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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버른앨리스 Mar 29. 2018

춤을 사랑한 어떤 소년의 어른 동화 by 청기

비보이로 이민을 한 남자 이야기


세계 무대를 주무르며 그 재능으로  

호주 이민까지 성공한 비보이를 만나러 가는 길.

어릴 때 춤춘다고 까불고 다니던 내 친구들을 춤꾼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다만 그 친구들 이후로 처음 만나는 진짜 춤꾼. 금방 만나게 될 그를 상상하며 나는 어쩌면 어떤 '쎈 캐릭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아. 누가 봐도 마구 힙한 비보이 같고 티브이 속에 나오는 연예인처럼 화려한 그런 사람 있잖아.

그런데 약속 장소에서 만난 청기의 첫인상은 진부한 나의 편견을 뒤엎었어. 깔끔하며 단정한 옷차림에 예의 바른 행동. 허세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공손한 말투, 생각보다 너무나 순박하고 투박한 모습에 나는 조금 놀랐던 것 같아.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서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시작했어.

그는 또한번 나의 예상을 다시 뒤엎었는데 순하고 착한 첫인상과 다르게 내가 여태껏 인터뷰를 한 어떤 사람보다 까다롭고 힘든 인터뷰 상대인 거야.

처음 몇 마디를 주고받는데 느낌이 쎄했어.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 얘랑 이래서 인터뷰가 될까? 싶을 정도였어. 왜냐하면 청기의 대답들은 정말 단순했거든. 어떤 질문을 던져봐도 비슷한 대답이 첫 문장으로 나왔어.


글쎼 ~ 너무 좋아서!
모르겠는데. 너무 멋있었으니까!
뭐라 그러지, 너무 좋았다고 해야 하나?
너무 좋아서. 좋으니까. 멋있어서. 좋아서...



춤을 추기 시작한 이유도, 힘들었지만 춤을 그만 두지 못한 이유도, 새로운 직업 시작한 이유도, 너의 직업의 편견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도, 왜 이 일이 좋은 지도.

분명히 나름대로는 성심성의껏 대답하는 거 같은데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거 같았어.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좋기 때문에. 멋있어서. 너무 좋아하니까. 내가 너무 극적인 이야기를 기대한 걸까. 생각보다 너무 단조로운 대화가 이어지니까 미간이 찌푸려지고 초조해지더라.


그러니까 왜 좋았는데, 어떤 점이 좋았는데? 왜 그렇다고 생각해?

그만큼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왜 멋있다고 느끼게 되었어? 말해봐.


이런 나의 멍청한 질문공세에도 누구보다 열심히 성실하게 고민하며 대답을 하는 청기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문득 정신이 들었어. 청기의 잘못이 아니었어. 전문 작가도 아닌 주제에 나는 벌써 겉멋이 들은 거야. 문제는 청기가 아니고 계속 그를 채근하며 그럴싸한 이야기를 뽑아내려는 내게 있었어.

이 친구는 이렇게도 열심히 분명한 이유를 말하고 있는데 대체 뭐가 더 필요한 거지? 왜 좋아서 좋다는데 왜 나에게는 더 타당한 이유가 필요한 걸까.


언제부터 이렇게 모든 일에 이유가 필요해진 걸까.


친구들 사이에서 피터팬 증후군이라고 불릴 만큼 철없는 나도 이제는 다 어른이 되어버렸구나, 그저 철딱서니가 없고 천지 사리분별을 못하는 것일 뿐 순수함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구나 를 씁쓸하게 깨달았어.

청기를 만나고 말이야.







타국에서 사업을 하는 동안 이런저런 계기로 나는 성공한 30대의 친구들을 참 많이 만났어.

정말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 정말 높은 곳에 있는 내 또래들을 보면서 나는 대단하다고 생각은 해도 한 번도 그들이 가진 것을 부러워한 적이 없거든. 그 친구는 그 친구고 나는 나. 내가 가진 것들은 따로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내가 자존감이 엄청 높아서 남 의식 안 하고 누군가를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거든. 청기를 만나고 나서 그게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지. 내가 자존감이 높아서 시기 질투를 안 한 게 아니고  그저 내가 여태껏 만난 사람들 중엔 내가 원하는 걸 가진 사람이 없었던 것뿐이었어. 정말이지 청기가 처음이었어. 성인이 되고 직접 만난 사람 중 청기만큼 나를 질투 나게 한 사람이 없었어. 며칠 내내 너무 부럽고 질투가 나서 심통이 투실투실 날 정도였으니까.


왜 그럴까 생각해봤거든. 왜 이렇게 샘이 날까.

내가 부러웠던 건 청기가 가진 화려한 타이틀도, 비교적 쉽게 이루어진 이민도, 화려한 직업도 아니었어. 나는 아닌데 그가 아직도 지키고 있는 그 순수함. 춤을 이야기하는 그 얼굴에서 느껴지는 그 순수함, 그 순수한 열정.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도 힘든데 그 꿈을 이루고 그걸 무려 21년간 지켜내고도 나는 그 일이 좋아 죽겠다고 말하는 그 순수함, 나이를 먹어가면 갈수록 좀처럼 보기 힘든 그 순수함이 멋있고 부러운 나머지 얄미워 죽겠더라고.

