어. 대기실 침대에 눕거나 앉아서 진통을 겪었는데 가예와 마찬가지로 진통은 세 시간으로 무척 짧았고 이번에도 자궁경부가 2센티에서 급 10센티가 열려서 무통주사를 또 맞지 못했어. 이번에도 F***을 외치며 출산실로 이동을 했어.

호주에서의 출산실은 여러모로 한국과 달랐어. 한국은 참 시설이 부내 났는데 여기는 그냥 있어야 할 것들이 있는 정도. 한국과 반대로 작은 방에 침대가 놓여 있었고 미드 와이프가 두 명이 들어와서 준비를 하고 있었어. 방은 조명으로 아주아주 환했고 클래식도 없었어. 근데 너무나 편했어. 나는 일단 Y자 의자에 앉아서 자리를 벌리고 있는 굴욕적이고 불편한 포즈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침대에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앉거나 서거나 누워있을 수 있었어. 한국에서 하는 굴욕 3종 세트 - 관장 제모 내진 중 내진만 있었어. 미드 와이프들은 마치 옆집 아줌마나 우리 이모들 같았어. 계속 따뜻하게 말을 걸어줬고 잘하고 있다고 응원해줬어. 제이슨은 출산 내내 내 옆을 지켰어. 그 순간만큼은 내가 정말 제일 중요한 사람인 느낌이었지. 그때 출산 당시 둘째 가온이가 태어나던 그때를 담은 영상도 있어. 정말 아팠지만 묘하게 편안했어.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아이를 만났거든.

나는 출산 당시 딱하나를 요구했었어. 아이가 탯줄을 달고 있는 상태에서 안고 있고 싶다는 거였는데 그걸 가온이랑 함께 했어. 회음부를 수습하는 10분 동안 나는 여전히 탯줄을 달고 있는 뜨거운 핏덩이를 안고 이야기를 나누며 젖을 물렸어. 그야말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만끽했지.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 황홀할 만큼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가예와 이런 경험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게 너무나 안타깝더라.





출산 당시로만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호주에서 한 출산이 훨씬 편했고 자연스러웠고 내가 인격체로써 대우받으면서 소중한 순간을 느꼈던 거 같아. 한국에서의 출산은 내가 큰 공장에서 돈이 되는 부품으로만 여겨진 느낌? 온갖 좋은 것들은 있는데 제일 중요한 산모 본인과 아이가 없는 거지. 호주에 사는 미씨들 커뮤니티에 보면 종종 이런 질문이 올라와. 한국에서 출산할까요, 호주에서 출산할까요.

보면 답변은 반반이더라고. 나처럼 호주를 추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족이 있고 산후조리 천국을 느낄 수 있는 한국이 최고라는 사람들도 있지. 나 또한 출산만을 생각했을 때는 단연코 호주인데 출산 후를 생각하면 한국 손을 안 들어줄 수가 없는 부분도 있어. 여기는 애 낳자마자 오렌지 주스랑 시리얼 먹으라고 갖다주더라고. 애 낳고 입맛도 없는데 그게 넘어가나. 결국 미리 만들어 놓은 미역국을 배달시켜서 먹었어.


한국은 산후조리 정말 천국이야. 돈이 있다는 가정하에서 말이지. 산후조리원은 2주에 500만 원 정도 하니까 진짜 적은 돈은 아니야. 나는 사실 조리원 안 갈라고 했었거든. 근데 급하게 일주일 예약해서 들어갔는데 정말 천국이었어.

내 몸인데 내가 제대로 가눌 수도 없으니 무섭고 서러워. 손목이며 관절이 얼마나 아픈지... 처음이라 내 몸 하나 추스리기도 힘든데 그 핏덩이를 내가 혼자서 감당하려면 내 몸 회복은 포기해야 해. 그런데 산후조리원에서는 전문가들이 내가 잠을 자고 회복하는데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거지.

반면 호주에는 그런 게 없어. 누가 좀 산후조리원 좀 만들어주면 좋은데 이게 의료법이랑 합쳐져서 쉽게 추진이 되는 게 아니라더라고. 가온이 낳고 산후조리는 거의 혼자 했다고 봐야지. 미리 출산 전에 냉동실에 미역국이랑 먹을 거 꽉 채워놓고 해동시켜서 혼자 밥 차려 먹으면서 핏덩이 안고 젖먹이고 하는 거야. 애 낳았다고 주변 이웃들이 음식 해서 갖다 주고 그랬었어.


호주에서 아플 때 병원에서 주는 밥....ㅠ



출산도 그렇지만 산후조리에 대한 개념도 양국이 아주 달라.

