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멜버른앨리스 Feb 22. 2018

흔들림 없이 요리로 유학하고 이민하기 by 민아

요리 외길 인생으로 사는 어떤 여자 이야기






본인한테는 관대하고 남한테는 엄격하기.

그러기는 참 쉽잖아. 사람의 본성이라는 게 그래. 같은 현상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서 틀려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 누군가의 일이냐에 따라서 천인공노할 범죄도 그럴 수도 있는 일 되기도 하고 엄청 대단한 사건도 별거 아닌 일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


내가 생판 모르는 남이 이룬 업적이라면 우러러보고 존경했을 거라고 해도 그게 바로 내 옆의 사람이 이뤄낸 거라고 생각하면 별거 아니게 느껴질 때도 많아.  멀리 있는 사람이 대단해 보이기는 쉬워도 바로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이, 그렇게 멋있게 많은 일들을 해내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기는 쉽지가 않은 것 같아. 가까이서 보면 단편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 같더라.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알고 보면 이런 사람이야? 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은 그래서 경이로워. 


나에게는 민아가 그래.

호주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한 명, 내가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인 민아가 내 옆에 (물리적으로는 지구 반대편인 한국에 있지만) 있는데도 나는 계속 멀리 헤매어서 돌아다녔어. 여성인 셰프로서 유리천장을 깨고 무소의 뿔처럼 걸어서 본인이 원하는 것을 쟁취한 사람을 찾아서.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 차려보니 내 옆에 민아가 있더라.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지독한 원시 시력을 가진 -가까운 것을 잘 보지 못하는 편협한 - 사람인 나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어. 그저 나이답지 않게 언제나 진지하고 특이해서 내가 늘 놀리기만 하는 나의 친한 동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민아와 나는 친해지기 어려운 성질의 사람들이었어. 

너무 비슷해서 서로가 껄끄러운 느낌이 드는 사람들 있잖아. 그녀와 나를 만나고 있던 남자 친구들이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아 둘이 참 잘 맞을 수도, 아니면 진짜 싫어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너무 비슷해서.라고 이야기를 할 정도였으니까. 둘을 만나게 해줄까, 그러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길까 가 그들 사이에서 이슈였던 적도 있었어.


나도 민아라는 친구가 있고 이런저런 사람이라는 이야기들 들으면서도 그 친구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해. 굳이 내 인생에 나만큼 까칠하고 독하고 부정적인 사람을 또 한 명 끼워 넣을 필요가 있을까,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거든. 6년 전의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짐들이 이미 너무 무겁고 불필요한 관계들이 나를 얽매고 있다는 생각에 갑갑했기 때문에 전혀, 나와 비슷해서 친하게 지낼 수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그 친구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 같아.


우연히 그녀를 처음 만난 날. 

그녀는 듣던 대로 까칠했고 하고 싶은 말을 참지 못했으며 인간관계의 처신이라는 것을 하려고는 하지만 어색해 보였어. 나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네가 나랑 친해지고 싶으면 뭐 그냥 받아주겠지만 내가 노력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라는 뜻을 서로에게 강력히 피력했겠지.


하지만 우리는 강제로 친해지는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어. 억지로 4일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내야 했거든.

내가 민아를 처음 만난 날, 거짓말처럼 민아가 살고 있던 아파트에 화재가 난 거야. 작은 불이 아니고 아파트의 4개의 층이 모두 출입금지가 될 만큼 큰 사건이었어. 갑자기 이 먼 타지에서 오갈 데 없어지고 갈아입을 옷 하나 건지지 못한 민아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어. 이 고리타분하고 우직한 자식 같으니라고. 이 정도면 주위에 도움을 요청할 법도 한데 이 아이는 왜 이러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


우리 집으로 가자.


별다른 옵션이 없던 민아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거야. 

발 디딜 틈도 없는 작은 원룸에서, 이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될 때까지 우리는 밥을 해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지냈고 사교성이라고는 1도 없는 민아와 나는 강제로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어. 그 후로 우리는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었지. 그리고 6년이 지났어.


민아는 두고두고 그 일을 갚으려고 했어. 

내 가게를 처음 오픈했을 때, 꽃이나 사가지고 와서 축하나 해주면 될 것을 그녀는 앞치마를 두르고 함께 주방에서 땀을 흘렸고 그 후로 나에게 큰일 작은 일이 닥칠 때마다 자기 일처럼 소매를 걷고 달려들었어. 내가 베푼 그 내 작은 호의가 무안할 정도로 그녀는 나에게 6년을 변함없이 헌신적이었고 나는 어느 순간 그걸 당연하게 여긴지도 몰라.






여성 셰프. 


여성으로서 셰프로서 살아가는 일

그것도 태어난 조국이 아닌 타지에서


제대로 부딪혀보며 가장 현실적으로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알지 못한 어리석은 내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민아와의 인터뷰는 깊고 처절했고 진실되었어. 세상을 궁금해하기 전에 내 옆에 있는 우주 같은 사람들부터 아는 게 먼저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늘은 민아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17살 때, 아니 그 훨씬 전부터 요리사가 되려고 했던 아이.

