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사냥이라는 그 새롭고 낯선 시간 속으로
라는 패기 있는 카피를 큼지막하게 내세운 포스터. 아마 80년대를 청춘으로 살았던 사람들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영화 '고래사냥'은 고 최인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고 배창호 감독의 1984년 작품이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떠났다.
난 허수아비 대학생이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나겠습니다.
막상 이 길이 '내길'이라고 생각해서 걸었지만 '내길'이 아니라고 느낀 적은 몇 번이나 될까?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되지 않을까?
김병태는 철학과 학생이다.
그는 인생이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어 철학과에 들어왔지만 정작 젊은 청춘이기에 방황하고 짝사랑에 좌절도 한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자칭 '거지' 민우. 삶의 정수와 희로애락을 이미 관통하는 듯한 민우의 거침없는 태도에 매료되어 병태는 그를 따른다.
민우는 현재의 순간순간을 즐기면서 사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이상을 좇는 (고래를 잡고 싶은) 병태.
병태는 민우를 따라다니다 결국 사창가까지 오게 된다. 거기서 청각장애우 (영화에서는 벙어리라고 부른다.) 춘자를 만나게 되고 고초를 겪는 춘자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런데 춘자는 나머지 두 사람과 또 다르다. 이상을 추구하지도 현실을 하루하루 누리며 살지 못한다. 그녀는 고향에서 지내던 과거의 삶으로 귀의하려고 한다.
내 고향은 우도애요.
춘자.
포주와 실랑이를 하다가 시계를 뺏긴 병태. 시계를 뺏긴 순간부터일까. 병태의 현실의 시간은 멈춘다. 병태는 춘자가 마음속에 품은 고향으로 춘자를 데려다 주기로 결심한다. 이후의 시간은 이상과 꿈이 버무려진 '고래사냥'의 시간이 되고 세상은 바다가 된다.
넌 이 벙어리한테 사랑을 배워야 돼.
얜 니 아픈 몸을 구하려고 자기 몸을 버리려고 했어.. 바로 그게 사랑인 거야.
병태는 민우와 함께하며 구걸하고 먹고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막연하게 관념적으로 알고 있던 것을 현실에서 뼈저리게 경험하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우도에 도착한 세 사람.
그런데 세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서울에서 달아난 춘자를 쫓아온 포주 일당.
병태는 춘자를 보호하면서 심하게 다치고 춘자는 극적으로 말문을 연다. 그에 마음이 동요한 포주 두목은 병태에게 시계 찾으러 오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린다.
이거 봐 안경잡이, 서울 올라오거든
돈가 져 와서 니 시계 찾아가..
시계를 다시 되찾으라는 말은 이제 자신의 인생, 자신의 시간을 되찾으라는 말처럼 들린다.
영화 고래사냥에서 병태의 물건인 시계는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민우를 만나게 된 것도 도난당한 시계 때문이었고 춘자를 만나면서 뺏기게 되었다. 그리고 험난한 여정 끝에 마침내 되찾으라는 말을 듣는다.
이 영화에서 악역이란 요즘 시각으로 '유치하다'라고 할지 모른다. 원작자 고 최인호 님께서 생각하신 또 다른 인간상인지 아니면 그때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 현실적 인물인지 모르겠지만 악역은 악역으로 남지 않았다. 자신을 지키려는 병태로 인해 극적으로 말문을 열게 된 춘자를 보고 감복하는 장면이란..
한국의 전통적 정서를 반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어찌 됐든 악역은 주인공들이 목적지로 갈 수 있게 독려하고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얘, 병태야 고래는 잡았니?
고래는 제 마음속에 있었어요
한편 민우와 병태는 고향에 돌아간 춘자를 뒤로 하고 자신들 만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병태는 고래를 잡으려고 그렇게 험한 여정을 했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고래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고래는 뭘까? 이상적인 목표, 진정한 자아, 관념이 아닌 실제적인 삶? 난 영화를 보고 나서도 한참 동안 사색에 빠졌다.
나도 어딘가에 내 고래가 있기에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면서 찾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