한국에서는 출산 후에 바로 씻으면 산후풍 걸린다고 못 씻게 하거든. 심하면 21일 동안 머리 못 감게 하기도 해. 엄청 뜨겁게 하고 있게 하고 찬바람은 맞는 건 상상도 못 하지. 그런데 호주에서는 바로 씻으라고 해. 위생상 좋다고. 최대한 빨리 일상생활하는 걸 권장하기 때문에 여기 엄마들은 애 낳고 막 돌아다니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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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와, 잘 모르는 내 입장에서 들어도 엄청 다른 게 느껴진다. 두 나라에서의 출산을 다 경험한 네가 말해주는 경험담이라 더 생생하게 느껴져. 비교적 수월하게 낳았다며 '나 애 숨풍 숨풍 되게 잘 낳아ㅋㅋㅋㅋ'하면서 장난스럽게 말하는 너지만 정말 아팠을 텐데, 친정도 없는 호주에서 그 고생을 했던 걸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 출산이 가장 힘들었던 경험이야? 호주 생활하면서 그만큼 또 힘들었던 일이 있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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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힘들었던 기억이라.

개인적으로는 아까 말했던 학생비자로 뻘짓했던 그 1년이고 엄마로서는 가예가 난청 진단을 받았던 날이랑 수술했던 날을 꼽을 수 있을 거 같아. 정말 가족에게도 가예에게도 큰 사건이었지. 아이가 처음으로 보청기를 끼고 내 목소리를 제대로 들었던 그 날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아. 아이가 세면대에 앉아서 몇 번이고 물을 틀고 그 소리를 듣더라고. 늘 듣고 있었다고 믿었던 소리 나는 장난감을 귀에 대고 계속 듣기도 하고.


가예가 난청 진단을 받고 나서 나는 별로 운 적이 없어. 눈물 많은 제이슨만 시떡하면 울었지. 나는 인공와우 수술을 하던 전 날 밤이랑 마취에서 깬 가예를 만났을 때 울었던 두 번 말고는 아이 앞에서 안 울려고 노력 많이 했었어. 가슴으로 울었지. 가예 앞에서 내가 울면 아이가 위축이 될까 봐 나한테 미안해하거나 자신을 원망하기라도 할까 봐 항상 강한 모습으로 있으려고 노력했었어.  가예가 난청이라는 그 핸디캡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거든. 고작 8살이지만 늘 열심히 하고 어려운 것도 참으면서 하는 거 보면 너무 고맙고 기특해서 힘들다가도 행복해져.





 -

A : 난청이라는 게 어떤 장애인지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조금만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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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앞을 보기 힘든 사람들 중에서도 근시, 난시 등 여러 종류가 있듯이 난청도 생각보다 다양하고 복잡해.

가예는 난청 중에서도 고도난청을 가진 아이야. 소리에는 큰 소리, 작은 소리.... 이런 볼륨이 있기도 하지만 주파수 영역별로 저주파, 중주파, 고주파도 있거든. 가예는 저주파는 약간 들을 수 있지만 고주파 영역은 들을 수가 없어.


예를 들자면 It's sunny today. 같은 문장을

우리는 "잇츠 써니 투데이."라고 듣지만 가예처럼 고주파 영역이 거의 제로인 아이는 저 문장이

"익으 어니 투데이" 이렇게 들리는 거야. s 사운드가 고주파 이기 때문에.


가예는 저주파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내가 큰소리로 부르는 소리 같은 것은 다 반응을 해서 나는 크게 문제가 있다고 인지를 하지 못했어. 두 돌이 지나고 말도 제법 하기 시작하고 어눌한 발음이지만 노래도 잘 불렀거든. 발음이 어색한 건 단지 어리기 때문이고 크면서 나아질 거라고 생각을 했어. 세 살이 되었고 다른 또래 아이들보다 느린 가예를 보면서도 가예는 이중언어에 노출이 되어서 조금 느린 거라고 생각했어. 영어 발음이 너무 안 좋은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한국어를 주로 쓰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지. 나는 너무 무지하고 오만한 엄마였어.

노래들의 가사를 웅얼거리는데 가사를 정확히 발음해서 부르는 노래가 하나도 없다는 게 점점 이상하게 느껴지더라. 차일드 케어 선생님이 "가예가 나를 무시를 하는 건지 못 듣는 건지 모르겠는데 가까운 거리에서 큰 소리로 몇 번을 불러도 돌아보지 않았다"고 해서 그제야 아이를 유심히 보니 이상하더라. 나는 듣고 나에게 반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주위를 돌아보다 엄마를 발견하고 눈을 마주친 거였어. 그걸 나는 아이가 내 소릴 들었다고 착각했다는 걸 알게 된 거지. 아무튼 그때 정밀검사를 해보니 가예의 난청은 심각한 수준이었어.