가정 주방에서는 여자가 어울린다고 하면서도 올라가면 갈수록 남초 사회인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이 필드에서 꿋꿋이 살아남고 있는 여성 셰프.

호주와 한국, 동떨어진 두 나라에서 본인이 이루고자 하는 것들을 청사진처럼 펼쳐, 무슨 계획표를 짠 것 마냥 착착 이뤄내고 있는 - 그걸 지켜 보는 것만으로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나의 동료, 친구인 민아가 내가 너에게 소개할 9번째 호주 청년 이민자야.


나만 알고 있기는 아까운 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이제라도 제대로 바라보고 너에게 들려줄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생각해. 


요리를 생각하는, 요리로 이민을 생각하는, 요리를 하고 있는.

민아의 이야기.

내가 너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해볼게. 


재미나게 읽어줬으면 좋겠어!







-

A (ALICE) : 안녕, 민아! 

일단 네 소개부터 시작하자. 

-

M (MINA) : 안녕!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민아야. 나는 올해 서른하고 +1이 된 여자이고 직업은 셰프야. 경력은 호텔조리고등학교 시절부터 치면 14년 정도 됐겠다. 



-

A : 나이가 많지 않은데 경력이 후덜덜하다. 17살 때부터 외길 요리인생이라니!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있어?

-

M : 나는 지금 한국의 한 대기업 R&D(제품 연구개발) 팀에서 신메뉴 개발 및 교육을 담당하고 있어. 직책은 대리야. 우리 회사 제품의 영양과 맛을 테스트하는 일과 트렌드에 맞는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는 일이 주 업무야. 지역 아동 어린이들이 편식을 개선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에도 참여하고 있어.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해외 바이어들에게 회사 제품을 영어로 소개하는 업무도 진행하고 있어.





-

A : 아주 처음부터 이야기해보자. 요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어?

-

M : 아주 처음부터 이야기를 해보자면 시작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아.

스스로 계란 프라이를 해볼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부터였지. 맞벌이를 하신 부모님으로 인해 내가 집에서 동생을 돌보는 시간이 많았고, 끼니를 챙기는 일도 나의 몫이었어. 어느 날 문득 간장 계란밥이 너무 먹고 싶었는데 해줄 사람이 없는 거야. 그때 겁도 없이 가스불을 켜고 계란을 깨서 프라이를 만들었지. 처음 이루는 성취감같은게 느껴졌어. 골목 친구들이랑 놀다가 배가 고팠지만 우리 집으로 우르르 몰려와서 꼬물꼬물 내 손으로 만든 파전 같은 것들을 먹고 가곤 했거든. 맛있다기보다는 배가 고파서였겠지만 친구들이 행복하게 먹어주는 그 모습들이 정말 좋았어. 돌이켜보면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그때만 해도 셰프라는 직업이 지금처럼 '핫'하지가 않았어. 중학교 때 진로상담을 하는데 거의 대부분이 변호사나 선생님, 경찰, 의사, PD 등의 직업을 희망하였고 나만 혼자 호텔 조리사가 꿈이라고 말했지. 담임 선생님은 내 꿈을 대수롭지 않게 보시며 "잘해봐"라고 한마디. 아주 짧게 진로상담을 마치셨던 기억이 나.

자연스럽게 나는 조리학과가 있는 특성화 고등학교를 지원했어. 그때만 해도 고등학교에 조리학과가 막 신설되는 시기라 체계가 지금처럼 전문적이지 않았고, 공부 못하는 애들이나 가는 곳이라는 편견을 받기도 할 때였어. 그때 당시 조리과를 지원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의 반응이 아직도 생각이나. 교직에 계신 삼촌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게 설득시켜달라고 부탁하셨어. 불안하셨겠지.

하지만 나는 요리를 제대로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설레기만 했었어. 이왕 이 길로 가는 거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중학생 동창들은 학원을 다니며 선행학습을 하고 내신을 관리할 때 나는 밤을 새 가면서 조리 자격증을 준비하고 조리 테크닉을 익히며 학교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어. 요행을 바라지 않고 부지런하게 움직인 덕분에 선생님들과 선배들의 인정을 받아서 고3 때에는 조리 대회를 준비하는 선수단에 들어갈 수 있었어. 그때 내가 준비했던 대회는 영어로 재료 목록을 받고 애피타이저, 메인, 디저트를 만들어 내야 하는 대회였거든. 그때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어. 정말 양식을 제대로 전공하고 그 길로 나가고 싶다면 내가 넘어야 할 산은 '자격증을 모으는 일'이 아닌'소통 수단인 영어'라는 걸.


10년도 전, 당시 우리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은 대부분 국내파셨어. 높은 학위를 보유하고 계신 분들도 많았고 열정도 넘치는 분들이 많았지만 현장 경험과 해외 경험이 풍부한 '필드형 셰프'들이 아니셨기 때문에 배움에는 한계가 있었어. 해외의 요리 테크닉이나 트렌드 공부는 외국서적이나 잡지를 들여다 보는게 다였어. 아직도 기억나는 일 중 하나는 대회 때 만들어야 하는 요리가 오리 가슴살 스테이크를 폴렌타 위에 얹은 메인 요리였거든. 폴렌타가 무엇이고 어떤 식으로 요리를 해야 하는지 그 누구도 시원하게 답을 주는 사람이 없는 거야. 그때 나는 막연하게 유학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어. 

