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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버른앨리스 Jun 08. 2018

나는야 프로불편러, 중국어도 쉽지 않네.


영어를 배우러 보통 멜버른에 오지만

이 곳 멜버른은 의외로 중국어 배우기 참 좋은 환경이야.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정말로 많은 다양한 중국어를 구사하는 중국인들이 살고 있거든. 중국 본토 현지인들인 유학생이나 여행객들은 물론, 중국계 호주인들도 많고 대만계, 홍콩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혹은 말레이시아 화교들의 비중도 굉장해. 영어를 오래 파다 보니까 질리고 더 늘지도 않는 것이 느껴졌어. 나는 중국 문화와 음식에 관심이 많기도 해서 한 일 년 전부터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지.

가게 운영에도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은 했는데 기본적으로는 중국어 자체가 흥미로워서 지금도 꾸준히 꼬물꼬물 혼자 공부하는 중이야.


본격적으로 원어민 클래스를 듣기 전에 기초를 조금 다지기로 하고 이런저런 방법을 알아봤어. 건실한 나태 지옥 예비 인재로서 주제를 알기 때문에 혼자 교재를 가지고 스스로 공부하는 것은 애초에 생각도 안 했고. 과외를 하자니 가게 운영 때문에 시간 맞추기가 힘들고.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인터넷 기초 강좌를 신청해서 듣는 것.

한국에 아주 좋은 프로그램이 저렴하게 많이 있더라고. 시원스쿨, 문정아 중국어 등등등...

이 먼 곳에서 한국의 유명 강의를 합리적으로 들을 수 있음에 정말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비교 분석해서 나한테 가장 잘 맞을 것 같은 프로그램을 골랐지.

그게 바로 시원 스쿨 기초 중국어 과정이야.


강의는 내 스타일이야. 마음에 들어.

바쁠 때는 몇 주고 건드리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온 앤 오프로 일 년을 넘게 듣고 있어.

강사님께 혼자 정들어서 꿈에도 가끔 뜬금없이 나오고 그럴 정도로 나름대로는 열심히 들었어. 한자나 문법보다는 회화 위주로 귀부터 틔우고 입으로 중국어를 내뱉게 하는 시스템도 나와 잘 맞았고 성과도 있었어. 중국 손님들과 친해지는 재미가 쏠쏠했고 슬슬 지나가는 중국 사람들의 대화가 단어 단어씩 들리기 시작했지. 나는 성격이 무던한 면이 있어서 한번 정한 것은 잘 바꾸지 않고 믿고 쭉 가는 편이거든. 시원스쿨, 웬만하면 평생회원까지 들어서 계속 듣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기 때문에 솔직히 갈아탈 이유는 전혀 없어. 실용적인 면에서도, 성과면에서도 현재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우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좌가 한 달이 남은 지금 시점, '연장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를 나는 아주 아주 진지하게 고민 중이야.


이 시원스쿨 중국어 강좌를 계속 들어야 해, 짜증 나는데 확 끊어버려?

다른건 진짜 흠잡을 데 없는데 아주 가끔인데 이거만 눈 딱 감고 참을까, 그냥?


어떤 느낌이냐면 (좀 과장해서 말하면)

진짜 나와 천생연분이라고 믿었던 자상하고 완벽한 남자 친구가 알고 보니 가볍게 일베에서 가끔 눈팅하는 걸 알게 된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고 늘 더할 나위 없이 잘해주는 남자 친구가 가뭄에 콩 나듯, 일 년에 한두 번씩 화가 나면 확! 하고 손을 올려서 때리는 시늉을 하는 걸 보면 느낄 거 같은.... 그러한 기분이라고 하면 대충 감이 오지?

강좌의 질과 효험을 떠나서 본능적인 거부감이 드는 일이랄까.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고 남들이 보면 그게 뭐야 할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이별을 고려할 만큼의 무게가 있는 이유. 내 돈 내고 좋자고 보는 중국어 강좌를 보면서 찝찝하고 더러운 기분을 느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지. (연애와 비슷. 좋자고 하는 연애에 돈 시간 버리고 스트레스받을 필요가 있어? 아니 세상에 남자가 애 하나야?)