미드 노트(마, 바 이런 소리)는 정상에 가깝게 듣는 수준이었고 점점 하이 노트로 갈수록 (ㅅ,ㅎ, 소리... 혹은 영어 sh, ph, f 이런 소리)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더라. 하이노트인 삑~~~ 끼익~~~ 하는 소리가 나올 때는 너무나 소리가 커서 나는 귀마개를 했는데 가예는 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해 미동조차 없었어.

그동안 가예에게 'bus'를 따라 해 보라고 했을 때 '버-'라고만 발음했던 이유가 이거였어.

내 이름인 '선아'의 경우도 '건아'라고 발음을 하고. 영어 f 발음은 아예 하지 못해. 들리지 않기 때문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많은 검사들과 언어 치료.. 차가운 기계들 안에서 별의별 검사와 치료를 받는 가예를 보며 나의 무지함을 얼마나 가슴을 치고 후회했는지 몰라. 정말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비가 되고 아이는 물론 모든 가족이 진이 빠지도록 고생을 해. 장애가 있는 아이를 부모가 혼자 케어 (금전적, 육체적, 정서적)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 힘든 일이라는 걸 알았어. 가족과 개인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국가와 사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지.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나 혼자라면 한국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 한국에서는 나는 한국인이라는 주류 인종이고 언어나 문화에서도 걸림돌이 없으며 더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거든.

하지만 난청이라는 장애가 있는 딸아이를 가진 엄마로서는 호주라는 사회에 살고 있어서 정말 천만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어. 호주라는 나라는 정말 장애아동에 대한 지원이 공격적이다 싶을 정도이거든.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없는 - 길가면서 왜 못 듣냐, 애 귀머거리냐?라는 소리를 안 하는 - 호주의 사회적 인식도 내가 가예를 위해서 호주에 남고 싶은 큰 이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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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네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호주에서 난청 장애아인 가예가 국가로부터 어떤 혜택을 받고 있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이 질문에서 선아는 30분을 넘게 망설이며 대답을 하지 않으려 했어. 이런 이야기들이 자랑처럼 비추어지고 한국에서 장애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까 염려된다며 의도치 않은 상처를 누군가에게 주고 싶지 않다고 하였지. 우리는 길게 이야기를 나눴고 우리가 이런 현실을 공론화하고 더 나은 선진국의 제도와 비교를 해야 한국의 난청 아동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어. 선아와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난청아동 지원을 위한 청와대 청원을 하고 난청 아동 와 그들의 부모들의 어려움을 더 알릴 수 있는 글을 연재해서 펀딩을 하는 등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기로 약속하였어. 공허한 자랑으로 끝나지 않게 하겠다는 나의 약속을 받아낸 끝에 솔직히 고백한 선아의 이야기를 색안경 없이 읽어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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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나는 한국에서도 가예를 데리고 있어 보았고 호주에서도 가예를 돌보았어. 정말 어렵지만 비교를 해볼게.

내가 한국을 떠난지는 시간이 좀 흘렀고 나도 가예의 이야기만 알뿐 전문가는 아니니까 신뢰도는 떨어질 것을 감안하고 읽어줬으면 좋겠어.

한국에서는 보청기를 사비로 사는 경우가 많아. 보청기가 여러 가지 브랜드가 있고 그 퀄리티에 따라서 난청인이 듣는 소리의 음질도 달라지는데 나라에서 보조해주는 보청기는 질이 엄청 안 좋다고 들었어. 괜찮은 보청기가 약 500만 원 정도가 되거든. 난청인은 보청기 같은 보조기구를 낀다고 다 끝나는 게 아냐. 검사비용, 그리고 언어치료 비용, 그리고 보청기 조율도 꾸준히 해줘야 하는데 그걸 한국 건강보험에서 어느 정도는 커버를 해주는 걸로 알고 있지만 다 커버되는 것은 아니야. 언어치료 비용 같은 경우는 한 회당 10만 원씩 들여야 하거든. 근데 아이들 같은 경우는 말하는데 지장이 없게끔 하려면 부모의 욕심이 절대 아니라 아이의 재활을 위해서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언어치료를 해줘야 해. 난청은 언어발달, 그리고 학습장애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초기에 아이의 재활이 무척이나 중요한데 한국에서는 내가 이 모든 걸 나 혼자 다 해야 한다는 부담이 어마어마했어.