그 막연한 희망이 확고해진 건 진학을 희망하던 4년제 대학교에 미끄러진 순간이었지. 속상하고 눈물도 났지. 자의 반 타의 반 2년제 조리과로 진로를 변경하면서 어쩌면 이게 썩 나쁘지 않은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 기본기를 다지는 시간을 최소화하며 해외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지. 그 생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동기들은 2학년 2학기 취업을 할 때 나는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선택했어.

(그때 당시 워킹홀리데이는 지금처럼 보편화되지도, 해외 취업 프로그램이 잘 되어있지도 않았어.)




-

A : 나는 26살 때까지도 내가 무엇을 하고 싶고 뭘 할 수 있을지 전혀 감이 없었어. 혹시 하고 싶은 일이 생길까 봐 공부도 하고 스펙도 쌓으면서 미래를 준비하던 또래들과 다르게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알 수 없으니 제자리에서만 무기력하게 맴맴 돌았었는데 너는 그 어릴 때부터 한 점을 딱 찍고 밀어붙였구나. 존경스럽다. 지금의 너도 존경하지만 그 어린 민아도 존경스러워.

그래서 호주에 오게 된 후에는 어땠니? 원하던 대로 해외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

-

M : 사실 호주에 도착하면 캥거루와 함께하는 여유 있는 황금빛 인생이 펼쳐지리라는 기대로 왔거든? 그때만 해도 순진했지 ㅋㅋ 근데 도착해보니 막막한거야. 아니 그걸 넘어서 삭막했어. 토익 400점인 내가 제일 처음 도착해서 찾은 건 공중전화 박스였어. 나 잘 도착했다고 부모님께 전하고 싶은데, 길을 못 찾겠더라. 그래서 where I am?이라고 지나가는 외국인한테 물으니, 돌아오는 답변은 블라블라였어. 영어 울렁증이라고 하잖아. 그게 나한테 있는지도 몰랐는데 정말 피부로 느끼니까 앞으로 어떻게 버텨나가야 하지라는 생각에 눈물이 나더라. 

도착해서 직장을 구해야 해서 resume라는 이력서를 썼어. 요리를 5년을 배웠다고 하지만 요리도 다른 전공이랑 똑같아. 학교에서 배운 것은 아주 기본적인 밑그림일 뿐, 색을 칠 해 넣고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현장에서 직접 업무를 배울 때부터잖아. 이론적인 경험일 뿐 현장 경험이 거의 없다 보니 경력을 쓸 수 있는 것이 없는 거야. 예기치 않은 백수생활이 길어지는 동안 관광이라도 하자 싶어서 호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했어.


멜버른은 호주 내에서도 다문화가 가장 잘 정착되어 있고 외식산업이 정말 잘 발달되어있는 곳이야. 이곳저곳을 보며 마주치는 셰프복을 입고 일하는 사람들이 부러웠고 그 벽은 너무 높아 보였어. 그래도 언젠가는 나도 저런 곳에서 팀의 일원이 되어 같이 호흡하는 날이 오겠지 라는 희망은 품고 있었지.

그러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알게 된 지인을 통해 ‘내가 일하는 까페에서 셰프를 구한다는데 지원해 보지 않을래?’라는 제안을 듣게 되었어. 이건 기회다! 싶어서 그 카페로 달려갔지. 커피가 아주 유명한 집 이더라. 하루에도 수백 명씩 왔다가는 카페에서 할루미 치즈, 호무스 등을 이용해서 샐러드, 샌드위치 등을 만들어 내는 일들은 노동이라기보다는 공부와 같았어. 

일상생활 속에서 그들이 흔하디 흔하게 매일 먹는 치즈, 빵, 야채, 와인들. 한국에서는 구하기가 어려워서 책에서만 보던 다양한 식재료들을 시장에서 만져보고 사 와서 직접 조리해보는 모든 일들도 나에게는 수업 같았지. 그런 순간들이 너무 경이롭고 신기해서 이 나라에서 이렇게 공부를 하며 내 20대를 보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영어에 대한 욕심 또한 날로 커져만 가기도 했고 기왕 시작한 것 더 전문적으로 해보자는 욕심 때문에 나는 유학을 결심했어



-

A : 계기와 과정은 틀리지만 워킹홀리데이로 왔다가 요리 유학을 결심한 것은 나와 같네. 우리 같은 요리 학교 선후배 사이잖아. 네가 나보다 딱 한 학기 먼저 입학하고 졸업했지? 학교에서는 서로 모르고 지나갔지만. 