어떻게 해야 할까.

정들고 완벽하게 나와 맞는 시원스쿨이지만, 아닌 건 아닌 것이니 이제 그만 안녕을 고하고 다른 이상형을 찾아 떠나야 할까. 아니면 애정이 섞인 항의로 변화를 종용하며 한번 더 속는 셈치고 믿어볼까?


서론이 길었지? 이제부터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이야기해볼게.

한번 들어봐 주라.






일상생활 회화를 배우는 시간.

 

공항에서, 식당에서, 직장에서 - 각각의 상황에서 자주 쓰는 표현들을 배우는 아주 유익한 시간이라 즐겁게 듣고 있었어. 오늘의 주제는 굉장히 중요한  < 병원에서  >

중국에 여행 갔다가 아프면 어떻게 해? 잔병 모둠세트인 나에게는 꼭 필요한 강좌라 각을 잡고 흡수할 자세로 임했지. (작년 휴가 때는 태국의 섬에서 뎅기열에 의심되는 병에 걸려서 피 뽑고 육지로 검사 보내고 돈 날리고 귀한 2일이라는 시간을 날림 ㅠㅠ)






'병원에서' 필수 단어.


1번. 씽간. 뜻은 '섹시'

2번. 후쓰. 뜻은 '간호사'


화면에는 일러스트로 짧은 간호사 일본 코스프레복을 입은 여성이 주사를 들고 있었고 엉덩이를 깐 남자 환자는 웃으면서 왕따시만한 주사기를 든 간호사에게 꽂을 주고 있더라.


힘들게 간호대학을 졸업해서 국가고시를 보고 하루에 이만 삼만보를 걸어 다니면서 삼 교대를 하는 내 주변 간호사들의 얼굴이 떠올랐어. 여기저기서 섹시의 아이콘이 되려고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고 근무하는 건 아닐 텐데 말이야.

내가 인스타에 올린 글을 보고 한 친구가 말했어.


'그런 이미지를 이용해서 조금 더 재미있고 학생들이 쉽게 기억하기 쉽게 하려는 거뿐이잖아. 누나 이런 거로  너무 정색하는 거 아니야? 프로불편러야? ㅋㅋ'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런데 그러는 너도 요리사를 '공부 못하는 문제아라서 요리를 배우고 주방일 하는 노동자'라는 구시대적이고 단편적인 이미지로 그려내서 강의에 이용하면 싫지 않겠어? 무식, 불량아여서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다라는 스토리라인으로 단어들을 파생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의가 있다면 너는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중국에서 아파서 병원에 가서 '섹시'라는 단어를 쓸 일이 과연 있을까?

누구를 위해 재미있게 표현한 건데?






사고 싶다. 갖고 싶다.

비싸다, 싸다.


여자 친구는 싼 가방은 싫어해. 비싼 백을 가지고 싶어 해.

여자들은 싫어하는 싼 가방. 나는 싼 가방은 싫어!라고 말하는 여자 친구.

여자들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백'

여자들이 좋아하는 건 뭐죠? 네 맞아요. 가방!


굳이 갖고 싶다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여자'와 '백'을 연결해서 말할 필요가 있는지? 여성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들 중에 더 다양한 표현은 없을까?

나는 백을 가지고 싶지도 않고 남자 친구한테 사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 그렇다고 내가 안 쓴다고 명품이 사치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들고 다니는 친구들 보면 예쁘다고 생각해. 뭐 본인 취향따라 가면 되는 거지, 안 그래? 남자들은 그러면 명품을 안 좋아할까? 누군가는 좋아할 거고 누군가는 아니겠지. 남녀를 떠나서.


그저 '여자는 000' 라며 일관성 있게 쭈욱 한 이미지로 몰아가는 일반화가 불편한 것뿐이야.

