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멜버른앨리스 Feb 15. 2018

조기유학부터 세계최대 회계법인까지 by 제니

회계사이자 워킹맘으로 호주에서 사는 이야기




작년에 나는 호주 공영 방송 SBS에서

멜버른에서 레스토랑을 하는 이야기를 인터뷰를 했었어.

사람 좋은 피디님의 배려 덕에 방송이라는 사실도, 스튜디오라는 곳이 주는 긴장감도 잊고 즐겁게 수다를 떨고 나왔지. 그렇게 끝난 인터뷰가 방송에 나간 후 나는 페이스북 메시지를 하나 받았어.

‘멜버른에 살고 있는 동갑내기 회계사인데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는 간결하면서 직설적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번호를 따였고(?) 얼결에 만날 날을 정했지. 우리 수다와 네모 식구들 챙기는 것도 내 그릇에 넘치게 버겁기 때문에 좀처럼 낯선 사람들과 애를 써서 인연을 이어가는 일이 없는 나로서는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던 것 같아. 인터넷으로 알게 된, 얼굴도 모르는 친구와 점심 약속을 잡고 친해지려고 하는 일은.


똑 부러지는 그녀, 제니가 메뉴를 죽어도 결정하지 못하는 병이 있는 나에게 보기를 주었고 내가 우물쭈물하는 새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마쳤다며 나에게 약도까지 보내왔어. 제니를 만나기로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가면서 ‘아, 역시 커리어 우먼이라 그런지 이런 일 하나도 군더더기 없이 처리하는구나’ 하고 감탄했던 생각이 나.

제니와 어색하지만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쭈뼛쭈뼛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어. 요새 뜨고 있는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더라. 오래간만에 우아하게 칼질 좀 하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제니가 난감한 얼굴을 하더니 깔깔 웃는 거야.


앨리스, 나 예약 오늘 아니고 다음 주로 잡았어! 오늘 여기서 못 먹어요. 미안해 ㅋㅋ


나도 깔깔 웃었지. 얘 뭐지, 이 아이 생각보다 많이 허술하구나.

첫 대면이니 깔끔한 곳에서 우아한 음식을 먹으며 서로 천천히 알아가 볼까, 하는 우리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우리는 대낮부터 고깃집에 가서 우삼겹을 굽고 양푼 비빔밥을 비볐어. 바로 말을 놓았고 서로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찾아가는 시간을 가졌지.


솔직히 말하면 제니는 83년생 호주 이민 온 여자 사람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놀라울 정도로 나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어. 제니는 부산 옆 양산에서 자란 반듯한 모범생, 조기유학 출신의 회계사, 워킹맘인 이민자이고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공부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워킹 홀리데이 출신의 셰프이자 레스토랑 오너인 이민자. 알면 알수록 우린 같은 시대를 보냈는데도 어쩜 이렇게나 다를까 너무 신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만남에 너무 편안하게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기뻤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그가 보여주는 새로운 세상을 엿본다는 것은

내 세상을 이루고 있는 벽을 조금씩 허물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나도 모르게 견고하게 쌓아놓은 편견의 벽들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남들도 나와 다르지 않는구나, 내가 나의 세상이 있고 아픔이 있는 것처럼 모두 저마다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구나, 내가 평가할 수 있는 삶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구나를 느끼게 해주는 고마운 기회인 거야. 물론 모두가 그런 기회를 내게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제니를 만났을 때는 명확히 그랬어. 느닷없이 내 친구가 되겠다고 처들어온 그녀는 그날 그렇게 내 벽을 또 조금 허물었지. 자기도 모르게 말이야.


어린 워홀러 시절의 나는 언제나 돈에 쪼들렸어. 놀기 좋아하는 내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영어를 못하니까 변변한 일을 구하기가 힘들었거든. 그런 나와 내 주변 친구들의 최고 관심사는 언제나 ‘어떻게 하면 시급이 높은 호주에서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지?’ 였어. 돈을 일단 벌어야 영어공부던 여행이던 할 수 있으니까.

만나면 돈타령인 우리들의 눈에 조기유학 와서 홈스테이에서 사는 친구들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순진하게만 보였고 부모 잘 만나서 편하게 사는 얘들로 비추어졌어. 삼시세끼 끼니 걱정할 필요도, 쉐어하우스에서 청소를 누가 하네 빨래는 어떻게 하네 지지고 볶고 싸울 일도 없고, 내 등을 어떻게 처먹을까 궁리하느라 바쁜 사장이랑 싸울 일도, 생활비에 쪼들릴 필요도 없는 걔네가 무슨 고민이 있을까 생각했지.

아무 걱정 없이 공부만 하면 되는데 힘들 일이 뭐있어? 나는 누가 그렇게만 해주면 서울대라도 가겠다.라는 말들을 (지금 생각해보면 어림반푼 어치도 없는 헛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던 기억이 나.


요리 유학을 마치고 셰프가 되고 나서도 나의 편협함은 변하지 않았어. 대상과 형태만 바뀌었을 뿐.

하루에 12시간씩 서서 무거운 것을 들고 나르고 몸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이 일을 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선택이었고, 요리사라는 직업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끔은 이 강도 높은 육체와 정신노동의 하모니가 버거웠어. 그래서 유난히 힘들고 지치는 날은,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는 거야.

아, 나도 앉아서 편하게 하는 일 하고 싶다. 왜 공부를 안 해서 이렇게 몸뚱아리로 벌어먹고 사는 걸까?

동료 요리사들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엄마가 공부를 해야 편한 일 한다고 한 건 이유가 있었어’ 하는 말을 주고 받고 수트에 사원증을 목에 걸고 우아하게 점심을 먹는 사무직 직장인 손님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앉아서 일하며 '편하게 사는 삶’을 함께 열심히 시샘하고는 했어.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지.