  

청기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얼마 전에 넷플릭스에서 본 애니메이션 '발레리나'를 떠올렸어. 너무나도 춤이 추고 싶었던 고아 소녀의 이야기. 발레 슈즈를 신고 뱅글뱅글 돌고 있는 펠리시의 행복한 미소가 30대 중반이 된 이 남자의 얼굴과 겹쳐져서 인터뷰에 집중을 하기 힘들었어.

'30대 어떤 청년의 특이한 이민사'를 인터뷰하러 온 자리에서 나는 춤이 너무나도 좋았던 한 소년의 성장기를 들은 거야. 정말이지, 진짜 동화 같은 이야기였어.







요새 같은 때에 현실세계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이 이야기.

이 이야기를 내가 할 수 있게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건 아직도 조금 샘이 나지만.


자 이제 나의 13번째 호주 청년 이민자, 오늘의 이야기의 주인공을 너에게 소개해.


비보이 BLUE.

김청기.



나에게 그랬듯이, 그의 진심 어린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울림이 되기를 바라며.


이번에도 재미있게 읽어주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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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ALICE) : 안녕, 청기야 반가워!

먼저 자기소개 간단히 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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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청기, BLUE) : 안녕, 반가워. 나는 김청기라고 해. 나이는 30대 중반, 85년 생이고 억양을 들으면 알겠지만 부산 남자야. 호주에 온지는 올해로 4년이 되었어. 직업은 현재 두 가지야. 나는 21년 차 비보이이고, 2년 차 바버 야. 비보이는 다 아는 것처럼 비보잉을 전문으로 하는 댄서라는 일이고 바버는 간단히 설명하면 남성 전용 미용사를 뜻해.





BLUE, THE B-BOY




청기, THE BAR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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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으응, 두 직업 다 내가 한 번도 개인적으로 만나보지 못한 직업이라 시작부터 너무 흥미롭다.

그럼 제일 궁금한 거 먼저 물어볼게. 청기 너의 직업을 들으니 이민과 정말 동떨어지게 느껴지거든. 21년 차 비보이가 어떻게 이 곳에서 이민을 와서 살고 있는 건지 먼저 물어봐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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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모두들 그걸 굉장히 신기해하더라. 일반적인 방법 (결혼이나 기술, 사업이민)이 아닌 특이한 방법으로 영주권을 취득했기 때문인가 봐. 나는 '디스팅귀시 탤런트 비자'를 통해 호주에 이민을 오게 되었어. 특정한 재능으로 국제 대회에서 우승을 하거나 세계 랭킹에 오를 정도로 두각을 보인 사람에게 주는 비자의 형태야.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영입해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게 하거나 호주의 국기를 달고 세계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를 바라는 거지. 기술이나 사업 같은 눈에 보이는 경제효과를 내는 이민자들도 필요하지만 예술이나 체육분야에서의 특출 난 사람들의 다양한 활동도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내니까.