집에서 지원받을 상황이 아닌 상태에서 유학을 결심했는데, 워킹홀리데이를 하면서 유학을 어떻게 준비한 거야? 학비와 비자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

M : 앨리스 너와 굉장히 비슷해. 워킹이 6개월쯤 지났을 때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고 등록하는데만 당장 천만 원이 필요했어. 유학=돈이라는 고정관념이 나에게도 있었거든. 아니 그 대단한 걸 내 힘으로 해낼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 생존에 꼭 필요한 고정지출은 얼마이며, 매주 얼마를 저금을 해야 학비를 모을 수 있을지, 그러려면 얼마나 벌어야 할지 꼼꼼히 계산을 했어. 계산이 끝나니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진짜 생존에 필요한 돈만 쓰고 나머지 시간은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았어.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지만 그때 당시에는 맥도널드 아이스크림 콘 하나 사 먹는 일이 일주일 중 나를 위해서 쓰는 유일한 사치였어. 그렇게 일, 일, 집만 반복하니 자동으로 통장에 돈이 쌓이는 거야. 사실 돈 쓸 시간이 없어서 자동으로 돈이 모였던 것 같아. 22살 당시 큰돈이라면 큰돈인 천만 원을 모아서 학교를 갈 수 있었고, 이런 생활 습관을 유학생활 내내 유지했어. 일, 학교, 집의 루틴을 반복하며 옷이 해져서 못 입게 되기 전까지는 옷도 사지 않았고, 쓸데없는 돈은 일체 쓰지 않았어. 


요리 유학 돈 많이 들지 않느냐, 집이 부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데 나는 사실 비행기 표만 가지고 호주에 가서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서 냈고 심지어 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에는 꽤 목돈이 들어있는 저금통장을 수중에 들고 있기도 했어. 





-

A : 그래, 내가 맨날 하는 소리지만 내가 세상 살면서 본 가장 독한 인간이 너야. 나도 정말 독하게 돈 모았다고 자부하거든. 나 학비 모을 때는 낮에는 라면 끓여먹고 밤에는 그 국물에 밥 말아먹고 또 라면 끓여먹고 밥 말아먹고를 반복했으니까. 그런데 너한테는 명함도 못 내밀겠더라. 한참 꾸미고 놀고 싶을 나이였을 텐데 매일 일만 하면서 너는 무슨 생각을 했니? 힘들고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어?

-

M : 이게 조기 교육이라고 하면 웃긴데, 우리 엄마가 늘 하시는 말씀이 있거든. 늙어서 추운 겨울에 고생하고 싶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젊을 때 아끼고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고. 

요새의 YOLO트렌드와는 정반대의 선상에 서있는 낡아빠진 생각일지 몰라도 내 머리에는 그 생각이 늘 남아있어. 미래에 천천히 주위도 둘러보며 산책하듯 걷기 위해서 지금은 열심히 뛴다고 생각하면 고생도 할만하더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이 힘들어도 참을 수 있었어. 매일 새로운 식재료를 손질하고 외국인 동료들과 소통하고 새로운 레시피를 배우는 모든 일들은 노동이라기보다는 수업 같았거든. 늘 배우고 싶었던 것을 돈까지 받으면서 배우니 얼마나 좋아. 학교 수업도 일상생활도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일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배우려고 들면 다 내 재산이 될 거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맞았어. 누군가는 꽃 같은 청춘을 매일 초라하고 허름하게, 메마르게 흘려보냈다고 안타깝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그 시절 행복했고 후회는 없어.



-

A : 그때의 어린 민아처럼, 어린 앨리스처럼 돈도 없고 영어도 못해서 호주행이 망설여진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

M : 주제넘게 들리겠지만 그냥 가볍게 들어줘. 어차피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할 수 있으니까 나도 내 입장에서 이야기해볼게. 돈이 유학을 발목 잡는 주원인이라면 힘들겠지만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 돈은 원래 있다가도 없는 거잖아. 돈을 버는 데에는 다 때가 있는 거라 생각해. 돈이 많으면 분명히 편하고 더 풍족하게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겠지만 돈이 없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은 많아. 알바를 하던 용돈을 줄이던 비행기값와 네가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최소 정착 생활비만 마련할 수 있다면 후회하더라도 와서 부딪혀봐야 정답은 나오는 것 같아. 네 선택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는. 뭐든지 안 해보고 후회하는 거 보다는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다고 하잖아. 참고로 나는 비행기 값을 포함해서 250만 원 들고 호주에 왔었어.


영어 때문에 망설여지겠지만 사실 영어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남의 나라말인데 쉽게 안 배워지는 게 어쩌면 당연한 거야. 우리가 초등학교 입학해서 말랑말랑한 머리로 익숙해질 때까지 구구단을 습관처럼 외웠듯이 영어도 계속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 것이 되겠거니 하고 생각했으면 좋겠어.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절박하면 hello, thank you 혹은 바디랭귀지로도 말은 통하게 되어있고 국경을 넘어서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이 때문에 나의 절박함도 통하게 되어있더라. 나 호주 처음 갔을 때 토익 400에 말 한마디도 못했거든. 내가 영어로 자연스럽게 말하게 될 날이 올까 싶었는데 그 날이 오기는 오더라고. 

누구든 노력해서 안 되는 사람은 없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시계의 속도가 다를 뿐이지. 영어를 빨리 배우고 늦게 배우는 속도의 차이는 있어도 페이스 조절하며 꾸준히 완주해야 하는 장거리 달리기라고 생각하며 꾸준히 영어에 익숙해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 무엇보다도 내게 부족한 결핍을 채우겠다는 욕심과 도전하고 싶다는 의지가 밑받침 되야 하겠지. 



-

A : 호주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어?

