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멜버른앨리스 Feb 01. 2018

어떤 파티시에의 이민 이야기 by 안나

 파티시에로 호주와 한국에서 사는 이야기



오늘 너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나의 동료 호주 이민자의 이름은 안나야. 


한국에서는 김안나, 호주에서는 애나 킴.

안나와 나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많아. 언제나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평행선을 걷는 듯한 선택을 하더라구. 신기하게도.


유학으로 이민의 첫걸음을 디딘 것은 비슷하지만 나는 쿠커리(요리) 출신이고, 안나는 파티셰리(디저트 전문 셰프) 출신이야. 나는 워홀부터 시작했지만, 안나는 유학부터 시작했지. 나에게 멜버른이 베이스캠프라면 안나는 시드니에 적을 두고 있어. 둘 다 고용주 보증 / 후원 스폰서 비자로 영주권을 취득했다는 사실은 비슷하지만 나는 대도시에 있는 정부 인증 업체의 고용주에게 최소 2년간 근무를 하는 조건으로 받는 ENS를 통해 이민을 하였고, 안나는 RSMS라고 하는 주정부 후원 (호주의 저밀도 지역에 있는 이민성의 승인을 받은 업체들이 해외의 숙련된 기술자들에게 영주권을 주는 비자)으로 이민을 하였어. 

많은 요리사와 파티시에가 그렇듯이, 꼭 본인의 가게를 하고 싶다는 같은 꿈이 있었던 나와 안나는 결국에는 꿈을 이뤘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또 평행선처럼 달라. 왜냐면 나는 이민을 온 나라에서 현지인들에게 한국의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을 차렸지만, 안나는 완전히 반대로 호주식의 디저트와 브런치를 한국에 소개하는 브런치 카페를 오픈하였거든. 


여름 바람처럼 청량한 안나를 꼭 닮은 경리단길의 SUMMER LANE. 

여름의 골목이 바로 그곳이야.




경리단길에 있는 안나의 브런치 카페, 써머레인



안나를 처음 만난 건, 내가 크라운 호텔에서 근무할 때였어.

나는 호텔의 조식 파트 책임자였고, 안나는 호텔 레스토랑 디저트바에서 세컨 인 차지 (두 번째 책임자)였지. 20대 중후반의 나이의 앳된 셰프가 그 직책으로 온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한국 여자라는 말에 나는 너무 반갑고 또 자랑스러웠어. 사실 파트가 달라서 직접적 업무의 연관은 없었지만, 오래간만에 한국인을 보니 너무 반가운 나머지 안나를 보자마자 덥석 데이트 신청을 했었지. 낯을 가리는 내 성격에는 꽤 파격적인 일이었어.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안나는 내가 만난 어떤 사람보다 이중적이었어. 그게 나한테는 참 매력적이었던 것 같아. 키친에서의 안나를 볼 때면 그렇게 시원시원하고 터프할 수가 없거든. 호탕하게 웃고, 그렇게 작아 보이지도 않아. 그런데 밖에서 약속을 잡고 만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인 거야. 멀리서 다가오는 안나를 보면 쟤가 저렇게 마르고 작았어?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아담한 체구에 하늘한 원피스, 나한테 줄 꽃을 들고, 밥도 예쁘게, 말도 예쁘게 조곤조곤. 아까 키친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얘가 얘 맞아? 싶은 적이 참 많았어. 

안나를 보며 나는 참 많은 생각을 했었지. 이렇게 천성이 착하고 여린 아이가 저 위치까지 올라가려면 얼마나 독했어야 할까,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했을까. 


내가 꼭 들려주고 싶었던, 사랑하는 동생이자 존경하는 동료인 안나의 이야기를 나눠볼게, 오늘은.

안나라는 파티시에가 유학부터 직장생활, 이민 과정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을 호주에서 보내면서 어떻게 원하는 것들을 얻어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나눠볼 거야. 사실 수많은 이민자들을 만나보았지만 안나의 케이스는 독보적으로 두드러진 경우거든. 영어면 영어, 학력이면 학력, 커리어면 커리어, 이민이면 이민, 정말 하나 빈틈이 없이 원하는 것을 모두 이뤄냈어. 그것도 모자라서 고국으로 돌아가서 호주에서 얻은 것들을 멋있게 써먹고 있잖아. 한국에서 호주식 브런치와 디저트, 커피를 파는 작은 카페를 차리겠다는 그 꿈을 결국에 이뤄낸 것을 보면 멋있다고 해야 할지 무섭다고 해야 할지.


안나와의 인터뷰를 시작해볼게.

파티시에로의 진로, 이민, 혹은 해외취업에 관심이 있는 친구라면 오늘 이야기는 꼭 들어줘. 

더 궁금한 것이 있다면 안나의 SUMMER LANE의 인스타, 혹은 방문을 통해 안나에게 조언을 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다정하고 예쁜 안나는 너를 바쁘더라도 너를 반겨줄 테니까!.