나는 비보이 월드 챔피언쉽 우승자의 자격으로 영주권을 취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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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호주에 8년을 살면서 이 탤런트 비자로 이민을 온 사람을 세 번째 만나 봐. 한 명은 하키를 하는 친구였고 두 번째는 내 10번째 인터뷰 상대였떤 라테아트 월드 챔피언 케일럽, 세 번째가 너야. 비보이 월드 챔피언. 한 분야에서 얼마나 특출 나게 잘하면 이렇게 까다로운 호주 이민성에서 영주권까지 주면서 모셔가려고 하는 걸까, 진짜 대단한 거 같아. 21년 경력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 동안 춤을 춰왔는데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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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시작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어. 친구들이랑 모여서 케이팝 댄스를 연습하고 그랬지. 그러다가 6학년 때 부산에서 하는 비보잉 공연을 보러 간 거야. 무대 근처에 있는 문을 촥 열고 들어갔는데 때마침 무대에서 비보이들이 백덤블링을 하고 있더라고. 정말 넋을 잃었어. 그 모든 게 진짜 슬로 모션처럼 보이는 거야. 홀린 듯이 그들의 공연을 보고 나서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어. 저거를 하고 싶다. 그 생각만 들었어. 꿈이 생긴 거야.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에 용두산 공원에서 춤을 추던 비보이 형들을 찾아갔어. 가르쳐달라고, 배우고 싶다고 하는 당돌한 초등학생을 형들은 내치지 않고 받아들여줬지. 형들에게 동작들을 배우고 연습하고. 또 부산에서 잘한다는 사람들을 만나서 또 배우고 팀을 만들어서 활동을 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어. 보통 비보이들은 어릴 때에는 활동을 하다가 고등학교나 대학입시, 혹은 군대 등의 굵직한 일들을 계기로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중간에 부상으로 인한 재활 1년 정도를 빼고는 30대 중반이 되는 지금까지 춤을 쉬어본 적이 없어. 13살 때 처음 비보잉을 시작한 이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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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어릴 때는 비보잉을 하는 친구들이 주위에 꽤 있었어. 네 말대로 입시나 취업, 군입대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활동을 접었고 지금은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다른 일들을 하고 있더라. 직업으로 비보이를 하는 사람은 사실 처음 만나보는 것 같아. 그래서 익숙하지가 않아서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비보이라는 직업은 어떤 거야? 어떤 식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활동을 하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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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비보이라고 하면 그냥 한 때의 열정이나 취미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진지한 어떤 '직업군'이라는 인식이 사실 없지. 나도 사실 이거를 내 직업으로 해야겠다, 밥벌이를 하는 어떤 커리어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하고 계속한 거는 아니고 그냥 너무 좋다 보니까 멈출 수가 없었고 놓을 수가 없어서 그냥 쭉 이 길을 걸은 거였어. 비보이가 어떤 직업인지 전망이랄까 구조에 대해서 미리 알아보거나 생각해보고 시작한 건 아니고. 나처럼 직업으로 비보이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일단 정기적이거나 비정기적인 공연으로 돈을 벌어. 가장 널리 알려진 게 뮤지컬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같은 거야. 그리고 여러 브랜드에서 하는 국내, 혹은 국제 대회에서 성적을 내면 상금을 받지. 레드불 같은 회사에서는 국제적으로 큰 대회를 매년 열거든. 한국에는 이 비보이 시장이 커서 공연도 많고 대학교수하는 사람도 있고 스튜디오에서 티칭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안무가도 있고 그래. 생각보다 길이 많아. 세상이 많이 변해서 많은 비보이들이 생각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이익을 창출하고 커리어를 쌓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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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나는 고등학교를 대학로 근처에서 다녔거든. 마로니에 공원에서 비보잉을 하는 친구들이 꽤 많았어. 말했듯이 지금은 다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하면 그런 이야기를 해. 정말 좋아하는 일에 몰두해서 미친 듯이 연습하던 그 시절이 그립다고. 그때는 가장 힘들었던 게 주변 사람들의 편견과 맞서는 거였더라고 하더라. '공부는 안 하고 몰려다니면서 춤이나 추는 불량아'들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고 지나가던 아줌마 아저씨들이 너희들 이러는 거 너네 부모님들은 아시냐며 호통을 치시기도 하고 했다며. 어차피 삐뚤어진 시선으로 보니까 더 비뚤어지고 싶었다고 그때를 회상하는 친구도 있었어. 청기 너도 아주 어릴 때부터 춤을 추면서 이런 일을 피해갈 수는 없었을 거 같은데, 너는 어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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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나는 사실 굉장히 단순해서 뭐 하나에 꽂히면 주변을 잘 안 둘러보는 성격이야.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는데 그런 성격이 많이 도움이 되었지. 하지만 우리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고 생각 없는 딴따라, 불량학생, 공부 못하는 날라리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억울한 마음은 늘 있었어. 춤추는 친구들 중에서는 공부도 잘하고 소위 말하는 엘리트들도 많거든. 일단 처음에는 겉멋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도 제대로 하려면 성실함과 건강함이 무조건 기본적으로 받쳐줘야 해. 춤추는 친구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순수한 애들이 많아. 체력이 조금만 떨어져도 퍼포먼스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술 담배조차 안 하는 경우도 많고 하루에 8시간 10시간씩 춤을 추면 잡생각을 하지도 못해. 비보잉을 제대로 하는 친구들은 나쁜 짓을 할 시간도 체력도 사실 없거든. 나도 춤추는데 너무 정신 팔리고 바빠서 그런 편견에 대해 깊게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어. 하지만 세상의 인식은 완전히 반대지.

그래도 요새는 많이 좋아지고 있어. 엠넷에서 한 '댄싱나인'이라는 댄싱 서바이벌 프로그램 혹시 본 적 있어?

 '쇼미 더 머니'가 '랩'이라는 문화를 대중들에게 더욱 친숙하게 다가가게 만든 것과 같은 역할을 했어. 비보잉이라는 것이 특별하고 어려운 게가 아니고 대중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라는 것을 소개한 거지.  내가 공연을 했던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처럼 대중에게 널리, 그리고 오래 사랑받는 스테디셀러 공연들이 나오는 것도 비보이들을 바라보는 인식을 바꿔주는 아주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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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그래, 미디어의 힘이라는 게 대단하지? 내가 요리를 처음 시작했던 9년 전만 해도 요리는 공부 못하는 얘들이 배우는 기술이라는 인식이 아직 한국 사회에 남아 있었어. 하지만 파스타 등의 드라마나 마스터 쉐프, 냉장고를 부탁해 같은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오고 스타 셰프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지금은 정말 많이 변한 거 같더라. 급격히 변하는 사회에서 선배들에게 배운 좋은 것들을 후배들에게 잘 전달하고 그들은 우리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꿈을 펼치게 하는 게 우리 세대의 역할이겠지.