-

M : 호주 유학 생활이 길어지면서 나의 미래를 이 나라에서 꿈꿔봐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직업 특성상 셰프라는 직업의 대우나 전망이 호주가 더 낫다고 판단했거든. 이민이 많이 힘들었다면 그런 마음을 애초에 먹지도 않았겠지만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요리사는 졸업한 후 일정한 영어점수를 받고 900시간의 근무기록만 채우면 영주권 신청이 가능했어. 해볼 만했지.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혹시 모르니 보험으로 영주권을 따놓아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도 있었어. 

그런데 바로 내 앞에서 갑자기 이민법이 바뀐 거야. 나를 스폰서 해주겠다는 고용주에게 스폰서 비자를 받지 않으면 답이 없도록 이민의 문이 닫혀버렸지. 졸업 예정자라면 누구에게나 발급해 주던 졸업생 비자 기준도 터무니없이 높아졌어. 당장 나에게는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밖에 없었고 영어로 따라가야 하는 학과 공부와 일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벅찬데 영어 공부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정말 지옥 같았어. 시간이 턱없이 모자란 상황에서 조급하게 치러야 하는 영어 시험 점수는 전혀 오르지 않고 제자리걸음 했고 나는 희망을 버리기 시작했어. 이제야 풀타임으로 돈도 벌고 셰프로서 제대로 시작해볼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가 물거품이 되어가는 것을 보며 얼마나 무기력하고 허망했는지 몰라. 





-

A : 나도 같은 일을 겪어서 그런지 그 고생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내 인생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력하게 휩쓸려가는 그 기분, 남의 나라에서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지는 자괴, 여태껏 쏟아왔던 시간과 노력에 대한 아쉬움. 나도 그 시절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어. 울기도 많이 울었지. 그래서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어? 

-

M : 결국은 영어 점수를 만들지 못했어. 일을 그만두고 영어공부만 했었어야 했는데 그럴 상황이 안되었거든. 그렇게 졸업을 할 때쯤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도 없이 이렇게 한국에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쩔 수없이 학업을 연장했지. 생각지도 못한 파티쉐 과정을 추가로 더 배우기로 한 거야. 배워놓으면 언젠가는 써먹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1년이라는 시간을 벌어서 더 생각해보자는 마음이었지.

그렇게 팔자에도 없이 가방끈만 길게 늘여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스폰서를 해주겠다는 제의가 들어왔어. 그 당시에는 한동안 셰프로 스폰서 비자가 받기가 힘들 때였거든. 그래서 파티쉐 셰프의 자격으로 스폰서를 받고 영주권을 딴 거야. 울며 겨자먹기로 돈 버린다 셈 치고 취득한 파티쉐 코스 자격증이 뜻하지 않게도 내가 원하는 것을 가져다준 거지. 세상 모든 일은 지나고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같아.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힘들고 지쳐서 다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들도 많았지만 다행히 그때마다 나를 달래주고 다시 일으켜주며 돌봐주는 애이프릴 언니가 있어서 위기들을 넘길 수 있었어. 마음 둘 곳 없는 해외 직장생활에 내가 존경하며 좋아하는 한국인 동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


TAXI KITCHEN에서 일했던 길면 길고 짧으면 짧았던 3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난 정말 희로애락을 차고 넘치도록 골고루 느꼈어. 동료들과 매일 울고 웃으며 영주권을 향해 정신없이 달리고 나서 결승선에서 고개를 드니 나니 어느샌가 나는 많이 단단해져 있더라. 많은 경험과 지식이 쌓인 숙련된 셰프가 되어있었어. 



-

A : 호주에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영주비자를 취득하였고 어디서나 일하고 싶은 곳을 골라갈 수 있는 경력도 있었고 호주 생활에 꽤 만족하고 있었던 네가 이 모든 것을 접고 한국에 돌아간 이유가 뭐인지 궁금해 

-

M :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호주는 '자유, 기회가 있는 나라'잖아. 20대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물론 모든 면이 좋지는 않고 지긋지긋할 때도 물론 많았지만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나 자신을 더욱 잘 알게 되는 시간,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공평하게 주어지는 기회가 나는 좋았어.

그래도 아무리 호주가 좋아도 채워지지 않는 1%가 있더라. 


가족, 친구들과의 추억들. 

너무 일찍 호주에 왔기 때문에 변변하게 기억나는 게 없는 거야.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많은 영향을 준 소중한 사람들과 더 늦기 전에 내 시간을 같이 공유하고 추억을 쌓고 싶었어. 

두 번째로는 한식 공부를 더 깊게 하고 싶은 욕심이 언제나 있었거든. 양식을 전공했지만 셰프로서 태어난 나라의 식문화를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은 언제나 나를 좀 부끄럽게 했고 마음에 걸려있었어.


한국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2년제 학위를 바탕으로 학점은행제에 편입해서 4년제 학위를 받는 일이었어. 언젠가는 영어로 외국인들 또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경험, 조리 지식을 영어로 전달하는 일을 하고 싶기 때문에 석사 학위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지. 학업을 진행하는 동안 한국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자연스럽게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은 또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들더라. 

