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값주고 보면 안될 영화
# 영화 [인랑]의 스포일러가 포함된 리뷰입니다
# Cgv Vip 시사회 이벤트에서 본 영화입니다.
분명 이벤트에 당첨된 공짜 영화였다. 자고로 관객에게 공짜 영화란, 그 평가에 후해질 수밖에 없다. 만이천원의 티켓값을 내지 않고도 종합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관객은 관대해진다. 게다가 어쩌다 요행으로 얻어걸린 이벤트 당첨이니 평가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이벤트 당첨의 기분에 도취되어야 정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닝타임이 끝나고 나오는 시점에 '제값주고 보면 안될 영화'라는 한줄평을 떠오르게 했다는 것은 영화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하나 따져보았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적어도 원작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은 한국의 일반 관객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액션에 흥미가 있는 사람으로써 무엇이 문제였을까 하나씩 적어보았다.
정서적 거리감이 있는 세계관
90년대의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부분은 SF적 요소와 함께 혼돈의 사회을 배경으로 한다. 그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고독감, 정체성에 대한 고민, 전체와 개인 등등의 테마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속의 감수성은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잘 풀어낼 수 있는 영역이자 세계인들이 매료되는 부분이었다. 다만, 이것을 어떻게 한국형으로 바꾸어 오는가가 문제였을 뿐이다. 현지에서도 성공시키지 못한 을 가는 한국의 제작사들에게 응원과 격려는 당연히 필요하지만 제작사들은 좀더 생각했어야 했다. 불과 작년 겨울에 대규모 촛불집회로 전세계의 역사에 대한민국을 각인시켰다. 이런 정서 속에서 화염병을 던지고 경찰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폭력시위가 영화를 보는 한국 관객에게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을까?
특기대의 등장 배경을 위한 설정이었다고 두둔할 수도 있다. 그러나 특기대의 등장 배경이 폭력 시위로만 설명이 될까? 차라리 테러리스트 집단답게 강력한 반군 세력으로 묘사되어야 했을 것이다. 시위 현장에 편승하여 테러를 하는 집단이 아니라 더욱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반드시 특기대만이 진압할 수 있는 집단. 섹트는 위험 테러집단이라고 하기에는 조직력도 없었고 무기도 약했다. 차라리 가짜 뉴스를 이용해 선동과 날조로 승부를 보며 지지받고, 조직적으로 테러를 일으키는 세력이었다고 설정하는 것이 나을 뻔 했다.
훌륭한 설정과 비주얼을 묻어버린 액션씬
김지운 감독의 인터뷰들 중에 [인랑]이 원작에서 차용할 때 가장 중점이 된 것은 검정색 투구에 빨간색 눈동자 이미지라고 밝힌바 있다. 실제로 액션씬들 중에는 이 이미지를 잘 활용한 장면들이 종종 나타난다. 분명 어둠속에서 빨간색 동그라미만 선명해질때 공포감이라던지, 대통령 직속 부대임에도 불구하고 어둠과 구분되지 않는 특기대의 모습. 무게감이 느껴지는 특기대의 발걸음과 상반되는 섹트의 다급한 뜀박질. 첨벙거리는 것과 달리 요란스럽지 않으면서도 공포감이나 무게감이 느껴지는 물소리. 무거운 특기대 철갑옷을 입고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특기대가 분명 섹트의 조직원들에게 줄 수 있는 공포감을 잘 묘사해냈다. 초반 액션씬은 이 영화에 대해 기대할 수 있게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뭐하나! 장진태와 임준경이 싸우는 마지막 장면은 그전까지 차곡차곡 잘 쌓아올린 액션씬들을 한방에 날려보내는 명장면이 되고 말았다. 이전의 훈련 장면에서는 특기대 철갑옷이 아닌 누가보아도 가벼운 몸짓으로 속도감 있는 액션이라고 커버라도 칠 수 있었다.(사실 이때도 하도 카메라를 흔들어댄 탓에 좋은 액션씬이라고 생각은 안했다.) 그런데 마지막 액션 장면이 시작되는 순간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애초에 총알도 튕겨내는 철갑옷을 입고 그렇게 뛰어다니면서 싸운다는 설정도 얼척이 없고, 이전까지 지하수로에서 갑옷입고 멋지게 싸우던 그 액션(묵직하면서도 공포감을 주는)과는 톤도 대놓고 다르며 거기서 굳이 장진태와 임중경이 싸워야할 이유도 모르겠다.(사실 이미 명령 불복종이면....) 싸우는 건 둘이 싸우는데 왜 관객들이 피곤해지는 기분인지 알런지나...