-

A (ALICE) : 안녕 안나! 반가워. 

우리 이렇게 지구 반대편에서 랜선으로 대화하고 있지만, 사실 나 너 너무 보고 싶어. ㅠ

일단 자기소개 먼저 해줄래?

-

A.K (ANNA KIM) : 안녕, 나는 안나라고 해. 

나는 디저트를 전문으로 하는 셰프인 파티시에야. 

시드니에 있는 '르 꼬르동 블루'에서 파티셰리를 전공을 했어. 

딱히 처음부터 계획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까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호주 안에서는 시드니, 멜버른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밀턴 아일랜드에서 셰프 생활을 하였고 시민권을 취득한 후 올해 초에 한국에 들어왔어. 한국에서는 짧은 휴식 후에 호주에서 모아놓은 돈을 탈탈 털어서 친구와 동업으로  SUMMER LANE이라는 브런치 카페를 오픈했고 이제 7개월이 지났어. 지금은 써머레인이 있는 이태원 경리단길에서 중구난방으로 열심히 뛰어다니며 그냥 파티셰가 아닌 생초짜 오너 파티셰로써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야.



-

A : 얼마 전에 멜버른에도 르 꼬르동 블루(이하 LCB) 분원이 생긴 거 알고 있어? 하지만 우리가 유학할 시절에 호주에서 LCB에 가려면 시드니 밖에 선택지가 없었지. 개인적으로 요리 유학은 전략적으로 학교를 신중히 고르는 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너는 특별히 LCB를 택한 이유가 있니? LCB를 선택한 것이 어떤 작용을 했다고 생각해?


A.K : 요리 유학 전에 나는 태국 치앙마이 대학교에서 관광경영학위 취득을 마친 후였어. 요식 관광업 계열 안에서 전공을 전환한 케이스야. 호텔리어에서 파티시에로. 그때의 나는 두 군데에서의 요리 유학을 알아봤어. LCBd와 CIA. 요리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가장 높은 두 곳이잖아. 기왕 하려면 좋은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고 싶었지. CIA는 미국에 있었는데 나는 미국은 별로 가고 싶지가 않았어. 마침 호주에 친척분들이 계시기도 했고 치안이나 환경적인 면에서 나는 호주가 더 마음에 들었어. 그런 이유로 LCB를 최종 선택한 거야.


르꼬르동 블루의 파티셔리 디플로마를 취득한 안나



LCB는 여러 면으로 유명한 학교야. 커리큘럼이 빡세고, 학비가 비싸고 전통을 중시하며 엄격한 곳이지.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는 사실이기도 해. 기본을 중시하는 엄격한 분위기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어. 파티시에로서의 걸음마부터 성인기까지 정석으로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곳이기 때문에 나는 LCB에서 유학을 한 것을 개인적으로는 절대 후회하지 않아.  

하지만 이것은 지금 돌아보는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이고,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어. 학비가 부담스럽다 보니 재정적인 면에서 지원해주시는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컸고 빡빡한 학교 스케줄을 따라가다 보니 필드에서 일하면서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부족하게 느껴졌어. 그래서 진로를 묻는 후배들에게 굳이 LCB를 추천하진 않아. 학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필드에서 일하면서 내가 절실히 느낀 것이 있다면 이거거든. 


유명한 학교를 나왔다고 좋은 셰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학위가 없이도 필드를 전전하며 내공을 쌓은 고수들도 많고, 상대적으로 학비가 저렴하고 코스가 덜 힘든 학교를 다니면서 일터에서 요리를 배우는데 집중한 경우에 더 큰 빛을 발하는 경우도 많아. 요즘은 합리적인 가격에 커리큘럼이 괜찮은 학교도 많더라. 무조건 유명하고 있어 보이는 학교보다는 본인의 상황에 맞춰서 '본인에게 좋은 학교'를 신중하게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 



-

A : 그래, 그때 한동안 내 이름은 김삼순 이후로 LCB라는 이름이 한국에 엄청 유명해졌었잖아. 나도 그 악명은 익히 들었었어. 학비 비싸고 커리큘럼이 빡세기로 유명하다는! 그런 학교를 다니면서 일까지 병행하기 어렵지 않았어?

-

A.K : 호주에서 학생비자를 가진 유학생이 학기 중에 합법적으로 일할수 있는 시간은 20시간이야.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운이 좋게도 Rockpool Bar & Grill이라는 유명한 셰프 닐 페리의 한 레스토랑에서 일주일이 한번 토요일에 15시간을 일을 할 수 있었어. 사실 지금은 워낙 인이 배겨서 그런지 키친에서 하루에 15시간 일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인데 그때는  일주일에 한 번이었지만 정말 너무 힘들었어.  키친이라는 특수한 환경에 적응하기 전이라서 그랬나 봐. 