듣던 대로 내가 가진 경력으로 한국 대기업에 취업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어. 요새는 해외 유학파 셰프도 엄청 흔하니까. 

그래도 어릴 적부터 외길 인생으로 차근차근 쌓아온 필모그래피에다가 해외 경험으로 인한 외국 식자재에 대한 이해도, 영어로 소통이 자유롭다는 점이 강점이 되어 원하는 곳에 취업을 할 수 있었어. 



-

A : 벌써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한지도 만 2년이 넘었다. 호주에서는 알바를 빼고 정규직으로 4년 정도 일했지? 요식업 직장생활을 두 나라에서 한 경험을 바탕으로 호주와 한국의 직장생활을 비교해 본다면? 

M : 호주는 다양한 인종이 한 곳에 모여 한 문화를 이룬 만큼 사람에 대해 개방적이야.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봤을 때 업무 효율성보다는 인권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는 점이 가장 다른 것 같아. 한국도 물론 많이 변해가고 있는 추세지만 아무래도 인구밀도에 따른 과도한 경쟁체제라는 게 있잖아. 고등교육을 받은 우수한 인재들은 넘쳐나는데 괜찮은 직장이라는 것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직장 생활 속에서 '너 아니라도 된다 Anyone can replace you' 라는 기득권층의 마인드를 느낄 수 있는 일이 많이 있었어. 그 밖에도 틀에 박혀있는 형식에서 벗어나면 특이하고 이상한 사람이 되고 주변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아.  


20대 불타는 열정에 부푼 꿈을 안고 셰프라는 직업에 도전하지만 끝까지 버티기 힘들어. 여자가 주방장까지 가는 케이스가 아주 드물다는 걸 보면 알겠지. 임금도 그렇고 복지도 그렇고 특히 체력 면에서 이 직업은 여성이 출산 후에도 이어갈 수 있는 직업이 아니야. 아직 한국에서는. 그래서 많은 동기들은 필드에 있다가 학원 선생님이나 쿠킹 스튜디오로 빠지고 교육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경우가 많아. 하지만 호주는 대체인력 제도가 잘되어있고 노동자의 힘이 센 편이기 때문에 복지 혜택이 많고 여자 요리사들도 출산과 육아를 병행하면서도 끝까지 남을 수 있지. (물론 아직도 소규모 사업장은 이런 모든 것이 보장되어 있지 않아. 보편적으로 대체적으로 비교적으로 그렇다는 말이야.) 


조금 더 현실적으로 근무 환경의 다른 점을 말해보면 호주는 Annual leave라는, 1년의 28일 유급휴가 제도가 있고 병가 제도가 잘되어있지.  한국도 연차가 있지만 호주의 반 정도이고 이어서 쓰려면 좀 눈치 보이더라. (보통 연차 13일 + 여름휴가 3일)  일 년에 한 달 정도 장기간 여행을 가고 싶거나 하다면 호주가 훨씬 더 유동적이라 좋아. 호주에는 내 자리가 비면 대체인력을 쓰지만 한국은 내가 없는 동안 누군가 제 업무를 대신 수행해야 한다는 압박이 드는 만큼 휴가를 길게 가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 


하지만 호주에서 내가 한국은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만 들어서 겁을 너무 많이 먹었던 건지 생각보다 좋은 점도 많았어. 그리고 사실 나는 계속 레스토랑이라는 필드에서 뛰던 요리사잖아. 긴 근무시간과 강한 노동강도로 유명한 레스토랑 근무와 비교했을 때는 한국의 기업생활은 편한 점이 많지. 다 밀어놓더라도 남들 퇴근할 시간에 퇴근하고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 남들 노는 날에 나도 놀 수 있다는 점! 크리스마스에 쉰다는 것은 꿈도 못 꿨던 나로서는 정말 꿀 같은 휴식이야. 하하

그리고 호주에는 없는 퇴직금 제도는 정말 이직을 하거나 퇴직을 해서 막막한 상황에 큰 힘이 되는 것 같더라. 




-

A : 한국에서 그만큼 열심히 했어도 지금의 위치에 있을 수 있었는데 넌 어쩌면 멀리멀리 돌아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힘들게 영주권을 따고도 써먹지 않고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7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영주권을 딴 것에 대한 후회는 없어? 영주권 획득 후 생긴 변화가 있다면?

-

M :  폭풍 같던 20대를 보내고 30대로 접어든 지금, 나는 여유가 많이 생겼어. 금전적이나 위치적인 부분이 아니고 심적으로 그런 것 같아. 어디 한 곳에 묶여있지 않고 배우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어느 나라든 (호주 혹은 한국) 자유자재로 선택해서 내 삶을 계획할 수 있는 옵션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나에게 여유를 줄지 몰랐어. 호주에 있는 동안 그 망할 놈의 비자 때문에 전전긍긍,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이 곳을 떠나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많이 불안했거든. 이제는 호주에서 입출국, 취업, 사업 등에 제한이 없게 되었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미래를 계획할 수 있어서 좋아. 지금은 계획에 없지만 아무래도 시기가 결혼 적령기라서 그런지 2세를 키우고 교육하기 좋은 나라라는 장점이 있는 호주 영주권을 따놓기 잘했다는 생각이 종종 들어. 어느 곳에서 내가 뿌리를 내리게 될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선택권이 나에게 있고 스스로 인생을 컨트롤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내 7년을 값진 희생이었다고 생각해. 감사하는 마음이야.