비보이와 요리사라는 직업들이 동떨어진 것 같아도 비슷한 점이 꽤 많은 것 같아.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면 요리라는 것도 (특히 여자 요리사들 같은 경우)는 직업 전환율이 굉장히 높아. 평생직장이라는 안정성이 사무직에 비하면 떨어지는 면이 있거든.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받쳐줘야 하다 보니 출산 후에는 그만둬야 하고, 수명이 긴 직업은 아니잖아. 비보잉도 그런 면에서 불안함이 있지는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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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당연히 그랬지. 함께 춤을 추고 미래를 그리던 형들이 한 두 명씩 무대를 떠나는 걸 보면서 그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어. 군대를 기점으로 다른 일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업계에도 비보이는 군대 다녀오면 수명 끝난다, 서른까지가 한계다 라는 말이 아주 흔하게 오고 가니까.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해.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되더라고. 군대 다녀오면 못한다, 서른 넘으면 못한다고 본인이 틀을 씌워버리면 정말 그렇게 되는걸 많이 지켜보았어. 나는 올해 34살인데 어릴 때 하던 동작 중에 지금 못하는 동작이 없어. 변한 게 거의 없거든. 우리도 어렸을 때는 그런 이야기를 자꾸 듣고 당연히 사람 몸이 나이가 들면 녹슨 다고 생각했고 그걸 봐왔는데 그게 아닌 거야. 그런 걸 스스로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이 있거든. 나보다 더 나이 많은 형들도 현역으로 멋있게 일하고 있고.

당연히 유지하기는 힘들어.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나는 안된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나는 오십이 돼도 육십이 되어도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믿음이 있어.


***청기의 보충설명 : 나이로 인한 한계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활동을 한참 할 10-20년 전쯤을 기준으로 한 이야기야. 요즘은 천천히 틀이 무너지고 더 좋은 쪽으로 변화하고 있어. 많은 분야가 그렇듯이! 예를 들면 요새는 공군 비보이단도 있는걸! 조금은 더딘 것 같지만 환경은 점점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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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한국에서는 나이 때문에 하고 싶은걸 접는 경우가 많아. 내 주변에 글을 쓰거나 음악을 하던 친구들 중에서도 그 일이 너무 좋은데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결국에는 꺾게 되는 친구들을 많이 보았어. 본인의 의지는 확고하더라도 자꾸 밑에서는 더 젊고 패기 넘치는 후배들은 치고 올라오고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서 주변에서는 걱정을 한답시고 '너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늙어서 고생하려고 그래?'하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니까 본인의 생각을 관철시키기가 쉽지가 않은 면이 있지.

춤을 계속 추고 싶은데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나이에 대한 편견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너는 무슨 이야기를 해주고 싶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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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초반에 네가 나한테 이 인터뷰로 어떠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냐 물었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어. 내가 어떤 조언을 할 입장도 아니고  무책임하고 공허한 희망적인 메시지는 전달 안 하니만 못하다고 생각했거든. 그래도 조심스럽게 내 생각을 말한다면, 그냥 하고 싶다면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 쉽지 않다는 것은 알아. 나도 정말 수도 없이 흔들렸으니까.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하든 간에, 세상이 뭐라고 하든 간에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 일단은 행복하잖아. 나는 그게 인생에서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이거 저거 다 신경 쓰고 생각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자신의 행복에서 멀어질 수가 있어. 꼭 그 일에만 매진하지 않아도 돼. 우리 세대라는 게 예전과는 달리 직업 하나, 기술 하나 가지고 평생 먹고살지 못하잖아. 직업의 수명이라는 건 계속 짧아지고 있고. 그러니까 너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면 용기를 내서 도전해보고 재밌어 보이는 일이 있다면 해보고 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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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지금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너도 분명히 흔들리고 불안했던 적도 있었겠지. 넌 어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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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당연히 그렇지. 아무리 모든 것을 걸만큼 춤을 좋아해도 절대 안 흔들린다는 건 불가능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것 같아. 내가 스스로 그런 생각을 했다기보다는 주위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 친구들, 부모님들은 내가 어느 정도 하다가 그만둘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니까 계속 붙잡고 이야기를 하는 거야. 너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는 둥. 나는 고등학교를 미용 고등학교를 나왔거든. 그러다 보니 친구들의 사회 진출이 빨랐어. 친구들은 디자이너로 승승장구하고 본인의 이름을 내건 샵을 내기도 하고 차를 사고하는 걸 볼 때마다 나도 고민이 되는 거지. 그런데 나도 모르겠어. 그냥 너무 좋아서 이걸 놓지를 못했어.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가 할 줄 아는 게 춤 밖에 없다 보니까 다른 걸 도전할 엄두를 못 내는 마음도 있었어. 그리고 춤으로 아예 돈을 못 버는 건 아니기 때문에 놓기도 애매하달까 그랬지. 그런데 이 일이라는 게 돈은 벌지만 안정적이지 못하고 들쭉날쭉해. 위험한 직업이라고 해서 보험도 못 들고.