매일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가고 언어치료를 데리고 가고... 그리고 난청 아이에 대한 담당 선생님에 대한 인식도 굉장히 미비하니까 그런 교육도 엄마가 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지. 금전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나 고단하고 힘든 일이었어. 한국에서 언어치료 같은 경우는 건강보험에서 바우처를 제공해줘. 내가 직접 바우처를 신청해서 언어치료실에 갖다 주는 다소 번거로운 일이었어. 그래도 지원해주는 게 어디냐고 감지덕지 해.

내가 알기로는 인공와우 수술은 수술비용은 나라에서 지원을 해주는 데 사용하는 기기 같은 경우는 약간의 보조금을 빼고 가족 본인이 부담을 해야 해. 인공와우 임플란트 기기는 장난 아니게 비싸. 칠백 팔백만 원 정도? 아무튼 이래 저래 크고 작은 일로 금전적으로 부양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 크지. 장애인에 대한 그릇된 편견으로 인한 사회적 인식도 덤이야.




그에 반해 한국과의 비교를 떠나서 호주는 장애인 복지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야.

나 같은 경우는 정말 하늘이 도운 거지. 정말 운이 좋게 가예의 장애를 알기 전에 우리는 영주권을 신청해서 메디케어 혜택을 받았고 그리고 조금 이따가 가예의 난청을 발견했어.

그 이후로 우리는 정말 단 한 푼도 돈을 낸 적이 없어.



- 청력 테스트 국립병원 기준 모두 공짜

- 보청기 무상지원 (한 번에 약 오백만 원 정도) 지금까지 보청기를 세 개 정도 업그레이드를 했음

- 보청기 조율 및 이주에 한번 정도 하는 검사 모두 무료

- 모든 언어치료 무료

- 인공와우 검사 비용 MRI포함 무료

- 그에 필요한 모든 검사와 검진 (일주일에 한 번씩 감) 무료

- 인공와우 무료/ 수술비용 (약 천오백만 원) 무료

- 수술 후 병원 입원 무료

- 재활 검사 무료

- 정기 검진 무료



그 밖에도 보청기와 인공와우에 필요한 배터리와 모든 일회용 액세서리들을 때 되면 무료로 집으로 배송해주는 세심한 서비스도 국가의 몫이야. 가예가 다니는 학교는 일반 초등학교인데 DEAF FACILITY가 있어서 난청 아이들이 좀 많거든. 그 아이들을 위해서 언어치료 선생님이 직접 학교로 와서 개인 수업을 해주는가 하면, 보청기로 직접 소리를 전달해주는 마이크와 스피커가 있는데 그걸 나라에서 학교에 직접 지급하고 설치해줘. 가예 같은 장애 아이가 학교에 입학을 하면 교육청 직원이 나와서 면담을 하는데 그 아이의 상태에 따라서 학교에 주는 지원금이 책정이 돼. 그러니까 학교 입장에서는 장애아이를 받는 게 큰 부담이 아닌 거지. 그리고 Australian hearing이라는 정부 기관에서 나와서 아이들 청력 상태를 주기적으로 체크해줘.

이게 다 무료라기보다는 나라에서 우리에게 주는 정해진 보조금이 있어. NDIS라는 정부 펀드가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받는 금액은 1년에 $10,000 정도 돼. 이 금액 안에서 우리가 필요한 비용들이 청구가 되는 거지 이런 보조는 가예가 17살이 될 때까지 지원을 받을 수가 있어.


나는 멜버른에 오고 나서 내가 혼자 견뎌내야 했던 많은 짐을 이런 서포트를 받고 다 털어낸 기분이었어. 아이의 장애를 부모가 혼자 짊어지는 게 아니라 의료진과 전문가들과 정부, 교육기관의 담당자들이 '넌 걱정하지 마. 우리가 알아서 할게' 하는 식으로 서로 정보를 공유하면서 가예를 케어를 해주는 거지.

가끔 호주 생활에 지칠 때, 고향이 너무 그립고 아이들에게 뿌리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에는 진짜 가예와 가온이를 데리고 한국을 가고 싶다가도 이런 거를 생각하면 마음을 접게 돼. 내가 돈 많고 능력 좋아서 이런 지원이 없이도 가예를 부족함 없이 키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국가의 지원 없이는 가예에게 '귀머거리'가 아닌 '불편함이 있는 일반인'이라는 삶을 선물할 수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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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워낙 어려운 문제라 나도 너도 아주 힘들게 이야기를 이어가게 되는 것 같아. 섣불리 공론화하기가 예민한 문제일수록 자꾸 문제제기를 하고 더 자유롭게 토론을 할 수 있어야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해. 한국과 호주를 넘나들며 난청아동을 키우는 네가 몸소 느낀 이야기가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

장애아를 키우며 느낀 그 '사회적 인식'의 차이라는 것을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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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호주에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언어치료도 받고 어린이집도 다니면서 나는 '인식의 차이'를 많이 느꼈어. 가예는 호주에서 보청기를 맞출 때 여러 가지 다양한 색상, 펄이 들어가고 반짝반짝한 것들 중에서 하나를 골랐고 핑크색을 착용하고 있었거든.

