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가 안 되는 곳이라서 손님이 없는 시간이 많았거든. 시간 때우기 용으로 재미 붙일 게임이 필요했지.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그때 단어라도 외웠으면 지금 고생을 덜했을 텐데 싶지만, 공부에 취미 없는 17살짜리가 뭐 아나. 아무튼 그래서 친한 오빠를 졸라서 스타크래프트를 배웠어. 알바를 하는 일 년 내내 나는 스타만 주구장창했고 잉여 시간의 누적도에 따라 게임 실력도 비례해서 올라갔어.
그러다가 중학교 동창 남자들이랑 피시방을 갔고 스타를 했는데 내가 다 이겼거든? 걔네가 못하는 건지 아무튼 나한테 다 졌어. 그런데 남자애들이 머리를 쓰담 쓰담하면서 역시 여자가 게임하는 건 귀엽다고 하는 거야.
그런가 보다 했지. 내가 좀 귀엽긴 해.
나는 요리 유학을 마치고 학위를 보유하고 있고 5성 호텔 두 곳의 경력을 쌓은 9년 차 쉐프가 되었고 두 개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사업가가 되었고 직접 쓴 책의 출간을 앞두고 있는 작가가 되었어.
한국에서 오래간만에 친구들을 만났는데 어쩌다 보니까 요식업 이야기가 나왔어. 그 자리에는 직장을 다니는 회사원 3명과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친구가 있었지. 요새 불황이라 카페도 너무 많이 생기고 해서 가게 사정이 너무 안 좋아졌는데 뭐 방법이 없을까? 하는 질문에서 대화가 시작이 된 거야. 나는 4년 차 레스토랑 오너, 8년 차 쉐프, 요식 경영 전공자로서 내가 배우고 실행해 본 것들 중에 효과가 있는 방법들을 몇 가지 진지하게 제시를 했어.
그런데 듣고 있던 B가 계속 딴지를 거는 거야.
야, 얘 이제 처자식도 있는 몸이라 장사 엄청 진지하게 하는 거야. 이렇게 우리 같은 일반인한테 조언 듣지 말고 전문가를 찾아가. 이러쿵저러쿵 어중이떠중이들 훈수 놓는 거 들어봤자 소용없어.
그래? 전문가가 어떤 사람인데?
뭐 사업 경험 있고 이 쪽일 제대로 전공한 사람?
그래, 그러니까 그게 나라니까?
그래, 너도 이쪽 일하는거는 아는데. 에이~ 그래도 컨설팅은 진짜 전문가 한테 받아야지.
그러니까, 그게 나라니까? 나 경력 15년 차라니까? 유학으로 요식 관광경영 전공했다니까? 나 오성 호텔 쉐프였다니까? 나 지금 내 가게 두개 오픈해서 운영한지 4년차라니까? 내가 지금 하는 말 나도 힘들게 공부하고 경험해서 얻은 거라니까? 나한테 마케팅이나 샵오프닝 조언 들으려고 페이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니까? 뭣도 모르는 이야기를 막 던지는 게 아니라니까?
식당에서 대학교 방학 때 불판 닦아본 게 전부인 - 요식 경력 2개월의 회사원 B와 요식업 경력 15년 차의 현직 오너 쉐프인 나는 요식업과 마케팅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벌였고 당연한 결과지만 내가 우세했어. 왜냐면 나는 배웠다니까? 네가 다른 거 배울 때 내가 이걸 거금을 주고 학교에서 배웠다고. 그것도 영어로! 이 좌식아.........지식배틀에서 점점 수세에 밀리는 것이 느껴졌는지 B는 아아아, 알았어 알았어. 하며 화제를 전환했어.
귀엽다는 듯이 내 볼을 살짝 꼬집으면서 쿨하게 웃더라.
으이그, 여전히 지고는 못 사네. 내가 너 이겨서 뭐하겠냐? 술이나 먹자. 자, 건배 건배~
지금 네가 나한테 져준 거라고 말하고 있는 거니...?
나는 너랑 싸운다고도 생각 안 했어. 솔직히 말하면, 가소로워서.
