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자와 결혼해서 호주에서 사는 이야기
사업이민이나 투자이민이 가능할 정도로 재력을 갖춘 경우는 사실 내 또래에서 보기 힘들고, 특정 재능을 인정받아 시민권을 취득한 경우나 종교인 자격, 혹은 난민신청을 통한 이민 같은 특이 케이스들을 가끔씩 보지만 흔한 경우는 아니야.
알다시피 나는 호주에서의 유학을 통한 기술이민을 했어. 내 주위의 거의 모든 친구들이 그렇지.
기술이민은 보통 짧게는 5년에서 10년 정도 걸리는 끝없는 '증명'의 과정이야. 직업증명, 경력증명, 학위 증명, 어마어마한 세금납부증명, 언어 실력 증명, 범죄 경력없음의 증명. 나 스스로 이 나라의 경제에 보탬이 될만한 젊은 인력이라는 것을 '증명 또 증명'해야만 하는 거지.
이게 참 웃긴데 말이야. 그깟 영주권이라는 게 뭐라고 이 기술 이민이라는 과정이란게 사람 피를 말려.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결실 없이 허비하기도 하기도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직업을 오로지 이민 때문에 선택해서 원치 않은 길을 걸어야 하기도 해. 밑 빠진 독에 처붓듯 들어가는 학비와 비자비용, 내가 과연 끝내는 넘을 수 있을까를 알 수 없이 높은 이 영어라는 장벽...사람마다 어려운 정도는 틀리겠지만 꽤 많은 기술 이민 희망자들이 이 너무나도 컴컴한 터널 속에서 헤매는 과정에서 지쳐가. 그래서 본인도 모르게 가시가 돋지. 애꿎게도 원망의 화살을 엉뚱한 곳에 돌리게 되기도 해. 나도 그랬어. 한참 지쳤던 나와 주변의 친구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예의가 점점 부족해졌었어.
정말 부끄러운 고백을 이제부터 해볼게.
그때의 우리는 고된 하루가 끝나면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 이야기를 농담처럼 나누고는 했었어.
아 이게 무슨 개고생이냐. 나도 호주인 한 명 꼬셔볼까?
시민권 있는 사람 한 명 소개해줘. 나도 좀 편하게 이민하고 싶다.
누군가 결혼이나 연애를 통해서 이민을 왔다고 하면 노골적으로 '와~ 부럽다!' ' 이민 편하게 와서 좋겠다, 나도 누구 한 명 소개시켜주면 안 돼?'라는 말을 농담이랍시고 건네기도 했었고, 시민권자인 친구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이성을 보며 '쟤 혹시 여기 살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닐까?'라는 의혹을 품은 적도 있어.
농담이라고 장난이라고 하지만 가시가 돋쳐나가는 말들도 분명히 있었을 거야. 나는 하나 거저 주어지지 않고 이렇게 하루하루가 힘든데 연애 한번 잘해서 이 모든 과정을 건너뛴 사람들이 진심으로 얄미운 순간들도 분명 있었을 거야.
어리고 부족했던 나는 지고 있는 짐이 너무 버겁고 무거운 나머지 타인의 외로움과 고민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고 공감능력은 점점 결여되어 갔어. 우리 각자가,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아픔을 안고 저마다의 짐을 지고 있다는 걸 그때는 잠시 잊었었어. 내가 다른 사람의 짐의 무게를 감히 가늠할 수도, 평가할 수도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까먹고 있었지.
그 부끄러움을 지금 이 글을 통해 고백하고 있어.
그래서 오늘은 결혼을 통해 이민을 한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려 해.
남들한테는 쉽게 들리는 이 결혼을 통해 이민을 한다, 이 짧은 문장 안에 얼마나 많은 차별과 편견이 내포되어있는지 영국 남자와 결혼을 해서 호주에 살고 있는 한 한국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느껴보려고 해.
나의 레스토랑 SUDA가 가오픈을 한 아주 첫날에 첫 손님이던 인연이 단골손님으로, 친구로, 지금은 동료로 이어져서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수다의 공식 푼수 떼기 레몬이 오늘 네가 이야기를 들려줄 호주의 청년 이민자야.
결혼을 통해서 이민을 했다는 이유로 '편하게 산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으면서도 헤헤 웃는 레몬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까이 있는 나도 몰랐어. 사랑하는 그녀의 글을 여러 번 읽고 편집하면서 그녀의 상처와 아픔을 느꼈고 그동안 알아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리고 그 녀의 솔직한 이야기 덕분에 부끄러운 나의 편견을 다시금 깨 닫고 나의 벽을 또 조금 허물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사랑스러운 그녀와 함께 결혼, 이민, 편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볼게.
멜버른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넘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는 귀여운 푼수 레몬의 이민 이야기를 따뜻한 눈으로 읽어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결혼이민이나 멜버른 생활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다면, 사랑이 정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차고 넘치는 레몬의 인스타에 놀러 가서 물어봐. 사람과 소통하고 돕는 것을 좋아하는 레몬은 너를 언제나 반가워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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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ALICE) : 안녕 레몬! 반가워. 일터에서 매일 보지만 또 이렇게 만나니까 신선하네.