그런 나에게 처음 만난 제니가 호탕하게 깔깔 웃으면서 하나도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들려주는 조기유학 시절의 설움과 직장생활에서 살아남으려 고군분투하던 시절의 이야기, 타지에서 미역국도 제대로 못 먹고 산후조리를 하며 육아를 하는 이야기는 잔잔한 여운을 남겼어.

너로 대변되는 그 많은 사람들을 좁은 내 편견으로 평가해서 미안해.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라는 말을 혼자 생각하며 그 날 나는 집으로 돌아왔어.





제니는 한국을 떠난 지 16년이 지났어.

지금은 한국인이 하나 없는 동네와 직장이 그녀의 활동영역이야. 호주에서 만난 남편과 가정을 꾸리고 한국어는 거의 쓰지 않는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제니는 누구보다 한인 청년들의 미래에 관심이 많았어. 늘 한국 청년들과 가까이서 함께 일하는 나보다도 어쩌면 더 깊은 관심이 있다는 점에 놀랐어. 그녀는 어떻게하면 선배로서, 친구로서 새로 정착하는 후배들에게 허튼 조언이 아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있을까 언제나 고민하는 노력을 하고 있었고 그런 점을 나도 본받을 수 있어서 나는 제니와 친구가 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해.


좁은 나라에서 모든 것이 경쟁이 되어버린 우리의 대한민국, 애증 하는 조국을 스스로 ‘헬조선’이라 부르는 청년들의 현실을 멀리서 바라보며 제니는 나에게 말했어.


‘‘헬조선’이라 ‘탈조선’을 하는 것이라기 보다 탈조선 자체가 지금 세상에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아닐까? 지금은 어느 나라나 국제화되었고 국가 간 이동이 급격히 자유로워진 시대기 때문에 한번 사는 인생, 한 곳에서 얽매인 삶이 아닌 다른 환경에서의 삶을 꿈꾸는 건 당연한 것 같아. ‘탈조선’이라는 말을 무조건 부정적이고 자조적으로 볼 것이 아니고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보고자 환경을 바꿔보는 노력’이니 당연히 격려받고 응원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조국을 잠시 떠난다고 등지는 것은 아니잖아.


처음 만날 날, 우삼겹 쌈을 욱여넣으며 너무 가볍게도 저런 무거운 주제를 태클하며 훅 들어오는 제니의 말에 나는 놀랐고 감탄했으며 깊게 공감했어. 너는 ‘탈조선’이라는 무거운 화두를 읽는 제니의 산뜻한 관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아무튼 오늘은 브런치 위클리 메거진을 통해 나의 새로운 친구 제니를 소개해!

야무진 듯 허술하며, 독한 듯 물러터진 이 제니라는 독특한 친구가 어떤 과정을 거쳐왔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조금 더 자세히 파헤쳐 보자.


앨리스가 인터뷰한 멜버른의 8번째 청년 이민자, 회계 분야의 한인 청년 멘토로 활동 중인 Jennie Kim-Ross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해 볼게. 오늘도 재미있게 읽어주었으면 좋겠어!






-

A (ALICE) : 안녕, 제니! 먼저 네 소개 좀 간단하게 해줄 수 있어?

-

J (JENNIE) : 으응, 안녕! 나는 제니라고 해. 앨리스와 동갑인 83년생의 30대 중반 호주 이민자이고 회계사이며 워킹맘이야. 호주에 온지는 16년이 넘었어. 나는 멜버른 대학교에서 회계를 전공하였고 졸업 후 세계 4대 회계 법인인 Ernst & Young과 Deloitte에서 근무한 후 현재는 멜버른의 한 공립학교에서 Business Manager라는 직책으로 일하고 있어.



-

A :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줘서 고마워! 아주 처음부터 거슬러 올라가 보자. 호주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거니?

-

J : 지금은 이민자지만 시작은 유학생이었어. 깔끔하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흔히들 말하는 그 ‘도피유학’의 당사자가 바로 나라고 할 수 있지. 반항하는 취미가 없던 나는 굉장히 모범적인 학창 시절을 보냈어. 별다른 재능도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고등학교 3년 내내 내 엉덩이랑 의자는 정말 친하게 지냈지. 고 3이 되고 나는 리더쉽 전형에 내신성적으로 부산의 한 명문대에 수시모집으로 합격이 되어 있었어. 그래서인지 수능 전에는 긴장이 완전히 풀려있었지. 수능 당일 컨디션이 별로 였던 나는 수험장의 압박을 이기지 못했고 평소 점수와는 비교도 안되게 형편없는 점수를 받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거야. 결국 수시 합격해놓은 대학교를 최종 합격하지 못하게 되었어. 초/중/고등학교를 하라는 대로 열심히 공부만 하며 지내왔는데 그 단 하루, 수능날 내 모든 학창 시절이 판가름이 되어버리는 황당한 현실 앞에 나는 어쩔 줄을 몰랐어.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한 나머지 더 이상은 이 짓거리 못하겠다 싶더라. 한국 교육 시스템에 있는 정 없는 정 다 떨어졌는데 재수는 무슨, 생각하기도 싫었어. 그래서 고민 끝에 부모님을 졸라서 영어권 국가 중 비교적 안전하다고 알려져 있는 호주로 유학을 오게 된 거야.

그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그 트라우마를 평생 극복할 수 없을 것같이 힘들었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내가 그 수능을 망친 것이 결과론 적으로는 내가 지금의 나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준 첫걸음이 되었던 거더라고. 그래서 오히려 고마워, 지금은.