나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진보를 지지한다고 말을 했지.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나는 성장보다는 분배가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분명히 사회발전적인 면이나 경제성장적인 면에서 부작용이 많은 이념이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저시급은 올라야 하고, 해고는 더 어려워져야 하고, 장애인이나 노인 저소득층에 대한 복지는 더 이루어져야 한다 생각하고 그런 정당들을 지지한다고 나는 내 의견을 말했어.
X가 말했지.
야, 네가 뭘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야. 거시적 경제랑 미시적 경제 공부 좀 해라.
?? 이건 또 뭔 소리야. 그래, 공부했고 알고 있는데도 지지한다고. 해고가 어려워지면 능력이 없어서 조직에 피해를 주는 사람 때문에 다수가 손해를 보는 일이 생길 수 있고 저소득층에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려면 기업이나 고소득층의 세율이 높아지고 전체 경제가 위축이 될 수 있고 최저시급이 올라가면서 고용이 줄어들 수 있고 전체 소비가 줄어들 수 있다는 걸 알아. 진보와 보수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모두 살펴보고도 나는 진보가 옳다고 여겼기 때문에 지지를 하는 거라니까?
네가 너무 편파적인 미디어만 접해서 그러는 거다. 다양하게 신문도 좀 보고 제대로 공부하고 다시 이야기하자. 지는 건 싫어가지고. 하하.
나 사업체 두 개 운영하면서 막대한 세금 내고 호주의 살인적인 최저시급 지불하고 직원들 해고하는 일 안 만들고 정기적인 기부 하면서 살고 있는데? 진보로 세상이 흘러가면 어떤 짐을 더 짊어져야 하는지 똑똑히 인식하고 있다고. 그런 진보의 부작용을 충분히 알고 내가 직접 겪고 있는데도 내가 스스로 결정해서 지지하는 거라니까! 무엇이 더 효율적이고 아니고를 입씨름 하자는 게 아니고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어떤 방향이 옳다 생각하는 지를 말하고 있는 거야.
그걸 받아들이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 인거니...?
한국 직장생활의 어려움, 월급 빼고는 다 오르는 물가와 30대가 돼서 연애를 하니까 느끼는 고충 (대부분 돈 관련 이슈)들에 대해서 신나게 떠드는 그 친구를 물끄러미 보며 나는 너도 나이를 먹기는 먹었구나 를 느꼈어. 머리숱이 많이 줄었더라고.
아무튼 고기도 계속 추가해서 먹고 술도 잔뜩 시켜서 느긋이 먹다 보니 밥값이 꽤 나왔어. 친구가 화장실에 가있는 동안 계산을 먼저 했지. 친구가 떠드느라 바쁠 때 내가 엄청 집어먹었거든.
계산을 내가 먼저 한 것을 안 C가 2차는 자기가 사겠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어.
야, 역시 너는 개념녀야. 예쁜 것.
요새 만나는 애들은 남자랑 밥 먹으면 당연히 내가 사는 줄 안다니까? 너처럼 배려할 줄 알고 남자 기 살려 줄줄 아는 개념녀 어디 또 없냐?
머리를 쓰담쓰담하면서 뿌듯한 얼굴로 '나의 개념'을 칭찬을 하는 그 친구를 보고 있자니 고개가 절레절레 절로 저어지더라.
야, 내가 너한테 귀여움 받으려고 계산을 한 게 아니고. 내가 개념이 있어서 돈을 낸 게 아니고... 단순히 직장인이 벌어봤자 얼마나 버나 해서 사업하는 내가 계산한 거야....... 학생 만났을 때 직장인이 돈 내잖아? 네가 월급 안 오른다고 하도 징징거려서 돈 조금이라도 더 버는 내가 낸 거뿐이야. 네가 말하는 게 무슨 개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개념에는 신경 끄고 너나 개념 좀 챙기지?