자기소개 좀 간단하게 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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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LEMON) : 안녕! 나는 지금 호주 이민 7년 차인 이민자이고 30대 중반인 한국 여자야. 현재 멜버른 퓨전 한식 레스토랑 <수다>에서 F&B 매니저로 일하고, 공기업 <코트라>에서 무역 관련 영어 통역사로 일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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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결혼을 통해 호주로 이민을 왔다면 남편은 호주 사람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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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아니, 남편인 알렌은 영국 사람이야. 호주에 오기 전에는 영국에서 4년을 살았어. 정확하게는 결혼 이민은 사실 영국에서 한 거고 남편과 함께 호주로 다시 재이민을 왔어. 알렌은 직업이 회계사인 데다가 호주의 최우방국인 영국 국적자이기 때문에 호주 이민이 수월한 케이스였고 알렌의 아내인 나도 이민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지 않고 비교적 쉽게 영주권을 획득할 수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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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알렌과는 처음에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물어봐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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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처음부터 거슬러 올라가 볼게. 한국에서 난 서울의 한 여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기자였어.
저렇게 말하니 되게 있어 보이는데 정확히 말하면 영화 월간지를 거쳐 스포츠 주간지 기자로 직장생활을 하며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 쓰던 일개미였지. 회사 전화기를 붙잡고 하루에도 몇십 명과 통화를 하며 인터뷰를 섭외했고, 외근은 물론 매일같이 야근, 밤낮을 안 가리는 회식, 툭하면 밤샘 근무. 정신없고 치열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었어.
그렇게 기자로서 4년 차가 되는 해, 나는 통역 겸 취재 차 인천의 한 록 페스티벌에서 자원봉사를 하게 되었고 한 남자를 만났지. 예상했겠지만 그게 알렌이었어.
영국 캠브리지에서 나고 자란, 금발에 푸른 눈동자의 그를 보는 순간 정말 거짓말처럼 나는 첫눈에 반했어.
낯선 도시, 젊은 혈기가 가득 찬 천막 안의 작은 파티장, 록음악이 가득 찬 그곳에 앳된 얼굴의 알렌이 있었어. 그는 수줍음에 주변 사람들과는 눈도 못 마주치면서 작게 몸을 흔들고 있었고 그 모습이 나에게는 너무 순수해 보였어. 대화를 나누고 연락처를 주고받았지. 그때 나는 스포츠 주간지 기자였다고 했잖아. 언어의 장벽이 좀 있었지만 알렌을 데리고 온갖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며 우리는 서서히 친해졌어.
결정적으로 K리그 축구경기장 필드에 데려간 날, 이 축구라면 환장하는 이 영국 남자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완전 존경심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지. 아, 됐다, 넘어왔다! 싶더라고 히힛. 그렇게 우리는 연인 사이로 발전했어. 용인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알렌과 서울에서 직장생활 중이던 나는 그 후 1년 반을 주말마다 데이트하며 여느 커플처럼 평범하고 달달하게 연애를 했어. 그때만 해도 한 여름의 'Holiday Romance'인 줄 알았던 그와의 만남이 이렇게 10년 차 결혼생활로 이어지게 될 줄은 나도 정말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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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오 정말 낭만적이야! 영화같이 만났구나. :-)
알렌은 한국에서 영어강사로 재직 중이었고, 한국생활에도 꽤 만족하고 있던 걸로 알고 있어. 너도 힘들다 바쁘다 불평은 했지만 꿈에 그리던 기자가 되어 탄탄한 커리어를 쌓고 있었고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잖아. 한국에서 1년 반이나 알콩달콩 연애를 하다가 갑자기 한국을 함께 떠나게 된 건 어떤 이유에서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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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기자라는 직업 특성상 야근이 잦아. 그리고 나는 특히 주간지 기자였기 때문에 더했지. 매주 목요일 밤을 꼴딱 새우고 마감을 해야 인쇄 작업에 들어갈 수 있거든. 나에게는 이 목요 마감이란 마땅히 치러야 할 주중 행사였어. 그런데 어느 날 알렌이 회사로 도넛을 사들고 깜짝 방문을 한 거야. 당연한 듯이 오늘은 밤을 새워야 한다는 말을 하는데 알렌의 눈빛이 걱정으로 일렁였어. 내 손목을 잡고 사무실에서 나를 끌어낸 알렌은 이렇게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며 결국에는 눈물을 흘렸어. 5년 차 기자였던 나에게는 너무 당연했던 일들이 알렌에게는 이렇게 까지 충격이라는 사실이 나에게는 더 충격이었어. 무언가 잘못됐구나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지.
