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2026년 새해 첫 '함께 읽기' 책으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여러 학인들과 진도에 맞춰 함께 읽었습니다. 마치 배를 타고 크레타섬에 함께 들어가 거친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돌아온 듯한 시간이었습니다. 때로는 화자의 입장이 되어 망설이기도 하고, 때로는 거칠 것 없는 조르바의 자유를 동경하며 지난 몇 주간을 꽉 차게 보냈습니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마주한 것은 단순한 낭만이 아니라, 무너진 세계 속에서도 치열하게 살아 숨 쉬는 인간 본연의 생명력이었습니다.
1946년에 발표된 이 작품의 뼈대에는 1920~30년대 전간기 그리스의 참혹한 현실이 배어 있습니다. 소아시아 전쟁 패배와 난민 유입, 독재와 전쟁, 그리고 이어진 내전까지 그리스 사회는 깊은 상실감 속에 앓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지중해 문명의 중심에서 밀려나 끊임없는 외세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결코 길들여지지 않았던 크레타만의 역사적 저항 의식이 더해집니다. 무너진 세계 속에서 조르바가 보여준 춤과 웃음은 가벼운 쾌락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념과 종교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 참혹한 시대에, 그래도 살아야 한다며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절박한 생존의 철학이자 몸의 논리였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불교의 무상관, 니체의 생명 긍정, 기독교적 구원, 실존주의 등 다양한 사상을 섭렵한 지식인이었지만, 그 모든 관념도 삶을 대신 살아주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영혼을 일깨운 것은 1917년 갈탄광 사업을 하며 만난 실존 인물 요르요스 조르바스였습니다. 쉰 살의 노련한 광부였던 그는 책상물림 카잔차키스에게 글이 아닌 몸으로 세상을 껴안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업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카잔차키스는 이 만남을 내면의 가장 위대한 승리로 기억하며 조르바라는 불멸의 캐릭터를 탄생시켰습니다.
"모든 게 때가 있는 법이지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건 육반입니다. 우리 마음이 육반이 되게 해야 합니다. 내일이면 갈탄광이 우리 앞에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 마음은 갈탄광이 되어야 합니다. 어정쩡하다 보면 아무 짓도 못 하지요.」(p.54)"
밥을 먹을 때는 밥에 집중하고, 갈탄광에 들어갈 땐 갈탄광이 될 만큼 몰입하라는 그의 말은 항상 '근심과 걱정'을 삶에 짊어지고 사는 화자에게 죽비처럼 다가온 말이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여기'에서 그 순간에 오롯이 집중하고 감사하고 감탄하라는 조르바의 말이야말로 "카르페 디엠', "seize the day" 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 자신 안에 행복의 근원을 갖지 않은 자에게 화 있을진저!」
「남을 즐겁게 하려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금생(生)과 내생(生)이 하나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p.264)
하지만, 여러 감동적인 장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 오늘날의 독자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거대한 장벽은 아마도 여성을 대하는 조르바의 태도일 것입니다. 그의 시선은 때로는 지독히 편협하고, 현대의 성평등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불편한 지점들이 산재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조르바의 여성관은 그가 살았던 20세기 초반 크레타 섬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작가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세련된 도덕가나 현대적인 지성인으로 그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시대의 편견과 야만성까지 고스란히 간직한, 대지에서 갓 뽑아 올린 뿌리처럼 거칠고 투박한 인물입니다. 그의 거친 표현들은 당시 가부장적 사회의 리얼리즘을 반영하는 동시에, 어떤 교육이나 이념으로도 길들여지지 않은 인간 본연의 날것을 보여주는 문학적 장치이기도 합니다.
조르바에게 여성이란 단순한 타자가 아니라 '생명력 그 자체'를 상징하는 거대한 자연과 같습니다. 그는 여성이 자신을 원할 때 거절하는 것을 가장 큰 죄악으로 여기는데, 이는 정복욕이나 단순한 쾌락 추구보다는 소외되고 외로운 존재에게 인간적인 온기를 나누어야 한다는 그만의 독특하고도 투박한 연민과 맞닿아 있습니다. 화자인 '나'가 관념과 체면, 도덕의 틀 안에서 번민하며 뒷걸음질 칠 때, 조르바는 그 모든 계산을 치워버리고 생의 부름에 온몸으로 응답합니다. 그에게 사랑과 욕망은 머리로 분석할 대상이 아니라, 비바람이나 파도처럼 온몸으로 마주해야 할 실존적 사건인 셈입니다.
조르바의 구시대적인 껍데기를 냉철하게 인식하면서도, "삶의 어떤 고통이나 말썽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라"는 그의 생명력을 오늘날의 평등하고 존중 있는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수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혼자 읽었다면 그저 '불편함'으로 남았을 지점들이 다행히 여러 샘들과의 단상 교류를 통해 '새로운 통찰'로 변모하는 과정을 함께 경험했습니다. 그 덕분에 젊은 과부의 죽음을 막기 위해 온몸으로 싸우고, 불쌍한 오르탕스 부인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켜준 조르바의 진면목과 뜨거운 인간애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화자는 끊임없이 형이상학적 질문과 답을 찾는 사람이자, '논리적인 뇌' (좌뇌)가 발달한 사람인 듯합니다. 반면, 일상을 춤추듯 마음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조르바는 '창조적인 뇌'(우뇌)가 우세한 유형으로 보입니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라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어야 하고, 적절한 균형과 조화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책모임에서 만나는 학인들 대부분은 조르바보다는, 머리로 계산하고 내일의 걱정으로 오늘을 유예하는 화자에 훨씬 가까운 사람들일 것입니다. 자유를 꿈꾸면서도 관념이라는 긴 줄에 스스로를 묶어둘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에게 조르바는 이성의 '줄자'와 '저울'을 내려놓고, '마음'이 이끄는대로 살아볼 것을 계속 추동합니다.
연초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던 시간은 더없이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화자처럼, 책에 파묻혀 살고 있는 나에게 조르바는 '계속 그렇게 책벌레로 살 것인가?' 라고 묻는 듯했습니다. 갈탄광 사업이 완전한 실패로 끝난 직후에 화자가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고 했던 모습은 그야말로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떤 '춤'을 추며 살고 싶은가? 나를 행복하게 하는 나만의 '산투르'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끊임없이 질문하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올 한 해, 아무쪼록 우리에게도 이런 조르바의 야성과 감탄이 조금씩 더 스며들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리하여, 크레타섬에 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 기록된 문구처럼, 우리도 집착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삶으로 조금씩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삶의 고비마다 절망 대신 춤을 추었던 조르바처럼, 우리도 매일 조금씩 더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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