-

A : 와, 셰프 닐 페리의 레스토랑에서 학생 때 일을 했다고?  Rockpool Bar & Grill 이면 (지금은 많이 캐주얼 해졌지만) 시드니에서도 손꼽히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었잖아. 학생 신분으로 경력도 없었으면서 어떻게 그런 곳에서 일을 구할 수 있었어?

-

A.K : 나도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하지만 정말 그때는 너무 절실하게 그곳에서 일하고 싶었던 거 있지. 그런데 이력서를 직접 들고 가서 사람을 대면한다는 게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더라. 그래서 보통은 이메일로 이력서를 내는데, 내가 뭐 화려한 이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메일을 셰프가 열어보지도 않을 것 같더라.

처음 레스토랑 문 앞에 섰을 때 왜 그리도 나 자신이 작게 느껴졌는지 몰라.

지금 이었다면 더 주춤 했겠지만 학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그때의 나는 열정만큼은 누구한테도 지지 않았어. 그래서 두 주먹 불끈 쥐고 눈 딱 감고 들어갔지. 리셉션에 있던 호스트가 무슨 일이냐고 묻길래, 셰프한테 이력서와 내가 만든 오페라 케이크를 전달해줬으면 한다고 했어.


그래, 아무런 경력도 없는 유학생인 나는 레쥬메만로는 일을 구하기 힘들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학교에서 배웠던 케이크를 집에서 정성스레 만들어서 들고 간 거야. 무모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는 앞뒤 상황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덤벼들었던 것 같아.


어머, 너 케이크도 직접 만들어 온 거야? 멋지다


하고 웃던 호스트는 잘 전달해주겠다고 행운을 빈다고 말해줬어.

얼마 후, 나는 Volunteer(무급)로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메일을 받았고 온방 안을 방방 뛰어다녔던 기억이 나.

그때의 나는 수업이 없던 이틀은 케이크 공장에서 새벽 4시부터 오후까지 일을 하고 바로 레스토랑에 가서 일을 배웠어. 비록 무급으로 일해도 내가 일하고 싶었던 곳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했어.

왔다갔다 하면서 이 레스토랑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난 언제쯤 이런 멋진 곳에서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며 꿈을 키우곤 했거든. 그렇게 꿈에만 그리던 곳에서 일을 하게 된 거야. 비록 무급이지만 상관없었어!



-

A : 요리 유학 신입생이 집에서 케이크를 만들어서 닐 페리한테 전해주라 그랬다고? 와 진짜 너 내 생각보다 훨씬 또라이구나. 좋은 의미로 너무 멋있는 또라이다. 나도 진짜 무모하게 들이대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너한테는 명함도 못 내밀겠다. 그래, 너도 처음에는 볼런티어로 들어간 거였구나! 그래서 그다음에는 쭉쭉 그곳에서 일을 배우고 성장한 거야?

-

A.K : 말했다시피, 그때의 나는 무모하리만큼 긍정적 이서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도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기쁨에 항상 웃으면서 일을 했어. 내가 너무 웃고 다니니까 셰프들이 Happy라고 불렀을 만큼 난 밝게 일을 했었지. 지금까지 연락하는 친구들도 날 안나가 아닌 해피라고 부를 정도니까.

뭘 시켜놓으면 콧노래를 혼자 부르면서 하던 내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얜 뭐야, 뭔데 이렇게까지 긍정적이지’ 하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

무급으로 일한 지 2달이 지난 후 나는 셰프에게 파트타임으로 정식으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어. 예상했겠지만 내 대답은 당연히 YES였지. 정말이냐고 몇 번을 묻고 감사하다고도 몇 번을 말했어. 그렇게 학교를 다니면서 일주일에 하루를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15시간씩 일을 했어.

그런데 정식으로 근무를 하게 되면서 상황이 변하더라. 내 위치는 더 이상은 가르쳐야 하는 수습생이 아닌 동료 중 한 명이 된 거잖아. 동료들의 기대치도 틀려지고 갑자기 일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지는 거야. 거기다가 일주일에 하루만 하루 종일 일을 하다 보니까 일이 손에 익지도 않는 느낌이었어. 무급 인턴일 때는 내가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매일 실수 연발에 노력을 한다고 하는데 나아지진 않았고, 실수를 하면 주눅이 들어 더 실수를 하는 사태를 일으켰지. 뫼비우스의 띠라는 게 이런 건가 싶더라. 수렁에 빠진 것만 같았어. 


출처 : http://www.rockpoolbarandgrill.com.au/sydney/functions/


-

A : 그래, 나도 처음에 정식으로 일하게 된 날 손을 숭덩 베어 먹기도 하고, 허둥대느라 영어는 더 안 들리고 실수에 실수 꼬리를 물었던 기억이 나. 울기도 많이 울고 술도 참 많이 먹었지. 나는 술로 이겨냈던 것 같은데, 너는 어떻게 그 시간들을 버텨냈니?

-

A.K : 그때는 정말 미칠 것 같았어. 자괴감이 너무 많이 들었거든. 