-
A : 그래서 무작정 재수하기 싫어서 여기로 온 거야? 유학이라고 공부를 안 해도 되는 건 아니었을 텐데. 가장 먼저 언어의 장벽이라는 게 가장 첫 난관이잖아. 유학은 어땠어?

-

J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호주로 왔으니 몸만 다 컸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어. 한국에 있을 때는 부모님의 안전한 그늘 아래서 매일 학교 - 학원 - 집만 왔다 갔다 하면서 착실하게 살다가 갑자기 아는 사람 한 명 없고 언어도 문화도 생소한 곳에 혼자 던져지니 정말 무서운 거야. 뭐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어떻게 혼자 일어나서 걸어야 하나 막막했어. 유학을 반대하셨던 부모님을 설득시켜서 내 고집대로  결정한 유학이다 보니 누굴 원망하거나 징징거릴 수도 없었어. 나를 믿고 계신 부모님을 떠올리며 약해지지 말자고 다짐했지.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일만큼은 절대로 만들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바로 정신을 차리고 한국에서의 고3 시절 이상으로 열심히 독하게 공부를 했지. 홈스테이 주인아주머니의 룰은 늦어도 밤 9시까진 불 다 끄고 취침하는 것이었거든. 내 방에 불이 켜진걸 안 들키려고 방문 밑 틈새를 수건으로 가리고 새벽 2 - 3시까지 거의 매일 영어공부를 했던 기억이 나.



-

A : 나는 워킹홀리데이를 와서 쉐어하우스 (침대 하나를 빌려서 여러 사람들과 한 집을 공유하는 형태)에 살았기 때문에 자유롭기는 했지만 그래도 보살핌을 받는 홈스테이 친구들이 많이 부러웠었어. 조기유학생들은 홈스테이(가디언의 법적 보호를 받는 일종의 하숙 형태)를 많이 하던데 생활은 어땠니? 힘든 점은 없었어?

-

J : 비교적 어린 나이인 19세에 혼자 온 유학이라 아무래도 여기 현지 가족들과 같이 지내는 ‘홈스테이’가 가장 안전하고 적합하다고 생각되었어. 원래 이 홈스테이라는 게 원래는 굉장히 좋은 취지에서 생겨난 시스템이거든. 현지에서 사는 사람들이 외국에서 호주에서 교육을 받거나 살려고 오는 학생들이나 사람들한테 이 나라의 문화를 가르쳐 주고 또 상대방의 문화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시작한 거야.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의미는 퇴색되었고 이 홈스테이를 일종의 ‘비즈니스’로 생각하고 돈 버는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듯 해. 내가 처음 호주에 왔을 때 합류하게 된 홈스테이 가족은 필리핀계 psychologist(심리학자)였어. 번듯하고 방도 많은 집에서 자신의 친정어머니와 아들과 살고 있었고, 나 같은 유학생을 4명 더 데리고 있었어. 도착한 나는 그 집에서 이미 지내고 있던 한국 언니랑 같은 방에 배정이 되었고 초반에는 그 언닌 침대에서 자고 난 바닥에 침낭을 깔고 지냈어.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낯선 호주에서 같은 나라에서 온 언니랑 같이 방을 쓰게 돼서 오히려 너무 다행이다 싶었던 생각이 나. 그런데 알고 보니 순진했던 나를 이용했던 거더라. 한 방당 한 명이 배정되어야 하고 또 내가 냈던 홈스테이 비용도 1인 1실 기준으로 책정된 가격이었거든. 그런데 이 홈스테이 주인이 나한테 양해도 구하지 않고 그냥 우리 2명을 한방에 배치하고 돈은 돈대로 다 받은 거지. 나중에 알게 돼서 좀 뒤통수 맞은 기분이었어.

다음으로 갔던 홈스테이 집은 나이가 좀 있는 초등학교 교사가 운영하던 곳이었어. 어느 날은 공부하고 집에 가는 데 그 날따라 김치랑 한국 라면이 미친 듯이 먹고 싶은 거야.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사서 집으로 갔지. 비가 좀 부슬부슬 내리는 추운 겨울날이었어. 키친에서 들뜬 마음으로 물을 끓이고 김치를 그릇에 준비하고 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들어오신 거야. 냄새를 맡더니 너무 놀라면서 무슨 시궁창 냄새가 난다며 정 먹고 싶으면 밖에 나가서 발코니에서 먹으라는 거야. 그 추운 날에 그래도 김치와 매운 국물이 얼마나 그립고 고팠던지 들고나가서 그 비 부슬부슬 내리는 거 보며 끝까지 먹었던 기억이 나. 내가 상상하던 - 홈스테이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는 -  홈스테이 운영자였다면 나한테 와서 이 김치는 어떤 음식이냐 물어보고 내 나라 음식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어서 참 씁쓸했었어.



-

A : 와, 진짜 서러웠겠다. 말만 들어도 내가 다 화가 나고 서러워. 어리고 순진한 나이에 남의 나라 땅에서 부당함을 당해도 맞서 싸울 수도 없고 걱정하실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도 없었을 텐데 잘 참아냈어. 문화적 장벽으로 호되게 쓴 맛을 봤구나. 그러면 언어적 장벽은 어땠니? 호주 대학으로 진학을 결정하면서 영어부터 시작했어야 했을 텐데 말이야.