한국 사회의 편견에 내가 점점 지쳐간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어. 신물이 난다고 해야 하나 그런 거지. 내가 알렌과 연애할 2006년도만 해도 한국에서 국제 연애에 대한 배타심이 굉장히 심했거든. 신랑과 함께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을 때면 '양공주'라고 왔다 갔다 거리면서 욕을 하는 취객도 있었고, 전주 국제영화제에는 어디 천박하게 양놈이랑 같이 다니냐고 호통치시던 할아버지도 있었어. 또 여름휴가를 가서 민낯에 츄리닝바람으로 알렌과 해변을 걷는데, '와 저렇게 못생긴 한국 여자가 어떻게 외국인을 만나지'라고 욕했던 젊은 한국 남자들도 생각난다. 회사 선배는 외국인 남친이 있다고 말 한 순간 적대적으로 변하기도 했지.
저녁이 있는 삶, 술은 즐길 만큼만 마실 수 있는 회식, 본인 취향대로 옷을 입고 다녀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 문화, 내가 누구와 연애를 하던 손가락질당하지 않을 권리를 찾고 싶어서 나는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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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같은 문화를 공유한 사람들끼리도 결혼생활 10년 동안 행복하기 힘들다고 하는 판에 너는 아직도 그렇게 깨가 쏟아지게 결혼생활을 하고 있잖아. 연애하듯이, 소꿉장난하듯이.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래도 궁금하니까 물어볼게. 비결이 뭐인 것 같아? 국제 연애, 국제결혼을 슬기롭게 잘하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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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사실 까놓고 말해서 국제결혼이라고 뭐 별거 없어. 사랑해서 결혼을 했는데 어쩌다 보니 외국인인 것뿐이야. 한국인들이라고 다 같지 않고 각자의 가풍이나 종교 등 서로의 문화가 충돌하기도 하잖아. 그것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하지만 나름대로 국제결혼생활 10년 차기도 하고 주변의 국제결혼을 한 커플들을 많이 만나보면서 내 나름대로 느낀 점을 이야기해볼게.
국제결혼, 국제연애에 성공(?)하려면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수라고 생각해. 각자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가장 중요한 거지. 예를 들어 단순히 영국 남자를 사귄다 치면 '아, 너는 영국인이니까 차를 마시고 피시 앤 칩스를 좋아하겠다' 이렇게 뭉뚱그려서 생각할 것이 아니고 차는 어느 브랜드를 좋아하고 차를 마실 때 우유나 설탕을 넣는지 아니면 차를 마실 때 우유를 먼저 따르는지 찻물을 먼저 따르는지 등등. '영국인'을 떠나서 개인의 취향에 관심을 두어야 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이것은 비단 국제 연애에서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것 같더라. 사실 연애라는 게 그렇잖아. 한국 남자라고 다 같은 취향이 아니고 한국 여자도 모두 다르지. 개개인의 취향과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관심에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해.
알렌은 한국에서 2년 동안 살았고 나는 영국에서 4년을 살았기 때문에 서로의 식문화, 관습에 대한 이해도는 높은 편이야. 이삿날엔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짜장면을 먹어야 하는 것을 알고 순대를 먹을 때 소금에 고춧가루를 더해야 하는 그런 소소한 걸 알렌은 배우고 이해하려고 노력을 해. 그리고 그게 나는 참 고마워.
물론 처음부터 이 상황을 다 이해하진 않았어. 첫 데이트로 중식집에 갔는데 알렌은 짜장, 난 짬뽕을 먹었는데 내가 너무 스스럼없이 내가 쓰던 젓가락으로 자기 짜장면을 가져가는 거를 보고 너무 놀랐대. 자기 디쉬를 나눠먹지 않는 서구식 문화와 정답게 나눠먹는 우리 문화가 그만큼 달랐던 거야. 그 밖에도 한국인이 명절 때면 스팸을 엄청나게 이쁜 포장 박스에 담아서 주고받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며 놀라기도 했어. 영국에서 스팸은 조금 저렴한 음식의 대명사 같은 거라 절대 선물로 주고받지 않는다 하더라. 동네 야트막한 산에 올라가는데 전문적인 등산복을 갖춰 입는 것도 흥미롭게 바라보더라고.
나에게 너무나도 당연해서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의 부족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어. 냉장고에 김치, 오징어젓에, 된장찌개며 잔뜩 넣어놨는데 신랑은 한 번도 나에게 한국음식 냄새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아서 나는 괜찮은 줄 알았거든. 근데 우리 집에 놀러 온 알렌의 친구가 냉장고 문을 열자마자 뒷걸음을 치면서 자기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는 거야. 그때 니 외국음식 냄새가 알렌에게는 힘들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더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서 다른 문화를 가지고 함께 생활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조금 더 필요하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많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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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이제 우리, 너랑 내가 늘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를 해보자.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지만 앞에서 고백했듯이 나도 결혼이민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어. 대놓고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부러워하고 시기한 적도 있었지. 결혼으로 이민한 사람들 중에서는 이런 편견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 결혼 이민이라는 것에 대한 편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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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내 문화를 이해해주고 날 너무나 사랑해주는 착한 알렌을 만나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아름답게 끝맺음하고 싶지만 사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이면에 숨은 나쁘고, 더럽고, 가슴 아픈 세상의 편견에 대한 이야기야. 결혼이민/ 국제결혼의 어두운 뒷모습은 확실히 실존하고 나 또한 그런 편견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태국에 가면 어린 태국 여자 옆에 백발의 백인 할아버지가 데이트를 하고, 미국엔 ‘그린카드’ 영주권을 얻기 위해서 동유럽의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원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을 하기도 하잖아. 사랑을 거래하듯 배우자 비자를 획득해 살기 좋은 나라에 정착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고 그로 인해 선진국의 남자가 속고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어. 백인 남자가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많지. 동양 여자에 대한 그릇된 성적 호기심을 갖고, 동양 문화가 가부장적인 것을 악용해 가사 노동을 착취하고 동양 여자를 ‘할인 상품’으로 보는 백인 남자도 나는 많이 봐왔어. 이렇게 '결혼이민'의 뒤에는 어두움이 있고 그로 인해 생기는 편견이 세상에 만연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고 외면하고 싶지는 않아. 나에게도, 이 글을 읽는 너에게도 남의 일이 아닐 수가 있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똑바로 마주 보고 싶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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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쉽지는 않겠지만 가장 뼈아프게 네가 실감했던 편견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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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결코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이야기들을 해줄게.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나는 예비 시부모님을 만났어.