그렇게 늘 고민을 하다가 한번 정점을 찍었는데 그때가 내가 26살 때였어. 그때가 내가 살아온 인생의 딱 반을 춤을 춘 연도였거든. 13살 때부터 시작해서 13년 동안 춤을 췄으니까. 그때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엄청난 혼란이 왔었어. 내가 여태까지 뭐했지? 잘한 건가?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때 나는 비보이로서 명성도 가지고 있었고 원하던 꿈은 이룬 상태였는데 '경제적인 부분'이 쏙 빠진 거야. 다른 분야는 13년을 한우물을 파면 어느 정도의 안정이 따라오는데 비보잉은 그게 없잖아. 13년 경력인 내 통장을 딱 들여다보는데 이건 빚만 없을 뿐 뭐... 이건 아니다 싶었어. 내 인생의 반을 나는 뜬구름만 쫒았나 싶고. 그래서 고향에 내려가려고 했지. 어머니 가게일을 도울까, 미용을 다시 시작해볼까. 26살이라는 나이가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에는 늦은 나이가 아니잖아. 그렇다고 시간을 더 버릴 여유가 있는 나이도 아니고.


그렇게 나름대로 깊은 고민에 빠져서 비보잉을 그만두려고 생각하고 있던 중 친구와 맥주를 한잔 하게 됐어. 그런데 친구가 엄청나게 뭐라고 하는 거야. 그 친구는 어릴 때부터 축구선수였는데 골키퍼로 잘 나가던 중 부상을 당해서 축구를 그만둬야만 했던 놈이었어. 그 친구가 얼마나 나를 보면서 부러워하고 있는지, 저 힘들어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나를 보면서 얼마나 힘을 얻고 있는지 알고 있냐며 속마음을 털어놓는 거야. 여태까지 한 고생이 아깝지도 않냐고 그만두지 말라며 설득하는 친구를 보면서 정말 오만 감정이 다 들더라.

그래, 아무리 힘들어도 좋아하는 일, 내 꿈이니까 포기하지 말자고 결론을 내게 된 계기가 되었지.

그래서 그때부터 더 열심히 했어. 연습도 정말 진짜 열심히 했어.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정말 모든 것을 걸고  춤을 췄지. 그전에는 팀의 일원으로 으쌰 으쌰 하면서 대회에 나가고 성과를 내고 했는데 그때부터는 혼자 김청기라는 개인으로 좋은 성적을 많이 거뒀고 그 전보다 더 활발하게 활동을 하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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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네이버에서 네 이름 김청기를 검색해보니 그때 얼마나 활발하게 심사를 하고 공연을 하면서 활동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거 같아. 그때 포기 못하게 말린 친구한테는 평생 잘해야겠네. ㅋㅋ

그런데 연도를 따져보니 한참 잘 나갈 때 호주행을 선택했는데, 어쩌다가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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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6년 전쯤 한국에서 큰 대회에 출전을 했어. 5대 비보이 대회 중 하나의 월드 파이널 경기였거든. 그 날 대회 오프닝 때 내가 나의 주특기였던 텀블링을 하다가 착지를 했는데 엄청난 통증이 느껴지는 거야. 아킬레스 건이 끊어진 거지.

응급실로 실려가서 바로 수술을 했어. 수술은 잘 되었지만 부상은 심각했지. 주변에서도 정말 말이 많았어. 김청기 비보이 생명은 끝났다고 다들 걱정했어. 그야말로 아킬레스건이 끊어졌으니까.

나도 정말 세상이 끝난 것처럼 힘들었어. 내가 배웠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건 오로지 춤뿐인데 그걸 못하게 되었으니 심정이 어땠겠어. 거기에다가 현실적인 문제들도 생각해야 하니까 정말 돌아버리겠는 거야. 비보이라는 직업 특성상 나는 보험도 없었고 모아놓은 돈도 없고 정말 막막한 거야.

그때 아까 내가 말했던 축구선수였던 친구가 또다시 도움을 줬어. 그 친구의 소개로 친해지게 된 이근호 선수가 재활병원을 연결해준 거야.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어떻게 부상을 당하게 되었는지를 쭉 들으신 원장님께서 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불쑥 말씀하시더라고.


그럼 돈 없겠네?


나도 대답했지. 네 돈 없지요.


원장님이 말씀하시더라. 그래? 그라면 그냥 공짜로 다녀라. 회복할 때까지.


그래서 팔 개월 동안 병원에 열심히 출퇴근하면서 재활을 미친 듯이 했어. 다시 춤추기 위해서. 그때 당시 여자 친구가 고민 끝에 회사를 퇴직하고 진로를 고민을 하던 중이었거든. 어느 날은 그러더라고. 오빠 어차피 일 년 동안은 춤을 못 추니까 이김에 다른 거 해보면 어떨까, 호주에 가지 않을래 라고.