무력감에 빠질 뻔했던 나를 일으켜 준 것은 나의 사수이자 선배였던 한국인 언니 두 명이었어. 지금은 정말 친언니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됐지만 그때는 정말 매일 혼나기만 했었어. 내가 미워서 혼내는 것이 아니고 기본을 가르치기 위해 애정을 쏟는다는 것을 아니까 원망은 커녕 그저 죄송스럽기만 했던 기억이 나. 

매일 눈물이 빠지게 혼나면서도 돌아서면 금방 헤헤 웃으면서 언니들에게 다가가는 나에게 언니들은 너 같은 얘는 처음 본다며 혀를 내두르면서도 정말 많은 것을 성심을 다해서 가르쳐주었어.

사회생활 처음 시작한 답도 없던 나의 손을 잡고 끌어 여기까지 성장시켜준 첫 번째 공신은 그때 같이 일했던 언니들이었어.

시간이 지나고 난 졸업을 했고, 졸업 후에는 풀타임으로 일하게 됐어.

언니들 덕분에 점점 나아진 나는 바쁜 토요일 저녁 서비스에 Pass까지 맡게 됐어. 아침에 가서 누가 어떤 일을 할지 일 분배를 하고 혹시나 디저트가 모자랄까 노심초사 뛰어다니면서 일을 했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정신없이 배우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실력이 향상돼서 눈을 떠보니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더라고.


2년간 내가 Rockpool Bar & Grill 에서 근무하며 얻은 건

첫 번째로 내 인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사람들,

두 번째로는 눈에 띄게 성장한 실력의 가지게 된 나였어.


정식으로 파티시에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된 나는 앞만 보고 2년을 달린 곳, 시드니를 뒤로 하고 멜버른으로 지역을 옮기게 됐어.



-

A : 그래, 네가 멜버른으로 지역을 옮기고 난 후 처음 일하게 된 곳에서 내가 너를 만났지. 크라운 호텔의 한 레스토랑에서 조식 파트 담당자와 파티시에 세컨 인 차지 (두 번째 책임자)로 너를 만난 날을 나도 아직도 기억해. 멜버른으로 지역을 이동하고 나서 일하게 된 곳에 대해서 이야기해줄래?

-

A.K : 그래, 여기지.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

정말 다행히도 나는 멜버른에 온 지 2주도 안되었을 때 크라운 카지노에 파티시에로 들어가게 되었어. 그동안 쌓아왔던 경력이 빛을 발휘해서 바로 취직도 되고 연봉도 훌쩍 뛴 상태였어. 내가 일하게 된 곳은 카지노 호텔 안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디저트 바가 있는 곳이었어. 디저트 바가 있는 곳은 지금도 흔치 않거든. 그래서 난 여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어.

학교 과제에서 내가 비즈니스를 연다면 디저트 바를 열고 싶다고 써냈었는데 내가 그런 곳에서 일하게 되다니!


게다가 같이 일하게 된 셰프들도 성격도 좋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라 더 좋았지. 그렇지만, 직급이 올라간 만큼 새로운 직장에서의 내 책임은 더 커져있었어. 해드 셰프가 없을 때에는 책임지고 모든 프렙을 확인하고 다른 셰프들 관리도 하게 됐지. 디저트 바가 있는 만큼 디저트 섹션이 차지하는 공간이 넓었고 디저트 바로 유명한 레스토랑이었어. 사람들이 디저트 바 때문에 오려고 예약을 했던 곳이니까.

디저트 바에서는 손님들이 앞에 앉아있고, 셰프들이 디저트를 플레이팅 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이었어. 

셰프들과의 수다는 덤이었지. 다른 곳에서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디저트 바에서는 많은 고객들과 얘기를 나누며 일을 할 수 있었어. 사실 나는 말이 많은 편도 아니고 내성적인 편인데 처음엔 이런 시스템이 좀 힘들기도 했어. 손님들과 얘기를 하면서 디저트를 만들고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


그래도 이렇게 손님들과 소통하면서 일을 하다 보니까 더 소중한 시간이었어.

손님들은 그동안 궁금했던 여러 가지를 물어볼 수 있었고 마치 티브이를 보면서 셰프랑 얘기하는 특이한 경험을 하는 것 같다고 했지. 정말 많은 손님들이 이런 디저트 바에 오게 돼서 너무 기쁘고 셰프들이 직접 일하는 걸 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고 해주셔서 뿌듯한 날들이 많았어.

내가 레스토랑 서비스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야. 모든 디저트가 실수 없이 완벽하게 나가고 손님들이 만족했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 날 나는 기분 좋게 잠들 수 있는 거지.