지금은 다 까먹었는데 어떤 장면이 기억에 남냐면 김희애 언니가 이승기 대신에 운전대를 잡고 어디론가 가는 거였어. 옆 좌석에 앉은 승기가 희애 언니를 물가에 내놓은 애를 보듯이 염려를 가득 담은 아빠의 눈으로 보면서 이런저런 코치를 하더라. 운전 잘한다고 칭찬도 해가면서 혹시라도 사고를 내서 다칠까 봐 어쩔 줄 몰라하는 자상한 남사친 / 연하남의 면모를 보였지. 87년 생인 승기 옆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희애 언니가 운전면허를 취득한 연도는 1985년. 희애 언니가 운전대를 잡고 나서도 무려 3년이 지난 후 태어난 베이비가 30년 차 운전자를 걱정하고 운전도 잘하네? 우쭈쭈 기특해하고 있는 거야. 이유는? 나는 남자고 너는 여자라서.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니 이걸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싶더라.
내가 작가가 돼도, 호텔 쉐프가 돼도, 사업가가 돼도 '어이구, 쪼끄만 게 그런 거도 할 수 있어? 기특하네' 라고 머리를 쓰담 쓰담하는 일부 남사친들을 대할 때 똑같은 기분이 들지.
내가 지금 웃어야 해 말아야 해?
이게 칭찬이라고 하는 거냐. 얘네는 내가 한 대통령쯤 되고 우주비행사쯤 돼야 너네와 똑같은, 혹은 어떤 면에서는 더 경험이 풍부한 동등한 어른이라고 봐줄까? 36은 아직 어리고 환갑쯤 돼야 내 의견에도 지네들의 것들과 같은 무게를 부여해줄까?
나는 너희를 잃고 싶지 않단다. 좋은 관계 계속 유지하고 싶고 너희 솔직히 가끔 빡치게 하는 거 빼면 다 괜찮은 애들인 거 알아.
너네는 지금 내가 별 의도도 없는 말들 확대 해석하고 꼬투리 잡는 것 같을 거야.
인생 진짜 피곤하게 산다 싶고 일상생활 가능할까 싶을지도 몰라.
그냥, 아 내가 동안이라서 아직 애같은가 보당, 내가 너무 편해서 그런가 보당 데헷 데헷 하고 넘어가면 모두가 편할 텐데. 그치?
다 내가 귀여운 탓이야.라고 좋게 좋게 넘어가면 되는 걸 별거도 아닌 거로 난리다 싶지?
왜냐하면 황당한 상황에서의 "귀엽게 봐줌"이 당하는 나한테는 난데없는 후려치기로 느껴질 수 있다는 생각은 당연히 안 해봤을 테니까. 그런데 이러면 어떨까? 외국에서 네가 동양인으로서 살고 있다고 가정해봐. 너는 걔네랑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사회에 기여하는 성인으로 살고 있는데 네가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주위 반응이 이런 거야. 어이구, 동양인이 귀엽네? (쓰담쓰담) 동양인이 그런 거도 할 수 있어? 동양 남자가 이런 걸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지~ 동양인이 사업도 하고 대단하다 야~ 네가 동양 남자라서 수학이나 할줄 알지 스포츠같은 건잘 모를텐데 잘 설명해줄게~ 역시 쪼끄만 동양인이 운동할 때 기 쓰고 이기려고 하는 건 귀여워~ 야 건장한 백인 남자가 돼서 쪼끄만 동양 남자 애들 이겨서 뭐하냐?라는 이야기를 밥먹듯이 들으면 너는 진짜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아, 다 내가 너무 귀여운 탓인가 보다. 좋게 좋게 생각하자.
너네가 그럴 수 있다면 말해주라. 나도 한번 좋게 생각해보려고 노력이나 해보게.
*답글은 원래 하던 대로 반말로 주고받으면 더 좋을 거 같아!! 나도 그게 편하고, 언니 거나 오빠 거나 친구 거나 동생일 너도 그게 편할 거야, 하다 보면!! 물론 존대가 편하면 그렇게 소통해도 좋아 :-)
**출처를 밝힌 공유는 언제나 환영이야!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돼 :-)
https://brunch.co.kr/magazine/movetoaustralia
https://brunch.co.kr/magazine/your-migr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