-

A : 경력은 많지만 너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셰프 생활을 오래 하였잖아. 호주에서 나이가 어린, 비주류인 아시아계의 셰프로서 유리천장을 경험했던 일이 있니? 

-

M : 물론이야. 있지. 내 경력과 힘들게 익힌 지식이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적이 있었지. 

호주에서는 파스타, 샌드위치가 주식이잖아. 한국인들이 좋은 밥맛과 아닌 것을 자연스럽게 구분하듯이 그들은 셰프가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알고 있는 것들을 나는 모르는 거야. 내가 한국에서 배운 어설픈 양식과 퓨전 한식의 노하우는 그들 눈에는 너무 가소롭게 보였고 무시도 많이 받았지. 아까 말했듯이 내가 조리를 시작했을 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도 없었고, 해외파 선생님이나 셰프들이 정통 양식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어. 한국식으로 변형된 양식 조리법을 배우고 아래로 아래로 전수해주는 쳇바퀴 교육을 받은 내가 보여준 스킬들은 그 들에게는 웃음거리였어. 파스타 면 하나 정석으로 못 만들었으니. 

그래서 호주에서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양파 썰기부터 기본기를 다시 시작했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어. 그때의 나는 열정이 넘쳤고 젊었고 무서울 게 없었지. 

유리천장을 느꼈지만 두렵지 않았어. 깨고 올라가면 그만이니까.  




-

A : 유리천장을 이야기한 김에 조금 더 깊게 파보자. 동료 여자 셰프로서 분명히 네가 넘어야 했을 장벽이 있었음을 나도 알고 있어. 집 주방에는 여자가 어울린다고 하는 고정관념이 왜 상업 키친에서는 손바닥 뒤집히 듯 뒤집히는지. 이 곳은 군대라고, 이 험하고 힘든 곳에 여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 X 같은 'OLD SCHOOL' 꼰대들에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리고 손톱이 파고들도록 주먹을 쥐어야 했을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다 견뎌내고 지금 원하는 곳에 꿋꿋이 서있는 네가 더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운 거 같아. 


네가 느낀 여자로서 주방에서 일하면서 느낀 차별의 경험들을 공유해 줄 수 있겠니. 그리고 그때의 너와, 나와 같은 - 키친에서 지금도 땀 흘리고 있는 여자 후배 셰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줘. 

-

M : 기억나지, 앨리스. 내가 일하다가 너한테 전화해서 울면서 병원 좀 데리고 가달라고 했던 날. 

일하다가 뜨거운 물이 엎어져서 팔꿈치부터 손까지 크게 화상을 입었어. 살갗이 벗겨서 나가는 팔을 얼음물에 담가서 열기를 빼냈어.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 동료 남자 셰프들이 처음엔 걱정하는 척하더니 어느샌가 놀리는 거야.


'너 BABY GIRL처럼 우는 거 아니야?'

'키친에서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BABY GIRL도 아니고 무슨 병원을 가? 하하'

BABY GIRL BABY GIRL BABY GIRL


오기가 생겨서 버텼어. 내가 너네보다 약할 줄 아냐, 나는 약하지 않아, 울지 않아. 

내가 그릴 파트였거든. 뜨거운 숯불 앞에서 스테이크를 저녁 내내 구웠어. 팔에 열이 오르더니 수포가 막 올라오고 팔 위까지 열이 나는 거야. 결국에는 감염이 돼서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서 쓰러지기 직전까지 돼서야 이건 안 되겠다 싶었어. 그래서 너한테 울면서 전화를 했지. 언니 나 너무 아파...

 그리고 우리는 응급실에 갔어. 

어느 날은 독감이 심해져서 폐렴이 되기 직전까지 심각해졌을 때 일을 하러 갔어. 아픈데도 꾹 참으며 이리저리 몸을 겨우 움직이면서 일을 하는데 죽어도 집에 가라고 안 하는 거야. 물 많이 마시라고, 키친에서는 약한 사람은 못 살아남는다는 그 개똥 같은 논리. 

그렇게 3일 지났나. 한 명씩 내 덕에 독감이 걸리고 자기네들은 잘도 병가를 내더라. 그러고 나서는 내 탓을 하더라고. 네가 병균을 옮겨서 이렇게 된 거라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화나는 일들이야.


여자 셰프들은 아마도 공감할 거야. 

아마도 남초문화인 곳에서 일하는 모든 여성들이 이런 것을 느끼겠지. 경찰, 군인, 요리사 등등. 

여자라서 약하다, 여자라서 이기적이다, 여자라서 못 버틴다는 이런 소리가 죽기보다 듣기 싫어서 악으로 오기로 버티고 또 버티고 증명해 보이려고 노력하는 시간들. 그때는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면 걔네가 뭐라고, 실체도 없는 허상을 증명해서 뭐하겠다고 내가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힘들어했나 싶더라.