당시만 해도 동양인이 거의 없던 보수적인 동네 캠브릿지에 살던 전형적인 백인 혈통의 영국 중산층이셨던 그분들은 알렌이 처음으로 결혼을 생각하는 여자 친구라고 하는 나를 보러 한국까지 오셨어. 처음 접해보는 한식이 부담스러울까 봐 서울에 있는 홍콩계 딤섬 레스토랑으로 모셨는데 이것이 한국 음식인 줄 아시고 굉장히 좋아하시면서 ‘딤섬 문화’에 대해 물어보시더라고. 그만큼 그분들에게는 한국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어.
그분들이 알고 있는 한국은 아직도 전쟁 중이고 불안정하며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후진국이었던 거야.
당시 나는 부모님이 정성껏 뒷바라지해서 대학교 나오고 전문직인 기자 생활하는 사람이었는데 알렌의 부모님 앞에서 나는 '순진한 백인 남자 꼬셔서 팔자 한번 고쳐보려는 여우 같은 년' 취급을 받았어.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싸늘한 표정과 말투에서 본능적으로 느껴졌지. 나를 대등한 인격체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사랑에 빠진 우리는 단순히 서로 떨어져서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고 그렇게 퇴직한 나와 알렌은 영국으로 향했어. 당시 영국에 입국한 직후에는 둘 다 무직 상태였지. 결혼 증서를 받으려 영국 대사관에 갔는데 여성 영국 대사가 알렌에게만 ‘이 결혼을 정말 원하니? 이 여자의 재정적 상황을 아니?’라고 묻는 거야. 그러면서 내게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시선을 주더라. 너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없었어. 사랑만 믿고 이 먼 곳까지 무모하게 날아오면서 내가 무언가를 잘못한 것은 아닐까 나조차 헷갈리기도 했을 정도니까.
경제관념이 철저한 시부모님은 영국의 슈퍼마켓에서 만원 주고 산 토스터기를 우리에게 주시고는 알렌에게 그만큼의 돈을 달라고 하셨을 만큼 선을 그으셨어. 결혼을 한다고 한 우리에게, 알렌 몫의 유산 자금은 모두 동결될 것이라고, 마치 막장 드라마처럼 우리에게 선포하셨지. 그래도 그런 말씀에도 흔들림 없이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가기로 했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부모님의 축하와 인정이었지 유산이 아니었으니까.
나와 알렌은 아직도 그런 이야기를 해. 우리 시부모님께서는 못 말리는 동물 애호가신데, 그 상당한 금액의 유산이 알렌 대신 동물 구제기금으로 갔을 테니 세상에는 더 잘된 일이라고 한바탕 웃고 말아.
그래, 힘들었지만 나와의 사랑을 지키려고 부모님과 등을 지다시피 한 알렌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이 나를 비난해도 나는 괜찮을 수 있었어. 하지만 가장 성스럽고 가장 따뜻해야 할 결혼이라는 과정에서 상대편의 부모님의 반대와 미움을 온몸으로 받아내기란 쉽지가 않더라. 그것도 나의 잘못이 아닌, 나는 너무나도 자랑스럽기만 한 나의 '국적'때문이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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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이 것도 나의 편협한 편견인데, 외국 남자랑 결혼한 여자들은 뭐랄까 시월드와의 갈등에서 조금 더 자유로울 것만 같고 시부모님과 동등한 관계를 맺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아서 너에게 섣불리 위로를 건넬 수도 없어. 알렌의 부모님을 뒤로하고 돌아선 후에라고 꽃길이 이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게 시작이었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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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그래, 너의 말대로 그건 시작에 불과하더라. 시작부터 아예 빡셌던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였어. 백인 영국 남자와 교제를 하는 동양인 여자를 향한 세상은 정말 차가웠어. 영국 길거리에서 나와 알렌을 보며 ‘저런 태국 여자랑 다니는 문란한 영국의 요즘 청년들이 너무 많아, 쯧쯧’하고 입술을 차는 어떤 아주머니에게는 상처받지 않았어. 웃어넘겼지,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났으니까. 그렇지만 언젠가 알렌의 친구들과 파티 중에 취한 친구들이 불콰해진 눈으로 던진 말들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아.