-

A : 그래, 너 참 힘들게 일했어. 너 일하는 거 보면서, 쟤는 저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에너지가 나올까 궁금했던 생각이 난다. 네가 만들어준 디저트 먹어보고 구경하는 게 참 재미있었는데 말이야. 보면 몇천 명이 일하는 호텔에서도 한국인들은 서로 귀신같이 알아보고 금방 친해지는 것 같아. 나도 보면 내가 재료 주문이나 재고 처리 실수했을 때 다른 파트에 있는 얼굴도 몰랐던 한국 셰프들이 발 벗고 처리해주고 한 경험이 있거든. 그런 거 보면 외국에서 한국인을 조심해 조심해 하지만 결국에는 믿고 기댈 사람은 같은 나라 사람뿐이 없나 싶기도 하고 그래.  한국인이 없는 키친에 네가 들어왔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그 인연으로 내 레스토랑 수다를 같이 오픈하게 된 거잖아.

-

A.K : 크라운에서는 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키친에서 아시안은 나포함 한국인 3명이었어. 앨리스랑은 친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지. 담당하는 파트가 아예 틀리기 때문에 하루에 한두 시간밖에 겹치지 않았지만, 같은 한국인 같은 셰프라는 동질감이 있었어. 그리고 멜버른에 처음 온 나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커피 한잔 할래? 하며 다가오는 앨리스가 정말 반가웠어. 


그러던 중 앨리스가 나에게 퇴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조그만 코리안 레스토랑을 열어보려고 한다고 말했어.

난 운명처럼 ‘나도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됐지. 분명히 지금 일하고 있는 곳보다 페이도 적을 거고 처음 오픈하는 레스토랑이라 힘들걸 뻔히 알면서도 좋은 사람들과 한 번쯤 이런 경험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하게 되었지.

그리고 앨리스는 흔쾌히도 내가 같이 일해줬으면 했다고 말해줬어. 그렇게 난 수다 오픈 멤버가 되었고 수다 디저트 메뉴의 작업을 맡게 되었어. 예상했던 대로, 수다의 오픈 멤버가 된 건 정말 잘 한 일이었고 재밌는 경험이었어. 오픈을 하고 많은 일이 있었는데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우리가 첫 번째로 맡았던 결혼 피로연이었어. 처음 다 같이 팀으로서 맡은 펑션이었는데도 생각보다 훨씬 멋지게 마무리 짓고 나도 웨딩 케이크를 만들어서 뿌듯했고. 그 날을 위해서 몇 날 며칠 동안 같이 고생했던 게 지금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어.

길었던 시간이 아니었는데 보람된 시간을 같이 보내서 그런지 수다에 대한 나의 애착은 참 커.



-

A : 그래, 우리도 네가 같이 처음에 시작해줘서 그런 분위기와 시스템이 잡혔다고 생각하고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네가 비자 문제로 해밀턴 아일랜드로 간다고 했을 때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 욕심이었겠지만 좋은 사람들끼리 놀듯이 일하듯이 그렇게 함께 하는 시간이 정말 좋았거든. 그래, 시드니에 이어 멜버른에서도 정말 많은 일을 경험하고 너는 다른 지역으로 또 다른 도전을 하러 떠났지. 이제 다음 지역에서의 이야기도 들려줘!

-

A.K : 내가 해밀턴 아일랜드로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영주권이었어. 호주에서 벌써 10년이 가까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 곳에서 일하고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고 그러려면 본격적으로 이민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였어. 

물론 비자 외에도 6성급 퀄리아 리조트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여겨졌지. 

서류 심사, 전화 인터뷰를 통해 채용이 확정되고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 섬은 어떤 곳일까 상상을 해보았어. 호주 내 신혼여행 성지로 불릴 만큼 기막히게 보전된 자연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일은 얼마나 많이 해야 하나, 많이 고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조금은 있었어. 하지만 대부분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은 주 60시간이 기본이었고 나는 이미 그런 패턴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버틸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었지. 그런데, 일을 막상 해보니까 그곳은 내 예상을 뛰어넘게 힘든 곳이더라.


출처 : 호주 관광청 - 해밀턴 아일랜드 공식 홈페이지


내가 퀄리아에서 일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진짜 힘들지 않아? 완전 노예처럼 일한다던데?’ 할 정도였으니까.

내가 일했던 키친 중에서 최악 중의 최악이었어. 환경, 신체적 그리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삼박자로 고루 갖춘 곳이었지. 안 그래도 더운 곳인데 키친은 냉방 시설이 잘 되어있지 않아서 탈수가 오는 일이 많았어. 하루에 물 2L를 마시는 것이 의무였다니까!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11시 넘어서 퇴근, 물론 브레이크 타임과 스태프 밀을 갖는 건 말도 안 되는 곳이었어.

이 리조트에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과 캐주얼 레스토랑이 있는데, 나는 두 레스토랑의 디저트를 다 만들어야 해서 1분 1초도 쉴 새 없이 일해도 항상 시간이 모자랐지. 스타터로 나가는 사워도우는 하루도 빠짐없이 만들고, 다른 레스토랑에 나가는 빵도 내가 다 만들어야 했어. 신선하게 나가는걸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부터 열까지 매일매일 다시 만들어야 했지.