그때 어차피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을 못하게 됐으니 한국에서는 딱히 할 일도 없었고 대회 일정이 아니고서는 해외에서 길게 체류해본 적도 없었으니 이김에 평소에 하고 싶었던 영어라도 해볼까 생각하게 되었어. 재활이 끝나고 비보잉은 아직 못하지만 일상생활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여자 친구와 함께 호주로 떠나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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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개인적으로 8년이라는 세월을 천문학적인 시간과 돈을 이 '이민'이라는 실체도 없는 개념에 쏟아부었던 사람으로서 사실은 네가 질투가 나는 것은 사실이야. 인생을 걸 수 있는 꿈을 찾은 데다가 그걸 지켜낼 용기까지 있는 데다가 네가 좋아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 그걸로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영주권까지 땄잖아. 내가 여태껏 만난 사람 중 너만큼 나를 부럽게 하는 사람이 없는 거 알아? 속이 좁고 못된 나는 솔직히 말하면 네가 너무 부러운 나머지 조금 얄미운 생각도 들어. 나 같은 사람들에게서 이런 말을 -  영주권을 쉽게 땄네, 좋겠다, 부럽다, 등등 - 자주 듣지 않아? 그럴 때는 어떤 생각이 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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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 솔직히 말하면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 건 사실이야. 남들 입장에서는 과정을 모르니까 영주권을 굉장히 쉽게 땄다고 할 수 있거든. 그럴 때마다 웃어넘기지만 가끔 서운한 마음도 들어. 왜냐하면 이민의 절차 자체가 비교적 쉽고 단순했을 뿐, 내가 춤으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그 21년이라는 시간 자체는 결코 쉽고 단순하지만은 않았거든.  철옹성같이 단단한 세상의 편견, 신체적인 부상과 스스로의 불확신,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 등과 싸우며 20년이 넘는 시간을 매일 같이 연습했는데.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쌓아왔는데 '영주권과 등가교환'이라는 식으로 너무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난 춤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부귀영화를 누리고 정상에 서겠다는 마음은 아니었거든. 그저 너무 멋있었고 춤을 출 때 행복하다는 이유로 시작을 했고 단순히 너무 좋기 때문에 그만두지 못했어. 나중에 이걸로 이민을 해야지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

영주권이 승인이 나던 날, 나는 정말 엄청나게 많이 울었어. 정말 펑펑, 정말 많이 울었어.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 얼마나 더 할 수 있을 거 같아? 이제 정신 차릴 때 되지 않았어?'  묻는 사람들과 내 내면의 목소리들을 들으며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수없이 흔들렸고 이 꿈을 놓으려고 했던 적도 많았어. 늘 불규칙한 수입과 불투명한 미래. 사랑하는 여자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약속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언제까지 내 꿈만 내세울 건지. 너무 이기적인 것은 아닐까 내가 이 길을 계속 걸어가도 되는 걸까 늘 고민하고 괴로워했거든.

그런데 그걸 알아준 것만 같았어. 이 영주권이라는 것이. 그 마음고생들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춤을 춰줘서 잘했다, 고생했다,라고 누군가 말해주는 듯한 기분이었어.  '쓸데없는 딴따라 짓'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나의 이 일을 이 호주라는 사회에서는 아주 가치 있는 재능이라고 인정해주며 이리 오라고 손짓하고 환영해주는구나, 내가 여태까지 쓸데없는 짓으로 시간 낭비한 게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에 눈물이 펑펑 나더라.

그 날을 생각하니까 지금도 눈물이 나려고 하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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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우리 이제 너의 새로운 직업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나는 사실 비보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처음 만나봤지만 바버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처음 만나보거든. 일단 가장 궁금한 게 아까 말했지만 바버는 남성 전용 헤어컷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했잖아. 헤어 디자이너와는 어떻게 틀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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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바버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남성 전용 이발사 같은 거야. 한국에도 보면 여성은 미용실, 남성은 이발소를 다녔잖아? 어렸을 때 아빠 손 잡고 목욕탕 들렸다가 머리 자르러 가고 했던 것처럼 서양에도 그런 문화가 있는 거지. 호주에는 그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오래된 바버샵들이 많고 요새는 젊은 층들이 힙한 문화의 한 갈래로 만들고 있어. 그루밍에 관심이 많은 남자들이 스타일을 내고 맥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하는.

호주뿐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요새는 이런 바버샵이 유행하고 있어.

나는 그런 바버샵 중 한 곳에서 컷과 스타일링을 하는 미용사로 일을 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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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평생 해온 비보잉과 전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 일을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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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앞서 말했듯이 나는 고등학교를 미용 고등학교를 나왔어. 그때도 나의 온 신경은 비보잉에만 꽂혀있었기 때문에 미용을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미용이라는 직업이 친숙해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

호주에서 비보잉 활동을 하고 지내던 어느 날 무심코 유튜브를 보다가 바버링 동영상을 보게 되었어. 그런데 그게 너무 멋있는 거야. 내가 알던 미용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더라. 아무튼 너무 멋있으니까 따라 해보고 싶었지. 영상에 나오는 도구를 찾아서 무작정 구입 먼저 했어. 그리고는 영상들을 계속 보고 메모를 하며 공부를 하고 발코니에 의자 하나 가져다 놓고 친구들을 불러서 연습을 했지. 호주에서는 머리 자르는 비용이 비싸니까 공짜로 잘라준다니까 많이들 오더라. 실수도 엄청 하면서 신나게 연습을 했지. 점차 실력이 나아지고 친구들이 칭찬을 하기 시작했어. 고맙다고 커피도 사주고 수고비를 챙겨주는 친구들도 생기니까 용기가 나더라. 혼자 연습해서는 안 되겠다 하고 배울만한 곳을 찾았어. 친구의 삼촌이 아주 먼 곳에서 작은 바버샵을 운영하셔서 세 시간씩 왔다 갔다 하며 알바를 했고 한국 미용실에서 스텝으로도 일하며 미용의 기초를 다시 쌓았어.