-

J : 아무래도 한국에서도 영어를 배우고 했으니 Reading, Writing와 Listening은 쉽게 늘었는데 Speaking은 많이 힘들더라. 그때는 이유를 잘 몰랐는데 지금 돌아보면 한국에서 19년을 보냈으니 어느 정도 자아성찰의 시기를 다 보낸 후였고  ‘한국인으로서의 확실한 자아’가 형성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걸 깨나가는 게 힘들던 것 같아. 하여튼 가장 중요하고도 큰 걸림돌이었던 영어와의 싸움은 유학 온 첫날부터 시작돼서 내가 원했던 멜버른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계속됐어.  나는 한국에서 학창 시절부터 항상 수학을 좋아했거든. 언어영역보다는 언제나 수리영역에 자신이 있었어. 그래서 전공을 선택할 때도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재무/회계를 전공으로 선택했지. 숫자를 다루는 일이 많은 전공 공부는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지만 언어와 문화적인 부분을 따라가기 위해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많은 노력을 해야 했어. 대학에서의 생활은 여러 가지로 내가 겪은 성장통 중에서 제일 컸던 것 같아. 속으론 마음이 잘 맞는 한국 친구들과 어울려서 한국에 대한 그리움도 달래고 싶었지만 그러면 결국 유학 온 의미가 없어지는 거 같아서 현지 친구들과 많이 어울렸어.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빨리 배우려고. 일반적으로 누군가와 의사소통을 할 때 언어가 차지하는 비율은 생각보다 적다는 걸 알지만, 유학생으로서 호주 사회에서 살아남고 현지인들과 동등하게 지내려면 이 원수 같은 영어를 꼭 정복해야 할 것 같았거든. 나의 간절함과 노력이 통했는지, 운이 좋게도 좋은 현지인 친구들을 초창기에서부터 사귀게 되어서 영어를 자연스럽게 많이 배웠던 거 같아.

영어라는 세상을 점점 흡수해 나가면서 이 언어라는 것이 인간의 정신적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 크다는 것을 경험했어. 영어를 배우고 자연스럽게 쓰게 되는 과정에서 내 자아가 성장하는 시기를 다시 한번 더 경험한 거 같아 신기했어. 한국어로 세팅되었던 내 가치관과 사고력이 잠시 멈췄다가 영어를 배우면서 재세팅되는 기분이랄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언어가 자유로워지면서 문화적 장벽은 점점 허물어졌고 호주라는 나라에 정이 가기 시작했어. 원래는 대학만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취직을 하거나 부모님 일을 도울 계획이었지만 멜버른에서의 생활을 더 이어가고 싶어서 구직활동까지 하게 되었어.




-
A : 원래는 유학만 마치고 가려고 했었구나. 그런데 유학이 구직이 되고 구직이 이민이 되었네.

나도 워홀만 끝나고 가려고 했다가 워홀이 유학이 되고 유학이 구직이 되고 구직이 이민이 돼서 눌러앉은 케이스라서 그런지 공감이 많이 가. 그래서 첫 구직은 어떻게 한 거야?

-

J : 유학생 신분으로써 첫 직장 구할 때 마음가짐은 ‘일단 한인 회계회사말고 호주 회사에만 들어가자’였어. 영주권 문제도 있었고 이제 갓 졸업한 유학생으로써 남들 다 들어가고 싶어 하는 대기업으로의 취업은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수많은 Job fair(구직 박람회), 인터넷 리서치, 하다못해 yellow page (멜버른의 벼룩시장 비슷한 것)까지 뒤져가며 멜버른의 거의 모든 회계회사에 내 이력서를 보냈어. 대학 졸업하고 한 3개월 정도는 집에서 방콕 하며 취업에만 올인한 듯해.  간절함과 끊임없는 시도가 통했는지 멜버른에 있는 어느 작은 Accounting Firm(회계 회사)에서 인터뷰를 하자는 연락이 왔어. 그날 신이 나서 한국에 부모님께 전화하고, 옆에서 많은 의지가 되어준 남자 친구 (지금의 남편)와 축하 파티한 생각이 나. 첫 직장에서는 한 1년 정도 일을 했었어. 하지만 회사가 너무 작아서 그런지 도전해볼 만한 프로젝트도 별로 없었고 한참 배움에 목말랐던 내 기준에는 회사의 교육 시스템이 만족스럽지 않았어. 규모가 작다 보니 회사 내에서 내가 롤모델로 삼을 선배나 직장상사도 찾아보기가 힘들더라. 그때는 영주권도 받은 후라 비자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더 큰 곳, 회계업계에서 남들 다 가고 싶어 하는 대기업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어.



-

A : 참 가만히 보면 분야는 다 달라도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한 것 같아. 나도 작은 레스토랑에서 큰 레스토랑으로, 큰 레스토랑에서 호텔로 계속 눈이 높아지더라고. 그래서 다음 직장은 어떤 데를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어?

-

J : 여기 속담처럼 자주 하는 말이 있잖아. 너도 들어봤을 텐데


 It’s about who you know, not what you know!


이 말을 실감하게 된 게, 대학교 때 사귀겐 된 동기들이 입사 추천을 해줘서 나는 별로 힘을 크게 들이지 않고 세계 회계법인 4대 회사 중에 하나인 Ernst & Young에 연금 (superannuation)을 감사하는 auditor(회계감사관)로 입사하게 됐어.