내가 보통 일했던 곳들은 많게는 10명까지 이루어진 파티시에 팀이 있었고 일을 분담하였어. 그에 반해 퀄리아에서는 내가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어. 특히 이 키친에서는 전체 셰프 중의 아시안은 나 혼자였고, 여자도 나포함 2명뿐이었어.

안 그래도 힘든 환경인데 덩치 크고 입 거친 남자들에 치여서 일하는 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힘들었어.


난 여기서 일하면서 내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해.

매일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어도 내 인생 최고 고비라고 생각하며 이것만 지나면 나아질 거야 하면서 최면을 걸곤 했어. 그리고 나 스스로도 여기서 이런 조건들 때문에 포기하면 나중에 너무 후회할 것 같았거든. 정말 이전의 레스토랑 얘기랑은 판이하게 다르지? 나도 쓰면서 너무 나쁜 것만 쓰는 거 아닌가 하는데 이게 다 내가 겪은 일이니까.


그래도 퀄리아에 있으면서 내가 해보지 못했던 큰 펑션(연회)을 치르면서 많은 것을 배웠어. 1년 중의 가장 큰 행사이자 가장 힘든 1주일은 바로 8월에 열리는 요트 경기 “Race Week”였어. 레스토랑에서는 매일 다른 유명한 레스토랑을 초청해서 1주일 내내 펑션을 주최했어. 나도 지금까지 일해 보면서 1주일 내내 다른 메뉴로 200명이 넘는 수를 준비하는 건 처음이었어. 준비를 거의 1달 전부터 했고, 다른 레스토랑이 준비해온 메뉴 구경하는 것도 재미도 있었고 정말 많이 배울 수 있었지. 



출처 : 퀄리아 리조트 홈페이지




그렇게 어느덧 1년이 지나고, 나는 해밀턴 아일랜드 베이커리로 직장을 옮기게 됐어. 내 경력은 대부분 다이닝 레스토랑이었고 한 번도 베이커리에서 일 해 본 적은 없었거든. 그때의 내 꿈은 작은 디저트 카페를 하는 거였는데 그걸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경험이기도 했어. 


그리고 정말 매력적이었던 건, 내 기준에는 이 베이커리가 개선될 점이 너무나도 많은 곳이었어. 이것저것 바꿀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어. 근무시간과 여건도 전에 일하던 퀄리아보다 훨씬 나았어.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나는 나랑 같은 학교 출신에 마음이 따뜻한 남아공 친구 더스티를 만나게 됐어. 

서로 일적으로 손발이 척척 맞기도 했고 더스티가 내가 오고 난 후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해서 배울 것이 많다며 기뻐해 줘서 나도 뿌듯했어. 사실 이 전만 해도 퀄리아에서 너무 힘들어서 그런가 내가 셰프에 잘 안 맞는 걸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더스티와 일 하고 난 뒤에는 그게 아녔구나 생각하게 되었어. 같이 일하는 동료에 따라서 이 일은 내게 맞는다고 느낄 수도 아닐 수도 있구나를 느끼게 된 거야.


그리고 드디어 2017년 1월 26일이 되었어. 1월 26일은 Australia Day로 내가 호주인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한 날이야. 내가 있던 지역에서는 바닷가 옆에서 행사가 열렸는데 정말 호주스럽게 시민권 세리머니를 마쳤어. 처음에 호주 왔을 때는 영주권이 뭔지도 제대로 몰랐었는데 호주 시민권자가 된 내가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어. 그렇게 해밀턴 아일랜드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오게 됐어. 



호주 시민권 세리모니 날의 안나, 해밀턴 아일랜드에서의 동료들과의 안나


-

A : 그래, 그렇게 목표했던 것들을 모두 이루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겠다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네가 얼마나 대견했는지 몰라. 또 놀라기도 했지. 호주에서 유학과 경력 쌓기, 이민까지 쉬지 않고 달린 네가 이번에는 좀 쉴 줄 알았는데 너는 조금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더라. 금방 돌아올 줄 알았던 네가 한국에서 네 가게를 열어보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듣고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고생길을 사서 걷는구나 싶어서 걱정되기도 했어. 성인기를 호주에서 다 보내서 호주가 익숙한 네가 한국에서 가게를 차린 이유는 뭐야?

-

A.K : 원래 계획은 그동안 힘들었으니 좀 쉬는데 집중하려고 했지만 워커홀릭은 어쩔 수 없나 봐. 너도 알다시피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가게를 알아보고 준비를 해서 경리단길에서 SUMMER LANE이라는 브런치 카페를 오픈하게 되었지.

앨리스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내가 한국에서 조금 쉬다가 호주로 당연히 다시 돌아올 거라고 알고 있었고 감사하게도 여러 곳에서 좋은 오퍼를 받았어. 내가 받은 오퍼들은 하나같이 내가 또 다른 성장을 할 수 있는 기회들이었지만 나는 이제는 파티시에로서 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었어. 그리고 그것보다 큰 이유는 가족이었지.  생각해보니 10년 넘게 해외에서 지내서 그런지 성인이 된 후로는 가족들과 함께 지낸 시간이 없더라고.  아마 내가 호주에서 카페를 열었다면 지금처럼 가족들이랑 지내는 시간은 가질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이때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국에 살기로 결심을 했어. 