한국에 왔을 때 언어치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10년 동안 일하면서 핑크색은 처음 봤다"라고 하시는 거야. 책에서나 이런 색이 있다는 걸 알았다며 한국에서는 최대한 눈에 안 띄는 살색이나 검은색으로 다들 한다는 거지. 나는 당연히 보청기를 고를 때 가예가 좋아하는 색상으로 골라야 액세서리처럼 자연스럽게 하게 될 거고, 또 보청기가 눈에 뜨여야 다른 사람들에게 난청인으로서 배려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국에서는 반대로 되려 많은 사람들이 보청기는 가려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흥미(?) 로웠어.





가예의 보청기는 눈에 확 뜨였기 때문에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는 상황을 맞닥뜨리는 일이 잦았어. 아이들이 이 아이는 귀머거리냐, 장애인이냐 하며 묻는 앞에서 침착하게 "응, 이건 보청기라고 해. 눈이 잘 안 보이면 안경을 쓰는 거처럼 귀가 잘 안 들릴 때 쓰는 거야~"라고 이야기해줬는데 옆에 계신 그 아이의 부모님들이 펄쩍 뛰며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그런 말 하면 못써!!!"라고 나무라는 걸 보고 더 마음이 아팠어. 자연스럽게 침착하게 대해줄 수는 없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해보지 못해서 그랬던 거 같아. 나야 가예를 겪으면서 오랫동안 이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고 장애우에 대한 인식이 자연스러운 호주에 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배웠지만 한국에서였다면 나도 똑같이 당황하고 어려워했겠지.


내 생각은 이래. 화려한 색감의 보청기를 우리 아이들이 한국에서 당당하게 착용하려면


1. 그런 색상을 원하는 사람들이 수요가 필요하고

2. 그러려면 화려한 보청기를 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져야 하고

3.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려면 장애와 불편함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교육이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장애가 없는 사람들과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경계가 없어지면

우리는 알록달록 예쁜 색깔의 다양한 보청기를 착용한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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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100 % 정말 너무 가슴 깊이 공감해. 너무 좋은 이야기, 가슴으로 울리는 '진짜 이야기' 해줘서 정말 고마워.

우리 이번에는 약간 분위기를 바꿔서 일반 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한국과 호주를 넘나드는 독박 육아 8년 차 베테랑으로서 한국과 호주의 육아를 비교해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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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호주에서 미취학 아동을 키우는 한국 부모들이 종종하는 이야기가 호주는 아이들의 천국이지만 부모들은 안 천국이다 이거거든. 어떤 부분에서 호주가 부모들한테 별로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한국은 집에서 유치원까지 버스를 운행해서 집 앞에서 픽업해서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밥도 원에서 급식으로 다 주고 이러잖아. 근데 호주는 그런 게 없어. 부모가 아침에 직접 학교까지 애들을 드롭해주고 3시가 되면 픽업을 하러 가야 해. 그러니까 일을 하게 되면 아이를 픽업하기 위해서 오전에만 일을 하던가 아이를 또 다른 케어로 보내야 하는 거야. 그리고 급식이라는 문화가 없어. 그 좋은 걸 왜 안 해주나 생각을 해봤는데 여기는 워낙에 다문화 국가라서 모든 아이들의 문화를 고려한 한 가지 식단을 제공하기가 어렵고 음식으로 인한 알레르기에 무척 민감하기 때문인 거 같아. 그래서 땅콩 이런 거에 알레르기가 있으면 가정통신문으로 땅콩은 절대 학교에 갖고 오지 말 것이라고 알려주고 그러거든. 그리고 아이들에게 음식을 절대 나눠먹지 말라는 교육을 해. 처음에는 뭐 이렇게 까지 하나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나도 이런 교육이 맞다고 생각해. 다수의 노력으로 인해 소수의 - 단 한 명의 아이일지라도 - 안전을 지켜주는 교육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저렇게 소수의 문화를 존중하고 케어해주는 이곳의 교육방식이 내 아이가 소수가 되었을 때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해주니까 이제는 호주의 교육을 받아들이게 된 거 같아. (물론 도시락 싸는 건 아직도 토 나올 거 같아. ㅋㅋ)