*참고로 호주의 구직자 중 3분의 1은 보증인 추천을 통해 구직을 한다고 해!  'REFERNCE'라고 하는 추천, 보증인 시스템이 매우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깔끔한 인맥관리는 물론 퇴직할 때도 확실히 일처리를 하는게 호주 직장생활의 키포인트야. 전 직장, 전 상사에게 확인을 하는 곳도 많아. 왜 그만두었는지, 일할 때 장점과 단점은 어떤 것이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호주사회의 관례야 !  -ALICE-


회계업계에서 알아주는 들어가기 힘든 회사에 유학생 출신인 내가 입사하게 돼서 은근한 자부심도 있었고, 이왕에 들어간 거 남들보다 잘하고 싶은 경쟁심도 발동해서 밤낮으로 열심히 일을 했어. 직장 상사들에게서 열심히 하고 잘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더 힘이 났고 차근차근 직장생활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어. 처음으로 대기업에서 일한 거라 그런지 호주 직장생활문화에 적응해야 할 점이 참 많았던 거 같아.  거기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는 Chartered Accountant(CA)가 되기 의해 회계사 시험을 공부해야 했어. 고된 직장생활과 회계사 자격증 공부로 내 젊은 시절의 3년을 그렇게, 고 3 생활에 버금갈 정도로 메마르게 보냈던 것 같아. 아마 그때 내 동료들은 나를 정말 조용하고 일만 열심히 하는 일벌레 정도로 기억할 거야. 그렇게 한 3년 정도 일을 하니까 연금 관련 말고 다른 업계의 회사들도 회계감사하고 싶기도 했고 다른 분야도 경험하고 싶더라. 그래서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어.


마침 Deloitte이라는 세계 4대 회계법인 회사에 다니고 있는 지인이 있었고 공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추천을 통해 인터뷰를 보게 되었고 나는 Deloitte에 경력직으로 입사하게 됐어. 여전히 회계감사라는 업무를 담당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원하던 대로 여러 업계의 다양한 회사들을 감사하게 돼서 신났었지. 그뿐만 아니라 이 Deloitte는 다국적 회계기업이라는 특성상 굉장히 국제적이야. 많은 나라에서 온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서 조화를 이루는 다문화가 회사 안에서 잘 형성되어있고 서로 다른 것을 포용하며 받아들이는 사내 문화가 아주 잘 되어있어서 나는 그 점이 참 마음에 들었어. 업무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회사의 분위기가 나와 맞는지 아닌지도 참 중요하잖아. 궁합이 맞다 보니 일도 더 재미있고 잘되었던 것 같아. 맡았던 상대 회사 담당자들에게 좋은 평판도 많이 받았어. 한국인 특유의 일 욕심과 경쟁심리가 나도 모르게 작용했는지 같이 일했던 호주 회계사들을 제치고 메니져로 먼저 진급을 했어. 그때의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야. 흔히 Big4 라 불리는 회계법인 중에 한 곳에서 매니지먼트 레벨로의 진급은 나한테 ‘열심히 잘 하면 나도 해낼 수 있다’라는 큰 자신감을 심어 줬어. 조기 유학과 대학생활, 아무도 없는 곳에 떨어진 그 막막함과 초라함을 견뎌낸 시간들을 다 보상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

A : 세계 4대 회계 법인에서 일하는 삶이라니. 음, 나는 상상이 잘 안가. 미드 ‘굿 와이프’ 같은 모습이려나? 하하. 아무튼 그런 대형 회계법인에서 일하면서 이른바 말하는 ‘유리천장’을 느껴본 경험이 있니? 남의 나라에서 일하는 이민자로서, 그리고 결혼과 출산을 계획하고 있는 여성으로서 차별과 편견을 받거나 배경으로 인한 넘을 수 없는 한계를 느낀 적이 있다면 이야기해 줄 수 있어?

-

J : 이런 질문들 생각보다 자주 받아.

하지만 뚜렷이 차별을 받았다고 느껴지는 경험은 딱히 없는 거 같더라. 이 곳은 다문화가 잘 정착되어있는 곳 멜버른이기도 하고 내가 다닌 대기업들은 아무래도 다국적 기업들인지라 다양한 인종이 섞여있는 것이 자연스러웠어. 오히려 다양성을 지향하고 다문화스러움(multiculturalism)을 장려하는 사내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지. 인종이나 배경에 상관없이 업무를 처리하는 능력으로 평가받고 그만큼 대우도 해주는 곳들이었던 것 같아. 편견을 느낄 때는 역설적으로 내가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더 열심히 하는 HARD WORKER이고 스마트할 거라고 라는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받을 때였는데 그 편견이 나에게 좋게 작용한 경우가 오히려 많았어.


하지만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도 여성이기 때문에 부딪혀야하는 유리천장을 경험했던 적이 있더라고. 회사에서 Manager로 진급을 준비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던 어느 해에 회사 측에서 경기도 안 좋고, HR 인사관리체제를 바꿨다며 Mid-year (중간 결산시즌) 때 진급을 없애고 이젠 일 년에 한 번 진급을 시킨다고 통보를 내렸었어. 난 그때 조기 진급을 목적으로 Mid-year 인사이동을 목표하고 있었는데 이 통보로 인해 많이 실망했었던 기억이 나. 왜냐면 그 당시 나는 Manager들이 하는 업무들을 이미 인수인계받아서 하고 있었거든.  (내가 다니던 회사에선, 다음 직급으로 진급을 하려면 내가 현재 갖고 있는 직급일은 당연히 완벽하게 잘 하면서 그다음 위 직급의 일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보여줘야 진급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었어.) 그런데 생뚱맞게도 Mid-year때 어떤 백인 남자동료 한 명이 Manager로 진급이 된 거야! 알고 봤더니 이 남자 동료는 예외적으로 어떤 먼 개발도상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로 1년 동안 발령받는 조건으로 Manager로 진급이 된 거야. 그때 너무 어처구니없고 열 받아서 직장상사 몇 명한테 어떻게 된 일이냐고 , 왜 나한텐 거기로 잠시 갈 의향이 있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는지  따지듯이 물었던 기억이 나. 하는 말이 여자인 나한텐 발령받아야 할 나라가 너무 낙후되고 위험한 곳이고 또 내가 그때 결혼도 앞두고 있었던 때라 내가 당연히 No라고 할거 같아 회사 측에서 아예 물어보지도 않았던 거래. 그래, 그 때 회사 측에서 물어봤어도 아마 거절했을 거 같기는 하지만 일단 내 의향을 물어도 보지 않았다는 자체가 너무 불공평하고 억울하다는 느낌을 받았었어.