한국을 피해 살기 좋은 영국에 사니까 좋으니? 너의 여동생도 너처럼 이뻐? 백인이랑 사귀고 싶어 하지 않아? 결혼만 안 했으면 나도 너 같은 얘랑 연애한 번 하고 싶다. 백인을 꼬시니까 어때?
그래. 나는 알렌에게 첫눈에 반해서 ‘꼬시기로’ 했어. 아니라고 부정할 마음은 없어. 그런데 알렌이 백인이고 영국 시민권이 있기 때문에 이 남자를 ‘꼬신’ 건 아니야. 한국 여자가 한국 남자에게 반해서 ‘꼬시고’ 좋은 관계를 시작하는 것처럼 나도 이 사람에게 반한 것뿐이야. 그런데 왜 어떤 사람들은 내가 백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문란하고 남자를 밝혀서 백인을 꿰찬 기회주의자라고 생각하는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지금도 솔직히 매일매일 편견에 부딪히면서 살아가. 옛날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라고 시원하게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아직도 레스토랑에 가면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10년 차 부부로 보지 않고 나를 백인 남자 옆의 멍청한 동양 여자로 보기도 하거든. 그런 시선은 아직도 가시처럼 박혀와.
파티나 모임에서 자유롭게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잘 다가가는 내 모습만 보고는 '역시 조신하지 못해 문란하고 백인만 밝히는 여자, 한국 여자 망신'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어. 나는 남녀노소 국적 불문하고 수다 떠는 걸 너무 좋아하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게 너무 기쁠 뿐힌데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욕을 먹는다고 해도 잘못된 편견을 가진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굳이 내가 '조신하고 얌전한 여자'로는 살아갈 필요는 없잖아. 그래서 나는 오늘도 국제결혼 한 동양 여자이며 누구에게나 명량하고 수더분하게 다가가는 나 그대로의 솔직한 모습으로, 호주에서 살고 있어. 결국 보수적인 영국을 떠나 호주라는 나라를 택한 이유도 통계학적으로 국제결혼과 혼혈 자손에 대한 포용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온 것이니까.
그래, 내일 당장도 이런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호주 영주권 어떻게 따셨어요? 아 배우자로요? 쉽게 따셨네요? 남편이 나이가 많나요?”라는 편견 어린 말들을 던지는 사람을. 본인이 편견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지금 그 편견을 무기로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을.
그렇지만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진 않을 거야. 그냥 담담하게 내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싶어. 그리고 만약에 나와의 대화가 단 한 명에게라도 편견이 없어진 계기가 된다면 나는 굉장히 행복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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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자 이번에는 무거운 이야기에서 벗어나서 조금 더 실질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국제 연애를 한다고 다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잖아. 너는 아무래도 바쁜 기자생활 속에 주말에만 겨우 만나가면서 겨우 연애를 했고 그때는 알렌이 오히려 한국어를 너에게 배우는 시기지 않았어? 영국에 갔을 때 영어 때문에 일상에서, 직장에서 많이 힘들지 않았어? 너는 어떤 식으로 공부를 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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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나는 영어를 중, 고, 대학교 정규 과정으로만 배우고 유학은 가지 않았어. TV를 통해서 독학으로 영어를 배운 케이스야. 미드를 끊임없이 보며 섀도윙을 하며 영어를 연습했지. 어설프게나마 통역 봉사를 하면서 나름대로 는 어느 정도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런데 영국에 오자마자 서브웨이 샌드위치 가게에서 주문도 못하게 됐을 때의 충격은 굉장했어. 시아버지와의 첫 만남 때 "So, What do you make of England?"라고 질문했을 때, 첫 문장부터 알아들을 수 없어서 얼굴만 빨개졌어. 지금까지도 왜 'What do you think of England?'라는 쉬운 말로 하지 않으셨을까 속에서 불이 난다. 다시 말히지만, 역시 시월드는 전 세계 공통인 듯! 하하.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내가 너무 순진하고 오만했던 거기도 해. 나는 한국에서 대학도 나와서 사회생활까지 한 뼛속까지 한국인이었는데 미드 조금 봤다고 해서 영어로 입과 귀가 트였을 리 없잖아. 알렌과 의사소통이 됐던 건 그건 그냥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채 준 것일 뿐이었구나를 뼈저리게 절감했지.
누구보다 활발한 성격이었던 나는 영국에 가자마자 문화와 언어의 벽에 갇혔고 급격히 무기력해졌어. 얼마 전에 배우 서민정 씨가 <이방인>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외국생활이 너무나 외로웠고 바깥이 무서웠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 공감 가더라. 한국에서는 나름대로 사회의 일원으로 제 몫을 했었는데 나의 그 모든 가치는 이 외국에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해.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코카콜라 한잔을 시키려고 해도 "캔 아이 해브 어 콕?" 할 때의 발음 때문에 직원들과 손님들이 날 보며 킥킥대는 통에 얼굴만 빨개지게 되고. (COKE가 잘못 발음하면 남성 성기의 슬랭과 비슷하거든) 아, 어느 순간부터 그냥 집 밖에 나가기도 싫더라니까.