내가 가예를 키울 때에는 제이슨이 근무하는 역삼동과 잠실에서 살았어. 동네 특성상 육아에 열성적이고 교육열이 높은 엄마들이 많았지. 내 경험에서 느낀 것들을 이야기해보면 한국에서는 나를 포함한 주변 엄마들이 대부분 두려움을 갖고 아이를 키웠어. 여기 엄마들이 걱정을 안 한다는 건 아니지만 두려움까지는 아닌 거 같아.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국은 그걸 이용을 해서 엄마들이 돈을 쓰게 만드는 데에 탁월한 사람들이 많다는 거. 막상 사놓으면 쓸데없는 육아 용품들도 많고, 몇백만 원짜리 전집이나 교재 등도 그런 엄마들의 두려움을 이용하는 거야. 옆집 엄마는 이 전집을 사서 아이의 창의성을 개발하고 있는데 너는 뭐하고 있니?하는 거지. 진짜로 이거 안사면 니 아이 큰일 난다 이렇게 말하는 전집 판매원도 만난 적 있어. 한국의 엄마들은 그런 주변의 권유를 빙자한 압박에 노출돼서 아이를 키우게 되다 보니까 그게 자연스럽게 사교육의 열기로 까지 이어지는 거 같아. 내가 아무리 맨 정신으로 나는 애를 자연만 접하고 흙만 만지게 하면서 키울 거야 라고 해도 넘쳐나는 정보와 거기에서 내 아이만 도퇴된다는 두려움 속에서 나를 온전히 붙들기는 힘들지. 나는 그걸 불안 마케팅이라고 불러.


또 어딜 가도 사람이 많고 차가 많고 좁잖아.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아이를 양치기 하면서 키울 수밖에 없어. 거기는 위험해, 그거는 더러워, 사람들 조심해 이런 말이 늘 나오는 거지. 나도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살다가 가예가 18개월이 됐을 때 호주에 왔는데 오자마자 충격받았어. 퍼스 바닷가에서 얘들이 추운 날 반바지만 입고 모래를 집어먹어가면서 뛰어노는데 엄마들은 다 느긋한 거야. 하지 마, 가지 마, 위험해, 더러워 라는 말 대신에 '맥파이 (호주 까치) 조심해'이러지. 호주 까치는 산란기에 사람을 공격할 때가 있더라고. 가예 눈두덩이를 두 번이나 공격했다니까. 그러니까 호주는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경고를 해야 하는 거야. 독거미 조심해, 맥파이 조심해, 독뱀 조심해. 등등.

 여기서 쓰는 용어 중에 Safe haven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단어가 딱 여기 엄마들이 아이들을 키우는 방식을 설명하는 거 같더라. 쉽게 설명을 하자면 엄마는 아이에게 세상에 대한 믿음을 주고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려주는 거야. 안전한 울타리를 쳐주는 거지. 그리고 엄마는 아이를 따라다니지 않고 그 안에서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게 내버려둬. 그래서 호주의 놀이터를 가보면 아이들이 놀이터 밖으로 어른의 도움 없이 나갈 수 없는 세이프티 게이트가 설치해 놓은 곳이 많아. 그러면 그 안에서 아이들은 구르든 몸을 던지든 매달리든 뭐든 해도 괜찮은 거야. 아이들한테는 선택하고 경험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거지. 이런 울타리 안에서 놀다가 조금 불안해지고 엄마가 보고 싶어 지면 다시 엄마의 품으로 돌아와서 안전을 확인하고 다시 놀러 나가. 나는 이게 무척 좋다고 느꼈어. 아이들에게 제한되었지만 보장된 자유를 주는 육아.

그런 방식으로 성인으로 자란 얘네는 자기들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데 비교적 익숙한 것 같더라. 한국은 성인이 된 후에도 인생의 선택을 할 때 부모의 개입이 좀 잦은 반면에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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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그래. 이번에도 정말 내 머릿속을 옮겨놓은 것처럼 공감 가는 말만 한다. 나는 그걸 '위험 마케팅'이라고 불러. 한국은 미래에 대해 극단적으로 겁을 줘서 양치듯이 몰아가는 경향이 있어. 예를 들어 저금을 안 한다고 하면 여기 사람들은 그러면 나중에 사고 싶은 거 못 사고 여행 못 다니겠네~ 이 정도로 말하는데 한국은 막 '나중에 늙어서 추운 날 폐지 줍고 다닐래? 길바닥에 나앉고 싶어?' 이런 식이잖아. 결혼 안 하고 애 안 낳는다 해도 늙어서 '혼자 외롭게 독거노인으로 살다가 고독사 하고 싶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다반사야. 거대한 사회적 위험 마케팅인 거 같아. 사회 통념을 잘 따라가는 모범시민으로 키우기 위한.