다행히 이 이후로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런 유리천장을 느꼈던 일은 없었던 것 같아.



-

A : 험난한 조기유학과 대학생활이라는 적응기간 동안 성인으로서 제 몫을 해나갈 훈련을 충분히 받은 너는 호주 사회에서도 똑 부러지게 한걸음 한걸음 나아갔구나. 19살의 어린, 컵라면 먹는 것조차 눈치를 보던 제니가 이렇게 성장해서 멋진 회계사, 한 아이의 엄마가 됐다니 왠지 뭉클해진다. 지금은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있니?

-

J : Deloitte에 일할 때는 너무 즐겁고 개인적, 업무적으로도 성취감이 높았어. 하지만, 한편으론 하루에 어떨 때는 16시간씩, 거의 자는 시간 빼고는 일만 했을 만큼 work & life balance가 없다는 단점이 있었지. 일도 일대로 많았지만, 그 분야에서 잘한다는 사람들만 모인다는 대기업이다 보니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좀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아. 어느 순간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가는 게 스스로도 느껴지더라. 그러다 보니 삶의 균형, - 요새 흔히 말하는 워라밸 (work & life balance)을 많이 갈구하게 되었어.  시간이 있어야 내게 중요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시간과 정성을 쏟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정말 많은 고민 끝에 스스로 미친 듯이 굴리던 다람쥐 쳇바퀴에서 뛰쳐나왔어. 나와는 애증 관계였던 대형 회계 법인들을 뒤로하고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교육계로 진로를 바꿨어. 역시나 이것도 Deloitte에서 같이 일했던 직장 상사의 추천을 받아서 진행하게 되었지. 멜버른의 공립학교 중에 명성과 인지도가 좋은 한 학교의 Business Manager로 나는 이직을 하였고 지금까지 아주 즐기면서 일을 하고 있어. 내가 하는 일은 학교의 리더쉽팀의 일원으로 학교의 재정 전반을 총괄하는 일을 하고 있어. 직장이 학교이다 보니 방학이라는 휴가도 주어지고 이젠 일은 직장에서만 하고 집에 오면 그 시간들은 온전히 가족들한테 쏟을 수가 있어서 너무 행복해.  


-

A : 우리 나이가 그래서 그런지 ‘워킹맘으로서의 삶’이 화두가 많이 되잖아. 나는 2세 계획은 딱히 없지만 양성평등과 교육시스템 등에 관심이 조금 있는 편이라 늘 궁금했어. 사실 이제 육아 9개월 차인 너에게 이런 질문은 좀 이른 감은 있지만. 그래도 호주에서 워킹맘으로 사는 것은 어떤 것 같아?

-

J : 한국에 워킹맘인 친구들도 있고, 또 한국에서 방송된 육아전쟁을 하며 일을 하는 맞벌이 부부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도 봤어. 한국의 사정이 어떤지 사실은 잘 몰라. 하지만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해 봤을 때 나는 불평할 것이 없을 정도로 운이 꽤 따랐다고 생각하기는 해. 어릴 때는 몰랐는데 이 회계라는 직업이 선택의 폭도 넓어서 시기에 맞게 이직을 잘했고 운 좋게도 상사 복도 좀 있는 것 같더라고. 임신하고 또 지금은 엄마가 되고 나서 일하는 곳이 학교인지라 방학마다 쉴 수 있어서 일단 좋아. 또 직장상사도 같은 여성이라 더 이해심도 많은 거 같아. 이 것은 비단 내가 있는 곳이 호주라서 그런 것은 아닐 거야. 한국에서도 여자들이 출산과 육아를 하면서도 다니기 좋은 직장들이 있고 좋은 보스들이 있잖아. 나도 운 좋게 그런 곳을 고른 거야.

실은 내가 좀 일 욕심이 많은 편이거든. 그래서 아기 낳고 8개월 정도 후에 직장에 복귀했어. 사실 1년 동안 쉴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예전에 대기업에서 미친 듯이 일만 하던 게 몸에 베여서 그런지, 출산 후에 갑자기 집에서 육아만 하고 지내려니 너무 적응이 안되더라고. 몸이 근질근질한 게 자꾸 일이 하고 싶어 지는 거야. 그래서 일찍 복귀했더니 직장에선 오히려, 일도 중요하지만 가족과의 시간이 더 중요하고, 또 무엇보다 애기가 어릴 때는 최대한 부모가 옆에 있어야 한다고 천천히 일 시작해도 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지금은 일주일에 3일만 일하는 파트타임 워킹맘으로 살고 있어.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정말 거의 제로인 거 같아. 오히려 내가 일 욕심이 많아서 풀타임으로 일하고 싶은 욕구를 자제하는 게 큰 문제야.



-

A : 한국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게 한국 교육의 시스템이라는 쳇바퀴를 열심히 돌다가 호주에서 조기유학이라는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었고 지금은 어엿한 성인이 되어 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가 된 네가 생각했을 때 한국의 교육시스템은 어떤 것 같아? 호주와 비교해서.

-

J : 앨리스 너한테 이 질문을 받고 곰곰이 생각을 해봤어.