좀, 다양한 실용적인 표현들은 없어?






일상 회화 다른 시간의 강의.


엄마의 일상에서 배우는 단어들을 한번 보자.


찌아팅 주푸 가정주부 / 다싸오 청소하다 / 다반 치장하다 / 샤오탕 국을 끓이다 /

시완 설거지 하다  / 셩치 화를 내다 / 화치엔 돈을 쓰다 / 슈어화 말을 하다



이번에는 아빠의 일상

찌우예 취업하다 / 찌아빤 야근하다 / 카이후이 회의하다 /

츄차이 출장가다 / 윈동 운동하다 / 쳐우옌 흡연하다


엄마가 하는 일, 엄마의 일상


나도 막상 들을 때는 몰랐어.

그런데 나중에 공책을 정리하는데 아니 왜 이런 식으로 분류를 한거지? 의문이 들더라. 레고나 교과서에서도 요새는 성역할의 고정관념을 탈피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잖아. 많은 여성 수강생들이 보고 있는 것을 알 텐데도 엄마가 하는 일 / 아빠가 하는 일을 굳이 나눠서 강의를 하는 건 별생각 없이 그게 편하기 때문일까?

시대 감수성에 단순히 뒤떨어진 거라고 봐야 하는 걸까?



아빠가 하는 일, 아빠의 일상 - 직장인의 일상이라고 해도 문제가 없는 단어들.



지금 저렇게 분류해 놓은 것의 제목을 < 가정에서 >   < 직장에서 > 로 바꾸면 어떨 것 같아?

아빠가 하는 일이 아니고 직장을 다니는 직장인들이 하는 일이라고 하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성역할이 없어지더라도 분류와 설명에 전혀 아무 문제가 없어.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거지?


늘 '집'에 있는 것은 마마. 잔소리를 하고 돈을 쓰는 것은 마마.

출근을 하고 '사무실'에 있는 것은 아빠. 힘들게 돈을 벌고 출장을 다니는 것은 빠바.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강좌에서 엄마의 활동반경은 무조건 집과 시장이었다는 것을 일 년여 만에 깨달았어.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내 주변에는 많은 애기 엄마들이 있는데 아무도 저런 일상을 보내며 살고 있지 않은데? 여자들을 늘 전업 주부로 표현하는 것이 슬슬 나는 불편해지고 있어.


나는 분개라도 하고 잘못된 점을 지적을 하고 항의를 할 수있어. 그리고 내 의지로 끊으면 그만이야 사실.

하지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런 자료들로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는 어린아이들은 어떨까? 이런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자연스럽게 '아, 원래 그런가 보다' 하는 인식에 스며들게 되지 않을까?

우리가 그랬고, 우리 윗세대들이 그랬고,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말이야.



넌 어떻게 생각해?

그래도 여태껏 많은 도움을 주었던 시원스쿨과 정들은 쭈샘에 대한 의리로 애정이 담긴 항의 메일이라도 하나 보내고 변화를 촉구하며 한번 더 수강증을 끊을까?

아니면 뒤도 안돌아보고 끊고 새로운 짝을 찾아서 떠나야 할까?







놀러와! :-)


앨리스 (개인 인스타) :  ALICEINMELBOURNE  (앨리스 팀 첫 번째 레스토랑)

SUDA (공식 인스타) :  SUDAMELBOURNE  (앨리스 팀 첫 번째 레스토랑)

NEMO (공식 인스타): NEMOMELBOURNE (앨리스 팀 두 번째 레스토랑)





*답글은 원래 하던 대로 반말로 주고받으면 더 좋을 거 같아!! 나도 그게 편하고, 언니 거나 오빠 거나 친구 거나 동생일 너도 그게 편할 거야, 하다 보면!! 물론 존대가 편하면 그렇게 소통해도 좋아 :-)


**출처를 밝힌 공유는 언제나 환영이야!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돼 :-)




https://brunch.co.kr/magazine/movetoaustralia



https://brunch.co.kr/magazine/your-migr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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