한동안 웅크려있다가 보니 오기가 생겼어. 내가 뭐가 모자라고 너네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나를 무시하냐! 생각이 들었고 그 동력으로 죽자고 영어를 공부할 수 있었어. 남의 나라에서 이방인이기 때문에 언제나 얌전히 꿀 먹은 벙어리처럼 방긋방긋 웃고만 있었는데 부당한 상황에서는 말싸움도 피하지 않아야 하고 이길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거지. 정신없이 영어를 생활 속에서 계속 흡수하려고 노력한 결과 영어를 어느 정도 여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고, 아이엘츠 점수가 생각보다 잘 나왔을 때는 정말 가슴이 내려앉을 정도로 기뻤어.
끊임없는 노력과 시간이 있다면 언어는 누구나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내 생각에 언어=그 나라 문화이기 때문에 언어를 단어 암기식으로 외우고 문법을 파고드는 것보다는 그 나라의 책, 잡지, 영화, 예능 프로그램을 다각도로 습득하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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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내가 멜버른에서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너는 독일계 항공사의 직원이었지. 나는 그곳이 너의 호주 첫 직장인 지도 몰랐었고 네가 호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도 몰랐었어. 호주 생활이란 너에게 딱 맞는 맞춤옷처럼 편안해 보였고 너는 직장생활에 너무 충만해 보였거든. 네가 정말 좋아했던 첫 직장 이야기 좀 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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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지금 돌아보면 영국에서의 삶이 이민을 향한 준비과정이었다면 호주 생활은 원하는 이민으로의 전환기였던 것 같아.
호주로 온 첫 주에 인터넷에서 구인광고를 봤어. 독일계 외항사 직원을 뽑는 광고였는데 한국어 가능한 사람을 뽑는다는 거야. 나는 영국에서는 한국어를 쓰는 게 내 장점이라고 생각지도 못했거든. 막상 한국과 시차가 크게 나지 않고 교민이 많은 호주에서는 이 회사 저 회사에서 한국어가 가능한 직원을 심심치 않게 뽑더라고.
떨리는 마음에 마시지도 못하는 독한 커피를 원샷하고 들어간 항공사 인터뷰에서 인사과 면접, 실기 면접, 전화통화 면접을 차례로 보았고 나는 최종 합격을 했다는 통보를 받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영국에서는 그렇게 노력해도 안되더니 운인지, 타이밍인지 호주 온 지 일주일 만에 내가 원하던 취직을 하게 된 거야.
그때는 '영국은 나를 그렇게나 거부하더니 호주는 나를 인정해주는구나!' 생각했었는데 사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 그때는 영국이 경제 위기로 자국민들 조차 일자리가 부족한 상황이었고 나의 영어도 그 시절에는 덩달아 심하게 부족할 때였으니까 영국에서는 취업이 안됐던 걸 거야. 아시아 문화가 영국보다 훨씬 전반적인 영역에 스며든 호주는 동양인으로서 ‘영국과 비교해서’ 조금 더 살기 유연한 측면도 있지. 지금에서 돌아보니 알 것 같더라. 그래도 영국에서 그렇게 힘들게 영어를 배우고 준비했던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호주에서 내가 바로 적응할 수 있었어. 헛된 고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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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그렇게 취업했구나! 겸손한 네가 매일 너무 쉽게 취업했다고 해서 나는 늘 부러워했었는데, 영국에서 너도 모르는 사이에 영국계인 호주의 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고 영어를 제대로 습득했기 때문에 그렇게 바로 취업할 수 있었던 거였어. 역시 거저 얻게 되는 것은 없나 봐. 그래서 막상 직장에 들어가 보니 어땠니? 영국 호주 통틀어 외국에서의 직장생활은 처음이었을 텐데 힘들지는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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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우리 회사는 한국인 직원과 독일, 일본인 직원 이백 여명으로 이루어진 멜버른 지사였어. 남아프리카 출신 디렉터, 뉴질랜드 인사과 직원, 독일 매니저, 보루네오 출신 동료까지- 그야말로 진정한 'Multi Culture'를 즐길 수 있는 회사였지. 항공사는 기내에서 근무하는 승무원과 공항에서 근무하는 지상직 외에 사무직도 있는데 나는 그중 예약과 소속이었어. 운 좋게도 한국과 시차가 많이 나지 않는 호주 멜버른에 독일 항공사의 한국 예약과가 있었던 덕분에 나에게 기회가 온 거야. 항공사에서 일하는 것이 어릴 적 꿈이었던 나는 아침에 눈뜨면 이 곳에 출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냥 기뻤어.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유럽, 싱가포르 고객들과 항공권 예약 관련 업무를 진행하면서 한국인 직원으로서 진정성 있고 따뜻한 'Hospitality'를 보여주기 위해 많이 노력했고, 손님이 서비스에 만족했을 때마다 뛸 듯이 기뻤어. 각자 나라에서 가져온 음식으로 뷔페식을 차려서 점심을 먹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때에는 다들 일찍 끝나서 멜버른의 아름다운 항구 옆에서 파티를 하기도 했어.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야. 항공사 직원으로서 최악의 경험인 대형 여객기 사고를 겪으면서 재난 상황에서 피해자 가족과 연락을 해야 했을 때는 업무를 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졌고, 또 영어권 원어민이 아닌 예약과 직원으로서 원어민 승객을 만났을 때 인종차별적인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도 힘들었어. 이상하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아듣던 손님이 본인에게 불리하거나 원치 않는 이야기를 하면 그때부터 내 말을 못 알아듣겠다고 영어를 할 수 있는 다른 백인 직원과 상담하겠다고 하더라고. 나참 기가 막혀서. 하지만 그런 일은 정말로 극히 드물어.