초. 중. 고를 한국에서 마친 내가 느낀 한국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 입시위주의 암기력을 중점으로 테스트하는 시스템인 거 같아. 내가 직장으로 다니는 곳이 학교라고 했잖아. 작년에 우리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학생이 마침 또 한국 학생이라 이 질문을 그 친구한테도 해봤어. 이 똑 부러 지는 친구도 하는 말이 내 생각과 많이 비슷하더라. 호주의 교육시스템은 학생의 관심사가 넓으면 넓은대로 좁으면 좁은대로 존중하고 배우고 싶은 과목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학생의 자유를 보장해준다는 거야. 학교가 단순히 대학 진학을 위한 준비단계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정말 자신이 관심 있는 무언가를 배울 수 있게 하려 한다는 점이 한국과 달라.

한국과 호주의 사회적인 분위기가 다른데서 오는 점도 크겠지만, 호주의 교육시스템은 진로를 결정하는데 자신의 의사가 가장 크게 작용하고 또 그 결정을 바탕으로 결과를 내는데도 자기 주도적이라는 점이라는데 우리의 의견은 일치했어. 그래서인지 호주의 학생들은 대학교의 이름/타이틀보다도 학과 선택에 더 중점을 두는 것 같아.  반면에 우리나라는 아직 내가 무슨 전공을 하고 싶은가 보다 어디 대학교의 타이틀을 따는지를 더 중요히 여기는 거 같아. 호주에 오기 전 어린 나도 내가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보다는 어느 학교를 가고 싶은지가 우선 이었고 지금 한국의 학생들도 그때의 나와 많이 다른 것 같지 않다는 게 안타까워.



-
A : 제니 네가 이민을 후회했던 순간이 있다면?

-

J : 많은 이민자들이 그럴 거야. 뻔한 대답이겠지만 아무래도 가족들과의 추억이 많이 없다고 느껴질 때인 거 같아. 한국에 있었을 땐 난 계속 학생 신분이었으니 그냥 학교 - 학원 - 집이라는 코스 밟기에 바빴고, 또 그동안 부모님은 열심히 일하신다고 바쁘셨고. 좀 커서는 여기로 유학을 와버렸으니 딱히 가족들과의 추억이 없는 거 같아 많이 아쉬워. 아무래도 한국에 있었으면 더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었을 테니까.



-

A : 반대로 네가 한국을 떠나 호주에 살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들은 어떨 때니?

-

J : 이 것 또한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한국의 가족들 때문에 이민이 후회스럽기도 하고 또 이 곳의 가족들 때문에 나는 이민을 왔던 순간을 감사해. 이 곳에 오지 않았다면 만날 수 없었을 나의 가족. 사랑하는 남편, 또 그 결실로 맺은 우리 딸 소피아!

그렇게 바쁘고 치열하게 일과 공부만 병행하며 개인 시간은 거의 없이 살았을 때 곁에서 많이 힘이 되어주고 나를 응원해준 전 남자 친구이자 현 남편인 IAN에게 고마운 마음이 많이 들어. 현명하고 성숙한 조력자를 만난 덕분에 나는 흔들림 없이 내가 걸어가야 하는 길을 똑바로 걸어갈 수 있었어. 나와 같은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연애부터 결혼, 그리고 우리의 사랑하는 딸 소피아가 탄생하기까지 정말 치열한 적응기를 거쳤고 그로 인해 나 자신이 한 사람으로서 크게 성장하였고 삶이 정서적으로 더 풍요로워진 것 같아. 정말이지 말이야. 혼자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멜버른 공항에 뚝떨어졌던 그 어린 유학생 시절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이제는 생후 9개월 딸을 가진 워킹맘이자 회계사로서 여기서 살고 있다는 것이 아직도 너무 신기하면서 감사해.



-

A : 너의 이야기 정말 잘 들었어. 헬조선이라 탈조선이 아니고 국제화 시대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이동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는 너의 관점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졌는지 이제 조금 이해할 거 같아.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환경이 비슷해도 서로를 이해하는 게 쉽지가 않잖아. 글이라는 것이, 진짜 생각을 주고받는다는 것이 참 오묘한 것 같아. 배경도 살아온 과정도 하나 겹치는 게 없는 너라는 얘를 이제 알았는데도 깊은 동질감이 느껴진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사를 나누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친구가 됐으면 좋겠어!

끝으로, 이 글을 읽고 있는 한국의 청년들, 이민을 꿈꾸거나 혹은 한 번쯤 생각해보는 친구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해줄 수 있어?

-

J :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종종하지 – ‘여기서 못 하는데 다른 곳에 가면 잘할 리가 있냐?’고.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해


Hell Yeah!

당연하지,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데!  


좀 생뚱맞은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 같아. 난 한국에서의 환경보다 여기 호주에서의 환경이 더 나한테 맞았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값진 경험들을 많이 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어. 우리의 전 세대만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정해진 룰을 따르며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고 살았잖아. 사회가 정의 내린 ‘성공과 행복의 공식’을 따라가려고 아등바등 살아가고 낙오자가 될까 봐 전 전긍 등 하고 살았어.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가진 선택의 폭이 훨씬 넓어졌다고 생각해. 인터넷이 가져다준 디지털 세상으을 통해 우리는 더 폭넓은 지식, 정보들을 습득할 수 있게 되었고 급격한 글로벌 사회로 전환되면서 세계는 정말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졌어. 기회라는 것은 꼭 한국이라는 땅 안에 국한되어 있지 않으니까 너무 똑똑하고 성실한 한국의 청년들이 더 넓은 세상을 겁먹지 말고 용감하게 밟아봤으면 해.