꼭 말해주고 싶어. 여성은 대체로 체력이 남성보다 약하고 힘도 약해. 그렇다고 우리가 약한 것은 아니야. 그러니 힘으로 체력을 증명하고 인정받을 필요는 없어. 할 수 있는 일은 빼지 말고 해야 하는 것은 맞아. 여자기 때문에 힘들까 봐 시도도 해보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그들의 고정관념을 확인시켜주는 것 밖에 안돼. 다른 팀원에게 내 일을 의도적으로 미루는 것은 정말로 나약한 거고 게으른 거니까. 성별을 떠나서 말이야. 


약해 보이고 싶지 않다고 악으로 견디지 말고 다른 걸로 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동료로서 존경받으면 돼. 몸 쓰는 사람보다 머리 쓰는 사람, 언제나 발전하는 사람이 어디 가던지 존경받잖아. 나처럼 무식하게 안 되는 힘쓰고 아픈데도 견뎌가면서 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존경받고 싶으면 끊임없이 공부하면 돼. 요새 책도 잘 나오고 자기 개발할 수 있는 방법은 널리고 널렸어.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병가 써. 여자라서 아픈 게 아니고 사람이라 아픈 거야. 지레 자격지심 때문에 스스로 손해 보는 일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기가 스스로를 아껴야 남들도 너를 아껴준다는 사실 절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로! 



-

A : 너무 잘 들었어. 이렇게 네 이야기를 듣고 또 다듬고 있으니 더 그립고 보고 싶다. 앞으로 더 많은 가시밭길을 우리가 걷겠지만 지금처럼 긍정적으로 열심히 걸어간다면 분명히 네가 원하는 곳이 다음에 다다르는 목적지가 될 거라고 생각해. 

끝으로, 이민을 꿈꾸고 있는 한국의 요리사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줄래?

-

M : 오로지 이민만을 위해서 네가 멀고 먼 호주에 와서 요리를 시작하겠다고 한다면 말리고 싶어. 

말했듯이 유학에서 이민까지 달렸던 7년이란 시간은 정말 쉽지 않았기 때문이야. 정말 하고 싶고 열정이 차고 넘친다고 해도 끝까지 하는 사람이 드문 직종이야. 중도 포기가 정말 많아. 만약 이민이 목적이라고 하면 조금 더 편한 길을 선택했으면 좋겠어. 개인적으로는. 

하지만 요리를 이미 너의 길로 생각하고 더 넓은 세상에서 많은 경험을 하고 요리사로서 더 좋은 환경을 원한 다면 이민이 너에게 답이 될 수도 있어. 다양한 인종들이랑 같은 공간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쟁할 수 있었던 시간들은 나에게는 굉장히 큰 버팀목이자 추억이 되었거든. 


배움을 위해 새로운 세상에 도전을 한다는 것은 정말 큰 일이야. 외국어를 써야 하고 또다시 세상에 적응해야 하는 일은 힘들고 겁이 날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말이야. 요새는 한국에 머무른다고 하더라도 이런 일들을 피할 수가 없어. 정말 빠르게 변하고 날이 갈수록 국제화되어가는 세상이니까. 생각보다 한국이 너에게 잘 맞을 수도, 해외가 너에게 더 잘 맞을 수도 있어. 그건 직접 나와보기 전까지는 절대 몰라.

내가 개인적으로 만족하는 결정이었다고 해서 너도 만족하리라는 법은 없지만 어차피 할 거라면 조금이라도 젊을 때 도전하는 걸 추천해. 이 선택이 틀리다 치더라도 조금이라도 젊을 때 돌아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

여태까지 올라오면서 지금 돌아봐도 그걸 어떻게 버텨냈을까 싶은 힘든 순간들이 많았지만 무엇이던 어렵게 얻은 만큼 쉽게 잃어버리지 않는 것 같더라. 지금 현재가 희망적이지 않더라도 나아질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결실은 맺을 거라고 생각해.


어떤 선택이든 정말 마음 깊이 응원해.

어느 곳에 있던 건강하길 바래.

긴 이야기 잘 들어줘서 고마웠어!




놀러와! :-)


민아 (인스타)   :   MINAH_GRAM

앨리스 (인스타)   :   ALICEINMELBOURNE

수다 (인스타) :  SUDAMELBOURNE  (앨리스 팀 첫 번째 레스토랑)

네모 (인스타): NEMOMELBOURNE (앨리스 팀 두 번째 레스토랑)


*답글은 원래 하던 대로 반말로 주고받으면 더 좋을 거 같아!! 나도 그게 편하고, 언니 거나 오빠 거나 친구 거나 동생일 너도 그게 편할 거야, 하다 보면!! 물론 존대가 편하면 그렇게 소통해도 좋아 :-)


**호주 이민 생활 중이거나, 호주에서 이민 과정을 밟고 있는 동료들 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이민을 생각하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조언들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부담 없이 댓글이나 인스타 디렉트 메시지를 줘! 꼭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일 필요도 없어. 지금 이민의 과정을 밟으면서 느끼는 고충과 어려움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민에 대한 좋은 점과 후회되는 점도 가감 없이 나누고 싶은 동료들의 참여 기다릴게!


***출처를 밝힌 공유는 언제나 환영이야!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돼 :-)

이전 09화 조기유학부터 세계최대 회계법인까지 by 제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