남산타워 싸움씬도 너무나 빈약한 설정 때문에 유치찬란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영화 [아저씨]의 조직폭력배도 방탄유리로 된 차를 타는 마당에, 남산타워의 유리창이 총알 몇방이면 완전히 깨진다? 남산타워에서 맨몸으로 탈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쯤 되면 "이건 배우들 표정만 심각하고 액션은 유치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구나" 하고 포기할 수 있다.
도대체 왜 나왔는지 알수가 없는 인물들과 장면들
사실 스토리의 구조로만 보면 한국 정서에 잘 맞는다. 통일이라는 큰 변화 아래 개인의 자리 보전을 위해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섹트라는 이름의 반군세력을 비밀리에 지원한다. 이는 영화 [부당거래]나 [범죄와의 전쟁]과 같은 조직적 은폐, 조작에 열광하는 한국 관객들에게 딱 맞는 스토리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스토리를 설명하기 전까지 필요없는 인물들과 장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경찰청장은 왜 나왔으며 청와대 비서실장을 만나는데 특기대 훈련부장이 만날거면 특기대 대장은 왜 등장하고(계급상 특기대 대장 앞에서 훈련부장이 다리꼬고 앉아있을 수 있는거야?), 특기대 요원은 왜 굳이 공안에 끌려가서 죽어야 하며(샤이니 민호만 불쌍해), 간호장교한테 치료 받는 장면은 왜 강조되어 나오며(알고보니 독살하는 줄 알았지), 커피 마시는데 어떤게 초코라떼인지 굳이 관객들이 알아야할 이유가 있나? 호흡이 길어야 할 장면은 호흡이 짧고 호흡이 필요없는 장면은 너무나 많다.
게다가 섹트의 자금 담당을 하고 있던 이윤희는 돈 때문에 메였다는 이유로 공안의 끄나플 역할을 했다가 임중경한테 애원했다가 오락가락하니 이게 무슨 민폐캐릭터인가 싶다. 영화에서는 생계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섹트에 들어간 것으로 표현이 되는데 그럴거면 마지막까지 기회주의자적인 모습을 보이던 무얼하던 노선이 분명해야 했다. 이윤희라는 캐릭터를 보고 있으면 고구마만 먹다 끝난 느낌이라 이도 저도 아닌 느낌. 또 마지막 장면에서는 어설프게 신파를 가져가는 캐릭터라 총체적 난국의 화룡점정을 찍었다고 할 수 있겠다. 거기에 임중경이라는 캐릭터도 어설프게 과거의 일에 괴로워하면서도 뭐하나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공안과의 싸움에서 멈추었다면 차라리 "인랑" 소속으로써 훌륭한 마무리를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설픈 이윤희의 설득에 넘어가는 것으로 특기대로써 오랫동안 지켜온 명령체계를 거부했다는 것은 여러모로 납득이 안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마치 축구는 할줄도 모르면서 훈수 두는 참견쟁이가 된것 같아 여러모로 기분이 좋지 않다. 하지만 영화를 좋아하고 한국 영화 중에서도 훌륭한 SF 액션 영화가 나오기를 염원하는 영화팬이었기에 이번 영화 평가에 더 박해졌다.
사실 영화 속에 김지운 감독 특유의 미장센이나 디테일한 연출들이 아주 없는게 아니어서 더욱 실망인 것이다. 남산타워로 향하는 이윤희 손에 들린 "타인의 불안"이라는 책이라던가, 혹여 불이라도 날까 걱정되서 출근한다는 헌책방에서 등불을 켜는 이윤희, 체게바라를 읽는 특기대 임중경, 임중경과의 싸움의 마지막에서 하수구를 바라보는 한상우 등 디테일이 살아있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이게 진짜 감독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영화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허술한 부분들이 곳곳에서 드러났기에 공짜로 보더라도 심란해질 수밖에 없던 영화가 되었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