나는 언제나 해외에 정착한 ‘선배(?)’로써 우리나라의 청년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거든. 주제넘다고 생각할지도 몰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선배들의 힘이 모이면 쓸만한 동력이 될 수도 있잖아. 그래서 앨리스와의 인터뷰도 즐겁게 응했어. 이 외에도 우리 한국 유학생들을 돕기 위해 한국 외교부 소속의 멜버른 영사관에서 주관하는 청년 멘토링 사업에 초청받았을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 있다는 사실에 참 기뻤어.  호주에서 회계사가 되고 싶어 하는 젊은 유학생들과 얼굴을 맞대고 궁금한 점들을 대답해주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어서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





멜버른의 한국 유학생들을 위한 멘토링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인연이 닿은 (얼마 전 이임하신) 호주 멜버른의 총영사님과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어.  

좁은 우리나라에서 박 터지게 경쟁하고 있는 그 우수한 인력과 나처럼 해외에 먼저 나와서 정착한 이민자들을 서로 연결해서 비즈니스를 함께 하게 한다던지, 혹은 필드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선배들이 제공해서 그들이 여기서 자리 잡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단체나 기관이 있냐는 나의 질문에 열심히 대답해주셨던 그 말이 나는 아직도 가슴에 남아.

안타깝게도 예전에는 우리 한국인들 중에 남 잘되는 거 보면 배 아파하는 안 좋은 습성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특유의 경쟁심도 엄청나기 때문에 그런 사업들을 시도해도 계속 엎어진다는 거야. 서로 끌어주고 도와줘서 우리 손에 있는 파이를 더 크게 키우고 그걸 다 같이 나눠먹으면서 잘되는 거 보다는, 크기가 이미 정해져 있는 파이를 본인이 남들보다 더 많이 먹으려는데 관심이 많다는 거지. 한마디로 판을 벌여놓으면 애꿎게도 한국 사람끼리 경쟁심을 발휘한다는 거야. 반면 우리 가까운 이웃인 중국인들은 이런 면에서 배울 점이 많대. 해외에 나와서 사는 중국인들은 자기네들끼리 똘똘 뭉쳐서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경제적으론 물론이고 정치적으로까지 영향을 미치는 힘을 가진다고.

멜버른에서 15년 넘게 살면서 멜버른 시티를 돌아보면 한 해가 다르게 중국인이 운영하는 가게/비즈니스가 점차 눈이 띄게 늘어가고 규모도 점점 커가는 걸 느껴. 그걸 보면서 나는 이제는 우리 한국인들도 저렇게 서로 도와가면서 영역을 넓혀갈 순 없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


폭풍 같은 유학과 대형 회계 법인 시절을 이겨내고 ‘워라밸’이라는 여유를 얻고 나니 이젠 조금 의미 있는 일에 눈을 돌리게 되더라. 나중에 기회가 되고 인연이 된다면 내가 가진 회계/경영 지식, 현지 경험과 우리 한국 청년들의 기술, 열정을 합쳐서 시너지를 내고 윈윈 할 수 있는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를 하는 것도 좋고 나의 경력과 지식을 더 높은 곳에서 더 많은 돈을 버는 곳에 쓰는 것도 좋지만 사실 나의 꿈은 그게 아니거든. 내 조국의 청년들이 여기 멜버른에서 새 삶의 터전을 일구고 인생의 기회를 만드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으로 내가 가진 작은 자본과 노하우들을 ‘투자’를 하고 싶어. 그게 훨씬 더 가치 있고 마음 설레는 일이니까.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은 영향이 되고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열심히 궁리해보고 연구해보고 있는 중이야.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어.


 Y O L O (You Only Live Once)


미디어와 기업에서 소비를 부추기는 마법의 문장으로 너무 많이 써먹어서 의미가 많이 퇴색됐지만 이 말은 여전히 진리야. 우리는 한번밖에 못살잖아. 단 한 번뿐인 인생, 기회가 오는 것을 놓치지 말고 기회가 오지 않는 다면 스스로 만들어서 원하는 삶을 만들어갔으면 좋겠어. 누구를 위하거나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보다 자신이 만족하고 부끄럽지 않은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내가 걸어온 비슷한 길을 걸어오고 있거나 같은 길을 가고 싶은 더 많은 청년들에게 나의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야.

내 Facebook에 등록된 이름은 Jennie Kim-Ross야!

혹시라도 나랑 소통하고 싶은 청년들이 있다면 언제든 환영이야.

긴 내 이야기 잘 들어줘서 고마워 :-) 만나서 반가웠어!





놀러와! :-)


제니 (페이스북)  :   Jennie Kim-Ross

앨리스 (인스타)   :   ALICEINMELBOURNE

수다 (인스타) :  SUDAMELBOURNE  (앨리스 팀 첫 번째 레스토랑)

네모 (인스타): NEMOMELBOURNE (앨리스 팀 두 번째 레스토랑)


*답글은 원래 하던 대로 반말로 주고받으면 더 좋을 거 같아!! 나도 그게 편하고, 언니 거나 오빠 거나 친구 거나 동생일 너도 그게 편할 거야, 하다 보면!! 물론 존대가 편하면 그렇게 소통해도 좋아 :-)


**호주 이민 생활 중이거나, 호주에서 이민 과정을 밟고 있는 동료들 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이민을 생각하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조언들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부담 없이 댓글이나 인스타 디렉트 메시지를 줘! 꼭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일 필요도 없어. 지금 이민의 과정을 밟으면서 느끼는 고충과 어려움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민에 대한 좋은 점과 후회되는 점도 가감 없이 나누고 싶은 동료들의 참여 기다릴게!


***출처를 밝힌 공유는 언제나 환영이야!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돼 :-)



이전 08화 국제결혼과 이민, 그리고 편견에 대하여 by 레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