바버링도 춤을 처음 배울 때만큼 좋았어. 너무 재미있다 보니까 배우는데 정신이 없었지. 그렇게 일 년 정도 지나서 정식으로 바버샵에 취직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그 경력을 바탕으로 멜버른에서 가장 유명하고 큰 바버샵으로 이직을 해서 첫 출근을 앞두고 있는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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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춤은 첫눈에 반했던 거고 바버링도 비슷한 거 같구나. 영상에 꽂혔던 것이 제2의 직업으로 이어지다니.

뭐에 꽂히면 너는 정말 끝을 보는구나 ㅋㅋ 단순한 거 같으면서도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져.

지금 하는 바버링은 뭐가 그렇게 좋아? 어떤 점이 매력이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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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춤도 바버링도 비슷해. 밥벌이나 뭐 그런 걸 생각했던 건 아니고 멋있으니까 좋아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까 재미있고 그러니까 잘하게 되고 그게 어떠한 가치로 이어지게 된 거 같아. 돈벌이나 그런 걸 떠나서 말이야. 춤을 출 때도 나는 내가 좋으니까 나 좋으라고 춤을 추는데, 가끔은 그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어.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공연을 할 때 한 관객한테서 편지를 받은 적이 있어. 어떤 여성분이었는데 요 근래에 회사를 그만두고 힘든 일이 겹치는 바람에 몸도 안 좋고 굉장히 우울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던 중 우연히 이 공연을 보게 되었고 나의 춤을 보고 힘과 용기를 얻게 되었다는 내용이었거든. 그때부터는 아, 이 일이 내가 좋아서 하는 거기는 하지만 타인에게도 영향이 가는 일이구나 싶었어. 그때부터는 공연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지더라. 이런 점은 바버링도 마찬가지야. 이게 사람을 더 깔끔하고 멋있게 만드는 일이다 보니까 내가 컷이 끝났을 때 사람들이 거울을 보면서 입꼬리가 자기도 모르게 스윽 올라가며 미소를 지을 때가 많거든. 내가 좋아서 하는 바버링이지만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거잖아. 그럴 때는 정말 이 일이 좋아져. 이 일을 시작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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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비보이, 바버링 이후에 또 꽂힌 건 없어? 요새는 뭐에 관심이 생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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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음.. 요새는 의자가 좋아. 목공까지는 아니고 예쁜 의자를 만들어 보고 싶어. 나무 같은 거로.

(왜?)  그냥, 의자가 좋아. 이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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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참 단순하고 명쾌해서 좋다. 사실 좋은 데는 이유가 없는 거지, 좋은데 자꾸 이유를 찾으려고 하니까 그 좋다는 본질에서 계속 멀어지게 되어있는 거 같아. 잊고 있었는데 청기 너를 보며 다시 떠올리게 돼. 정말 고마워.

그럼 이제 주제를 바꿔서 네가 생각하는 호주 이민생활의 좋은 점. 이민을 와서 좋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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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나 같은 경우는 대단한 일 없이 그냥 일상에서 느껴. 하늘을 볼 때나 뭐 길을 걸을 때, 공원에 누워있을 때 그런 생각을 자주 해.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느끼는 소중한 행복들이 한국에 비해서 많다기보다는 같은 양이라고 해도 그걸 느낄 시간이나 여유가 더 있다는 것이 좋은 거지. 그리고 하고 싶은 걸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걸 느낄 때가 좋지. 일단은 나이에 상관없이 직업의 전환이 쉽고 다양한 시도를 해보기 좋다는 점이 나는 좋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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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두 가지의 사랑하는 직업을 가진 남자 청기야. 너는 너의 직업들로 이루고 싶은 게 뭐야? 어떤 비보이, 어떤 바버가 되고 싶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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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일단은 비보이로 내가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 그냥 처음부터 내가 좋으니까 하는 거야. 내가 좋으니까 끝까지 하겠다는 마음인 거지. 그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더 열심히 할 거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비보잉은 나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서 한다는 마음이 가장 커.

바버 같은 경우에는 좋으니까 한다는 기본적인 건 변함이 없지만 다른 욕심도 있어. 나중에는 나의 바버샵을 하나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해. 지금 한국에서 유행하고 호주 젊은 층에서 유행하는 비싸고 화려한 바버샵이 아니고 편안한 이발소 같은 곳을 호주에 내는 거야. 멜버른에서 가장 힙하고 화려한 곳에서 일은 하고 있지만 내가 결국에 하고 싶은 것은 화려한 거품을 뺀 편안한 곳이야. 아빠가 아들 손잡고 머리 깎으러 가자 하고 와서 일이만 원 주고 깔끔하게 머리 자르고 담소 나누다 살 수 있는 곳. 안 멋있는 사람은 못 오고 돈 없는 사람은 못 오고 유행 떨어지면 못 오고 나이 많으면 못 오는 곳은 싫어. 적당한 가격에 누구나 편하게 와서 어떻게 지냈어~ 하고 안부도 묻고 기분 좋게 예쁘게 머리를 정돈할 수 있는 그런 본질에 충실한 곳이면 좋겠어.