-

A : 그래, 가족과의 시간은 지나가면 오지 않고 참 소중한 시간이기도 해. 

많은 이민자들의 가장 큰 딜레마이기도 하고. 

네가 10년을 갈고닦은 기술과 열심히 모은 돈을 쏟아부은 너의 썸머레인이 어떤 곳인지 조금 말해줄래?

-

A.K : 음, 이 가게는 나 혼자 운영하는 것은 아니고 동업을 하는 파트너와 함께 하고 있는 곳이야. 해밀턴 아일랜드에서 일하면서 동생과 의기투합을 한 거지. 한국사람도 몇 안 되는 섬에서 여자는 더 손에 꼽을 만큼 없었는데 게다가 같은 업종인 친구여서 정말 많이 친했거든. 나는 디저트를 전공하고 친구는 요리를 해서 밸런스도 딱 맞고, 호주식 브런치 카페를 열고 싶어 하는 것도 의견이 맞아서 같이 동업을 시작했어. 

그렇게 우린 6월 초에 오픈을 하고 이제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보냈어. 우리가 초점을 두고 있는 건 정말 호주 카페처럼 음식, 디저트, 커피를 모두 다루는 하는 카페야. 보통 브런치 카페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정말 브런치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우리는 세 가지 모두 잘 하고 싶어. 얼마 전에 단골 호주인 손님분이 이걸 딱 알아보시곤 우리가 3가지 모두 다 갖추고 있다고 정말 호주 카페에 온 것 같다고 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하고 뿌듯했는지 몰라. 우리가 경리단길에 위치하고 있어서 아무래도 손님들의 80프로는 외국인 분들 이거든. 이 분들은 써머레인에서 내가 호주에서 한식당에 가서 느꼈던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달까.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파블로바나 크리스마스 타르트를 보시곤 너무 반가워하시고 예전에 어머니가 만들어주셨던 맛이라고 극찬 중의 극찬을 해주실 때면 우리가 잘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돼. 써머레인은 내가 그토록 이루고 싶었던 꿈에 다가가는 시작점이야. 꿈은 내가 성장함에 따라 같이 성장해 나가고 나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또 성장을 하는 거지. 이제 카페를 열겠다는 꿈은 이루었으니 써머레인을 잘 이끌어나가는 일이 내 다음 목표가 되었어. 



안나의 써머레인의 브런치를 인터뷰한 중앙일보 기사: '호주식 브런치'는 뭐가 다를까? - http://mnews.joins.com/article/22282800?cloc=flipboardnews




-

A : 앞으로 너의 계획은 그러면 한국에서 계속 사업을 운영하는 거야? 

-

A.K : 6개월 남짓하는 시간을 써머레인에서 보내며 성장하는 걸 볼 때면 수다 생각이 많이 나. 그럴 때면 호주에 있는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받는데, 언제 호주로 다시 들어올 거냐는 질문을 항상 받곤 해. 그렇지만 아직 써머레인은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되었고 성장을 해야 하는 시점이거든.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먼 미래에는 호주에 다시 돌아가는 것도 고려하고 있어. 아무래도 시민권을 취득하고 바로 한국으로 와서 시민권이 있는 삶을 누려보지는 못했거든. 내가 호주에 사는 동안 제일 힘들었던 점은 모두가 그러하듯이 비자 문제였어. 항상 비자 때문에 고생하다가 막상 비자 없이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때가 되니 한국에 돌아온 게 참 아이러니해 나도. 내가 항상 생각했던 게 시민권을 받으면 사람답게 살자는 거였거든, 왜 있잖아 호주인들처럼 일주일에 40시간 일하고 가정을 만들고 주말은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그런 평범한 삶. 난 또 그 새를 못 참고 그 평범한 삶의 꿈을 뒤로 또 미뤄놓게 되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아. 이제는 전처럼 비자 문제에 머리 아프지 않아도 되고 호주는 나의 제2의 고향이 되었으니까. 내가 만약 시민권 취득을 포기하고 돌아왔다면 호주에 돌아갈 수 있는 기회는 없었을 거야. 



-

A : 파티시에라는 기술이 이민이나 해외취업에 어떤 것 같아? 파티시에라는 직업의 장점과 단점은? 

-

A.K : 가장 큰 장점은 전문적인 기술을 가질 수 있다는 거 아닐까. 파티시에라는 직업을 가진다면 정말 어느 나라 어느 레스토랑에 가서든 일할수 있는 기술을 가진 다는 거니까. 