여기 얘들이 나는 저금 안 해~ 했을 때 '너 홈리스 돼서 쓰레기 줍고 다니고 싶어?' 했다가는 멱살 잡힐걸!?


너랑 육아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까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러는데, 한국에서는 요새 '맘충'논란이 심하잖아. 그런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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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맘충이라. 나 정말 저 단어 자체는 너무 싫은데 이해는 해. 남한테 피해 주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뭔 잘못이야 부모가 잘못이지. 일부의 이기적인 사람들에 대한 편견으로 멀쩡하게 조심히 육아하고 있는 엄마들까지 싸잡아가며 엄마를 겨냥한 맘충이라고 부를게 아니라 그냥 남한테 피해 주는 사람들을 피해 충이라고 하면 안 되는 걸까? 굳이 누군가를 벌레로 불러야 한다면 말이야. 그것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애엄마 입장에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노 키즈 존이 생기는 것도 이해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방해하고 시끄럽게 하는 아이들이 없는 곳에서 조용히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공간과 아이들과 가족들이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면 서로의 만족도도 올라가겠지. 기저귀 갈이 테이블이나 아기 의자나 색칠놀이가 구비되어있는 그런 곳에 가면 눈치 받을 일도 없고 편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엄마가 된다는 것 만으로 어른들의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세상과 격리된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도 어쩔 수 없어.


한국 지하철에서 아이가 울면 정말 난감할 때가 많았어. 갓난아이가 아무리 달래도 우는 걸 어쩌라는 건지 시끄럽게 운다고 그걸 나무라고 화를 내는 경우도 있었거든. 그런 게... 이렇게 가면 너무 멀리 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소수를 존중해주지 않고 주류에게 편한 나라라는 나의 생각과 일치하다는 걸 느껴. 아이들은 어른이 아니잖아. 성숙한 어른들이 이해해주고 배려해줘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이가 있다는 것만으로 엄마들은 약자가 되는 경우가 있지.

아무튼 나는 두 입장 다 이해해. 그래서 부모가 아이를 단호하게 제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러면 안 되는 상황에서는 안된다고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줘야지. 나도 그러려고 많이 노력해. 아이가 제어가 안 되는 나이라면 나는 최대한 통제할 수 없는 곳은 애초에 데리고 가지 않지. 그래서 맨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식당에서 못 먹고 싸서 공원에서 먹었어. ㅠㅠ 그런 노력도 알아줬으면 좋겠어. 대부분의 경우는 통제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사정이 많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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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네가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키우면서 가지고 있는 교육관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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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나는 내 아이들을 키우면서 강조하는 거 몇 개가 있는데 남한테 피해 주지 말아라. 다른 사람들 아프게 하지 말고 상처 주지 말아라. 싫으면 싫다고 말하고 고맙다고 말해라. 인사해라. 제이슨은 특히 밥상머리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해. 밥상에선 허리 피고 말할 땐 입 가리고 말해라 뭐 이런 거.

난 우리 아이들이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고 그리고 그걸 자문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고.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딱히 대단히 그런 건 아닌 거 같아.

남한테 피해 주지 않고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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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선아 너의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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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나를 아는 사람들은 믿을 수 없겠지만) 어릴 때 꿈이 현모양처였던 적이 있었어. 그때는 뭣도 모르고 한 말이었겠지만.  지금도 기본적인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지고지순하게 희생하는 순종적인 아내와 엄마가 되겠다는 말은 아니고 그냥 내 파트너가 나에게 그렇듯 나도 좋은 배우자가 되고 싶다는 의미의 양처, 내 아이들에게 현명하고 좋은 엄마인 현모가 되고 싶어. 나는 항상 꿈이 바뀌고 항상 하고 싶은 것들이 있는 것 같아. 나는 미술을 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미술 선생님이라는 직업도 나에게 잘 맞았었어. 사회생활을 오래 쉬다가 지금은 한 번도 생각지도 않았던 직종에서 일을 하는데 이것도 너무나 재미있어. 위빙이나 미술로도 계속 나를 표현하는 일을 하고 싶기도 하고.

누군가는 하나의 꿈과 열정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지만 나는 내 성향이 호기심도 많고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이것저것, 그리고 그때그때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들을 선택하면서 사는 거 같아.