어떤 비보이, 어떤 바버가 되고 싶냐고? (한참 생각한다.)

나는 그런 거 없는데.

음, 행복한 비보이!  행복한 바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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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청기 너처럼 꿈이 있는데 이 일을 접어야 할까 말아햐 할까 고민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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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사실 이거를 선배랍시고 무책임하게 해라, 하지 마라 할 수 없는 일이야. 개개인마다 사정이 틀리고 입장이 있잖아. 너무 어렵고 예민한 문제라 조언을 하기가 조심스러워.

하지만 한 가지 말한다면 무언가를 했을 때 이게 잘됐다 잘 안됬다는 것은 남들이 정의하면 안 되는 것 같아. 춤을 추다가 남들이 봤을 때는 잘 안 풀렸다고 할 수 있는데 본인은 너무 행복할 수도 있거든. 그건 남들이 정의할 수없고 정의하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이걸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릴 때는 그래도 시간을 쪼개서 다른 일과 병행해야 할지라도 하는 게 낫다고, 해야지만 나중에 후회가 없다고 생각해. 이게 정말 좋고 너무 행복하다면 해야 해. 그냥 해야 해. 계속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해야만 살아가는 의미가 생기는 거 같아. 뻔한 이야기지만 해도 후회할 거 같고 안 해도 후회할 거 같으면 하고 후회하는 게 나으니까 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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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인터뷰, 너무 고마워. 이번 인터뷰는 읽어주는 독자들보다 나한테 더 필요했던 이야기 같아. 가장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본질을 군더더기들 때문에 못 보는 일이 허다한 나에게 큰 자극을 줬어. 대단한 비보이라서, 힙한 바버라서 청기 네가 멋있는 게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걸 따르기 때문에 특별하고 멋있다고 생각해.  어쩌면 감추고 싶을 수도 있었을 이야기들, 화려함 뒤에 힘들었던 이야기들까지 솔직히 이야기해줘서 정말 고마워. 진짜 잘 들었어. 앞으로 어떤 모습이던지 - 춤을 추는, 머리를 자르는, 혹은 예쁜 나무의자를 만드는 - 행복한 너의 모습 또 볼 수 있기를 기대할게.


자,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소감이랄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들을 하면서 마무리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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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앨리스 네가 인터뷰를 제안했을 때 사실은 많이 망설였었어. 무대에 서고 많은 대중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일들이 일상이었는데 어느 순간 매너리즘이 왔는지 요새는 다른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거나 내 모습을 많이 드러내는 게 어쩐지 점점 어려워지는 기분이었거든. 그런데 네가 말했듯이 나의 작은 이야기로 누군가는 힘을 얻을 수도 있고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면 이 또한 의미 있는 일이 될 거 같아. 많이 망설였고 인터뷰를 하면서도 이렇게 나서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인지 고민을 했지만 이렇게 정리된 우리의 이야기를 보니 기분이 좋아. 이거 역시 그냥 이유 없이 좋아.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 인터뷰를 하면서 여태껏 있었던 일들을 돌아보며 많이 즐거웠어.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더 잘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주고, 나라는 사람을 인정해준 호주 사회에 감사하며 앞으로 더 열심히 좋아하는 거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내 이야기  길었을 텐데 잘 들어줘서 고마워.

나도 정말 즐겁고 반가웠어.












놀러와! :-)


청기 (개인 인스타)   :  BLUE_CHUNGKIKIM

앨리스 (개인 인스타) :  ALICEINMELBOURNE  (앨리스 팀 첫 번째 레스토랑)

SUDA (공식 인스타) :  SUDAMELBOURNE  (앨리스 팀 첫 번째 레스토랑)

NEMO (공식 인스타): NEMOMELBOURNE (앨리스 팀 두 번째 레스토랑)




*답글은 원래 하던 대로 반말로 주고받으면 더 좋을 거 같아!! 나도 그게 편하고, 언니 거나 오빠 거나 친구 거나 동생일 너도 그게 편할 거야, 하다 보면!! 물론 존대가 편하면 그렇게 소통해도 좋아 :-)


**호주 이민 생활 중이거나, 호주에서 이민 과정을 밟고 있는 동료들 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이민을 생각하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조언들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부담 없이 댓글이나 인스타 디렉트 메시지를 줘! 꼭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일 필요도 없어. 지금 이민의 과정을 밟으면서 느끼는 고충과 어려움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민에 대한 좋은 점과 후회되는 점도 가감 없이 나누고 싶은 동료들의 참여 기다릴게!


***출처를 밝힌 공유는 언제나 환영이야!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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