단점은 모두 예상하겠지만 긴 시간 일해야 한다는 점이지. 코스요리 중 디저트는 마지막이니까 우린 어느 누구보다도 늦게 끝난다고 생각해야지. 솔직하게 말하면 아직까지는 셰프에 비해서 파티시에는 일할 기회가 많지는 않아. 디저트에 비중을 많이 두지 않는 레스토랑은 파티시에를 뽑는 대신 셰프들이 디저트를 만들기도 하거든. 반대로 말하면 경험을 좀 쌓은 후에는 반대로 본인이 가고 싶은 곳을 골라서 일할수 있어. 경험 있는 파티시에가 생각보다 많지 않거든. 


-

A : 파티시에라는 직업을 개인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호주 내에서의 전망은 어떻다고 생각하니?

-

A.K : 호주는 생각보다 디저트 분야가 많이 발달되어있고 앞으로도 꾸준히 성장할 거라고 생각해. 호주 사람들은 요식업이 흥미로운 분야라고 생각해서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거든. 디저트 분야는 레스토랑, 파인 다이닝, 디저트 샵, 카페, 케이터링 등 세분화되어있어.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본인에게 맞는 분야를 찾는 것도 중요해! 


출처 : 중앙일보 - http://mnews.joins.com/article/22282800?cloc=flipboardnews


-

A : 가까운 지인으로서도 어떤 과정을 거쳐왔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었는데 너를 더 잘 이해하게 됐어. 그리고 같은 업계라고 해도 셰프인 나는 파티시에들과 옆에서 일하면서도 관심을 잘 두지 않았었는데 해외에서의 파티시에로서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좋았어. 인상 깊었던 부분은 너는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낸다는 점이었어. 그리고 한번 목표를 세운 것은 어떻게 던 현실로 만들어내는 그런 힘이 놀라운 것 같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호주 최고의 레스토랑과 호텔을 거쳐서 한국에서의 디저트 카페까지. 너무 가까이서 너를 보면서도 너라는 사람이 가진 강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정리해보니까 네가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도 거저 얻지 않았구나 싶어 진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앞으로 또 고생해야 할 일이 구만리겠지만, 지금까지 온 것만으로도 너는 이미 대단하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

마지막 파티시에를 꿈꾸는 친구들, 그리고 이민을 꿈꾸는 후배 파티시에들에게 더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줄래?

-

A.K : 처음 시작은 무모하게 부딪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동료의 소중함과 셰프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을 느끼며 성장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직업을 선택한 것에 후회를 하지 않아. 그렇지만, 이렇게 느끼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힘든 시기도 거쳐야 했어.

1분 1초 끊임없이 생각하고 움직이는 셰프는 티브이에서 보는 단순히 요리만 하는 것과는 달라.

새로운 곳에서 일을 시작할 때 목표를 가지고 들어간다면 힘든 시기를 이겨내는 데에 도움이 될 거라고 믿어.



내 경우에는


1. 기본을 배우겠다는 목표
2. 손님들과 소통을 하겠다는 목표

3. 시민권을 따겠다는 목표


이 세 가지의 목표가 있어서 힘든 시간을 견뎌내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 어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이정표 삼는 것은 네가 지칠 때 다시 일어날 수있는 원동력이 될 거야.


그리고 또 다양한 경험을 해보라고 해주고 싶어. 보다 더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경험을 해본 게 나에게는 내가 발전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생각해. 이민이 시민권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도 있지만 본인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하는 중요한 시기라고도 생각하거든. 오로지 시민권만을 향하는 이민은 본인이 지칠 수밖에 없어. 그 시기에도 시민권뿐만 아니라 본인의 다른 목표도 있어야 자신의 발전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믿어.


나의 이야기가 이제 막 첫발을 내딛는 청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읽어줘서 고마워.

안녕!

 





안나`S INSTAGRAM   :   SUMMERLANE_ANNA

앨리스`S INSTAGRAM   :   ALICEINMELBOURNE

수다`s INSTAGRAM :  SUDAMELBOURNE  (앨리스 팀 첫 번째 레스토랑)

네모`s INSTAGRAM : NEMOMELBOURNE (앨리스 팀 두 번째 레스토랑)


*답글은 원래 하던 대로 반말로 주고받으면 더 좋을 거 같아!! 나도 그게 편하고, 언니 거나 오빠 거나 친구 거나 동생일 너도 그게 편할 거야, 하다 보면!! 물론 존대가 편하면 그렇게 소통해도 좋아 :-)


**호주 이민 생활 중이거나, 호주에서 이민 과정을 밟고 있는 동료들 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이민을 생각하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조언들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부담 없이 댓글이나 인스타 디렉트 메시지를 줘! 꼭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일 필요도 없어. 지금 이민의 과정을 밟으면서 느끼는 고충과 어려움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민에 대한 좋은 점과 후회되는 점도 가감 없이 나누고 싶은 동료들의 참여 기다릴게!


***출처를 밝힌 공유는 언제나 환영이야!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돼 :-)




이전 06화 누가 뭐래도 마이웨이를 가는 그 남자 by 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