나는 어릴 때부터 꿈이라는 게 꼭 경제적인 가치를 만드는 직업일 필요는 없다고 항상 생각했었어. 대신에 내가 살고 싶은 미래의 청사진들이 언제나 두세 개씩 있었지. 젊을 때는 내 꿈이 세 개였어. 하나는 강이나 바닷가 앞에서 베이글을 굽고 커피는 팔면서 한가롭게 사는 나의 모습, 그리고 두 번째는 커리어우먼처럼 슈트를 입고 미술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나의 모습, 세 번째는 사랑하는 사람과 유럽의 한 숲 속을 맨발로 걸어 다니는 자유로운 나 - 비슷한 면이라고는 하나도 없지? 그만큼 다양한 자아가 있다는 거지.

지금은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 조금 바뀌었어. 우선순위는 나보다 가예와 가은이가 되었으니까.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나중에 60살-70살이 되면 캠핑 트레일러 하나 사서 바닷가 근처에서 남편이랑 한갓지게 살고 싶어. 바이런베이 이런데서 수영하면서.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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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그냥 호주에서의 고군분투 육아 이야기를 들어볼까 해서 너에게 인터뷰를 신청한 거였는데 내 예상을 정말 훨씬 너무 어마어마하게 뛰어넘는, 흔하지 않은 진짜 이야기를 들려줘서 정말로 고마워. 이렇게 깊고 복잡한 여러 가지 문제 - 양국의 출산 시스템, 육아관, 장애아동에 대한 국가의 역할- 등등을 유쾌하고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을 줄 몰랐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거웠어. 내가 몰랐던 세상과 내가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했던 편견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들이 있다면 해주면서 마무리해줘. 인터뷰 정말이지 너무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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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장애가 있든 없든 애 키우는 엄마들이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아이를 키울 거야.

내가 혼자 인스타에 주절이며 썼던 말을 다시 할게.

내 애가 지금의 이 모습으로 커줄걸 알고 있었다면 그때 그렇게 걱정하며 키우진 않았을 거 같아.


아이들은 부모의 걱정을 먹고 자라는 거 같더라. 장애라는 건 절대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래서 부모의 입장에서 어떻게 키워야 할까 고민을 많이 하는데, 결국 자식의 핸디캡은 내가 아이에게 씌워줄 수도 있고 없애줄 수도 있는 거 같아. 내가 내 아이의 장애를 부끄러이 여기면 가예는 평생 부끄럽게 살 거라고 생각했어. 반대로 아이에게 그 핸디캡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주면 아이는 스스로 사회의 편견에서 당당해질 수 있는 작은 방패를 가질 수 있을 거 같거든. 난청이 있는 가예를 절대로 다른 나이 또래 아이들과 비교하지 않는 것, 스스로의 그래프에서의 발달을 보고 격려하는 것. 이것도 핸디캡이 있는 아이를 키우면서 내려놔야 했던 것 중의 하나였어. 아이를 키우면서 그리고 호주에 살면서 느꼈던 많은 것들을 이렇게 멋진 기회로 이야기할 수 있었음에 감사 또 감사드리며. 비슷한 경험이나 고민을 하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긴 이야기 끝까지 읽어줘서 너무 고마워!







놀러와! :-)


선아 (인스타)   :  JOYFORESUNA

선아 (블로그)   :  https://blog.naver.com/suna1108



앨리스 (개인 인스타) :  ALICEINMELBOURNE  (앨리스 팀 첫 번째 레스토랑)

SUDA (공식 인스타) :  SUDAMELBOURNE  (앨리스 팀 첫 번째 레스토랑)

NEMO (공식 인스타): NEMOMELBOURNE (앨리스 팀 두 번째 레스토랑)




*답글은 원래 하던 대로 반말로 주고받으면 더 좋을 거 같아!! 나도 그게 편하고, 언니 거나 오빠 거나 친구 거나 동생일 너도 그게 편할 거야, 하다 보면!! 물론 존대가 편하면 그렇게 소통해도 좋아 :-)


**호주 이민 생활 중이거나, 호주에서 이민 과정을 밟고 있는 동료들 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이민을 생각하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조언들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부담 없이 댓글이나 인스타 디렉트 메시지를 줘! 꼭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일 필요도 없어. 지금 이민의 과정을 밟으면서 느끼는 고충과 어려움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민에 대한 좋은 점과 후회되는 점도 가감 없이 나누고 싶은 동료들의 참여 기다릴게!


***출처를 밝힌 공유는 언제나 환영이야!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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