외국 항공사에 일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영어는 꼭 미국인처럼 구사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싱가포르, 홍콩, 인도에 사는 아시아인들은 자연스럽게 본인 나라의 악센트를 구사하면서도 주눅 들지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해. 이제는 영국식 영어, 미국식 영어 양극화되어있는 사회가 아닌 거야. 호주, 캐나다, 싱가포르, 유럽의 영어까지 만인이 그들의 영어를 구사하고 있어. 하지만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은 대부분 ‘있어 보이는 발음', ‘문법적으로 완벽한 문장'에 집착하면서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못하고 살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거든. 영어는 언어고, 언어는 소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얼마만큼 멋진 발음으로 말하는 가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 다양한 국적의 고객을 대하면서 중요한 것은 소통하고자 하는 진정성이지, 문법이 얼마나 맞나 틀리나 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어. 열심히 소통을 하다 보면 문법이고 발음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더라고, 신기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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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나는 한국을 너만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이민자도 드물게 봤지만 또 사는 도시를 너만큼 사랑하며 매일 경배하는 이민자도 처음 봤어. 네가 그렇게나 사랑하는 이 도시 멜버른에서 산다는 것은 너에게 어떤 의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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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내가 사는 호주 멜버른은 다문화에 너무나도 관대한 곳이야. 멜버른에 사는 호주인들은 아시아 문화에 관심이 많고 더 포용적이야. 나와 앨리스의 레스토랑 <수다>에는 호주 손님들이 하루에만 한 백 명 오는 것 같아. 매일매일 비빔밥을 먹는 사람도 있어. 우리 레스토랑 음식은 호주 현지인 입맛에 거부감이 없도록 만들어져 있거든. 한국 음식을 현지인에게 소개하고 맛있게 먹는 걸 볼 때마다 내 가슴은 터져버릴 것 같이 뿌듯해져. 전 세계인이 비빔밥, 김치, 불고기 발음을 정확하게 할 때까지 한 명 한 명 설득한다는 자세로 열심히 일하고 있어.
호주 멜버른으로 이민 온 첫날, 유쾌한 그리스인 택시기사의 농담을 들으며 도착한 시티 리틀 콜린스 구역의 서비스 아파트. 그 앞에서 그 새벽에 우릴 기다리던 맘씨 좋은 호주 아저씨, 첫 이력서를 내자마자 단박에 일을 시작한 독일 항공사 예약과. 작은 한국 레스토랑 수다를 이 도시 골목에서 발견하고 사랑에 빠졌을 때의 감정, 이 모든 것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생생하게 새겨져 있어.
멜버른은 말이야, 내가 너무 사랑하는 조국인 한국, 힘들었지만 그만큼 그리운 영국과도 다른 환상적인 도시였어. 조금만 약자가 위험에 처해있다고 생각하면 군중들이 갑자기 다 영웅으로 변하고, 팍팍한 삶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이웃을 사랑하는 시민들을 보면서 공동체 의식을 느끼기도 해.
나보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이름을 부르면서 상하관계가 없는 것이 너무 좋기도 하고, 알렌과 지인의 파티에 가도 내가 그 사람의 부인이 아니라 내 이름 그대로,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이 너무 다행이라고도 생각하고, 결혼을 해도 출산을 해도 경력 단절이 되지 않도록 정부와 회사가 여성을 돕는 것도 훌륭하다고 생각해.
조금 극적으로 말하면 이 곳은 나에게 작은 천국과 같은 곳이야. 이 곳에서 사는 하루하루를 감사하면서 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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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극단적 이리만큼 긍정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너와 가까운 나는 나름대로 너의 말을 걸러 듣는 노하우가 있지만, 너를 모르는 친구들이 너의 이민기를 듣고 환상이 생길까 걱정돼서 물어본다.^^
아무리 씩씩하고 긍정적인 너라고 해도 이민생활을 하면서 힘든 날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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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당연하지! 나도 사람인데! 하하. 아무리 호주가 가진 색깔과 나의 성격이 맞는다고 하여도 이민 생활이 언제나 즐겁지는 않아. 나도 힘든 부분은 있어. 어차피 피할 수 없으니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야. 보일러가 나오지 않는 아파트, 우풍으로 차가운 실내, 한국 사람은 한국 음식이 제일인데 그것도 항상 구하기가 힘들어서 최대로 한국 맛이 나는 외국 음식을 찾기에 바쁘지.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색안경을 쓴 시선과 근거 없는 편견들은 정말 아직도 적응이 안돼.
그리고 부모님과 동생들, 친구들을 모두 등지고 그 죽일 놈의 사랑 때문에 남자 하나 따라서 외국에 사는 것이 정말 보통 일은 아니야. 문득문득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정말 옥죄어 와. 나이는 계속 드시는데 내가 곁에 있어드리지도 못하니 이런 불효가 어딨니, 그런 생각을 하면 한없이 가라앉기만 해. 그래도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부모님을 제일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그나마 위안이야. 엄마가 나에게는 얘기하지 않지만 친구분들에게 호주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얘기하고, 내가 외국에서 사는 것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해 주시더라고. 아빠도 매일 호주가 제일이라고 말씀하시고 모르는 사람한테도 그렇게 내 자랑을 하셔. 이 자리를 빌어서 우리 부모님께 꼭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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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마지막으로 이민을 생각하거나 이민을 준비 중인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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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한국은 대부분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사무직을 구하는 것이 어느 정도 정해진 정답처럼 여겨지잖아. 하지만 해외에서는 (네가 있는 곳의 성격상 다 다르겠지만) 그런 틀이 확고하지 않을 수도 있어.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에서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했지만 우연치 않은 기회로 사무직을 호주에서 하게 되었고 요식업으로 직업을 바꿨어. 의자에 앉아있는 대신 두 다리로 열심히 뛰어다니며 일하고 손님 얼굴을 보면서 응대하니까 이게 또 내 성격에 더 잘 맞더라고. 환경이 허락한다면 꼭 자기의 꿈을 ‘안정된 철밥통’에 맞추지 않고 온전히 자기가 자기일 수 있고, 내 최대치를 끌어낼 수 있는 다양한 직종에 꼭 도전해봤으면 해. 물론 환경이 허락한다면!
영화 <겟 아웃> 보면 파티에 갔는데 나랑 같은 인종이 한 명도 없잖아. 이 이민 생활이라는 게 그래. 나와 같은 인종이 없고 아시아인으로서의 나만의 문화적 색채는 점점 없어진다고 느낄 수 있어. 하지만 괜찮아. 어느 곳에서도 너는 너일 것이고 나는 나 일 것이야. 영국과 호주를 거친 이민생활에서 조금은 힘들고 의기소침해지는 시절도 있었지만 나는 원래의 푼수 떼기 같고 수다도 잘 떠는 활발한 나만의 색깔을 다시 찾았어. 타지에서의 이민자여도, 나라는 사람은 똑같더라. 너라는 사람도 그럴 거니까 염려하지 마.
세 번째로는 자신의 국가가, 자신의 가족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 성 정체성이, 배우자를 고르는 기준이 꼭 다수가 결정한 단 하나의 기준에 맞춰져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야. 세계는 넓고 사랑할 사람도, 만나야 할 사람도, 경험할 다문화도 너무나 많다는 걸 꼭 말해주고 싶어. 경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해. 외국에서 연애를 할 필요는 없지만 굳히 두려워하며 피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아. 국적과 상관없이 그 사람이 너의 천생연분일 수도 있잖아.
국제 연애와 결혼으로 힘들어하는 누군가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역시 어깨 두드려주면서 여태까지도 많이 고생했다고, 힘들어도 조금만 참으라고 말해주고 싶어. 그때의 어린 커플이었던 우리를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많이 슬프거든. 우린 세상의 풍파를 많이 겪고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그만큼 힘들게 곁에 있던 서로를 지켰고 지금 우리는 정말 사랑하면서 잘 살고 있어. 앞으로도 나는 많이 노력할 거야. 이 글을 읽는, 사랑이 힘든 커플이 있다면 꼭 안아주며 말해주고 싶어. 나의 사랑처럼 너의 사랑은, 지킬 가치가 있다고 말이야.
여태까지 내 긴 이야기 들어줘서 너무 고마웠어.
언젠가 꼭 다시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바래!
*답글은 원래 하던 대로 반말로 주고받으면 더 좋을 거 같아!! 나도 그게 편하고, 언니 거나 오빠 거나 친구 거나 동생일 너도 그게 편할 거야, 하다 보면!! 물론 존대가 편하면 그렇게 소통해도 좋아 :-)
**호주 이민 생활 중이거나, 호주에서 이민 과정을 밟고 있는 동료들 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이민을 생각하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조언들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부담 없이 댓글이나 인스타 디렉트 메시지를 줘! 꼭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일 필요도 없어. 지금 이민의 과정을 밟으면서 느끼는 고충과 어려움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민에 대한 좋은 점과 후회되는 점도 가감 없이 나누고 싶은 동료들의 참여 기다릴게!
***출처를 밝힌 공유는 언제나 환영이야!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