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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술한 공작새 May 05. 2019

폭풍우 속 조그만 행복찾기

표리부동했던 하루 일기

  이곳에서는 날씨에 민감해진다. 농부들의 심정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들이 비가 오기를 기도한다면 우리는 날이 가물기를 기도한다. 까미노의 첫 이틀은 비가 간헐적으로 왔다. 온 몸이 흠뻑 젖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체온을 내리고 진흙탕을 만들어 발을 무겁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오늘 비가 온다는 예보에 대해 엊저녁 알베르게에서 이야기가 꽤나 오갔다. 그리고 그때는 아무도 간헐적인 소나기라는 표현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강수량이 시간 당 1mm 정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오늘 아침 서쪽 하늘에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들릴 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기회는 있었다. 아직 숙소에 있었으니 방수바지와 판초우의를 꺼내 입고 스패츠를 착용하면 됐다. 그런데 첫날과 둘째 날에 아직 덜 혼나서였는지 나는 평소와 같은 복장으로 길을 나섰다. 비보다는 처음에 예정된 꽤 커다란 언덕을 걱정했다.     

 길을 나설 때만 해도 비는 첫날과 둘째 날에 흩뿌리던 비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정도라면 얼굴에 미스트를 꾸준히 뿌려주는 정도의 세기다. 초등학교 시절 교무실에 있던 난초가 느꼈을 법한 촉촉함을 느끼며 자갈밭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비바람은 점점 거세져 언덕 정상에 가까워오자 바람에 걸음이 휘청일 정도가 되었다. 흙보다 돌이 더 많은 땅을 밟고 걷느라 미끄러지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렇게 거대한 십자가가 서있는 언덕을 오르고 내려왔다. 이제 오늘의 오르막은 없다. 하지만 언덕을 내려와서도 계속 몰아치는 비바람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게 했다. 안경에는 김이 서리고 물방울로 가득해 바닥과 바로 앞 사람의 휘날리는 판초우의만 보고 걸었다.      


 그러다 삽시간에 비바람이 멈추고 고요가 찾아들었다. 비로소 오늘 여정을 떠난 후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흐린 하늘 가운데 맑은 하늘이 언뜻 보였다. 파란 하늘이 보인다 하고 동행들에게 외쳤다. 회색빛 구름들 사이 파란 하늘은 여태 본 그 어떤 하늘보다 아름다웠다. 메말라 본 자들만이 가뭄 끝 단비의 소중함을 알 것이고 빗속을 걸어 본 자들만이 비가 그친 후 파란 하늘을 보았을 때의 즐거움을 크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조그만 파란 하늘을 보며 걸었다. 이윽고 다음 마을에 도착했고 비바람에 지친 우리는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비바람과 언덕 탓에 길을 떠난 지 거의 두 시간이 지나서야 첫 휴식을 가졌다. 덕분에 오늘의 목적지까지는 반 정도의 거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파란 하늘이 보임에 감사했다. 때맞추어 축복처럼 성당에서 들리는 종소리를 뒤로 다시 길을 재촉했다. 비가 다시 부슬부슬 내렸지만 아까의 파란 하늘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걸으니 썩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약 1시간 뒤, 나는 뺨을 채찍처럼 때리는 우박과 방수 자켓도 뚫는 비바람을 마주하게 되었다. 방수 등산화 속에도 물이 차 걸을 때마다 철벅철벅 소리가 났다. 핸드폰 배터리가 다 떨어져 가는 걸 보고 가방 속에서 보조배터리를 꺼냈지만 물에 흠뻑 젖은 보조배터리는 고장이 났는지 작동하지 않는다. 가방에 매단 조개껍데기 하나가 아니었다면 영락없는 거지꼴이다. 마음속 파란 하늘 따위는 이제 떠오르지도 않았다. 


마음속 파란 하늘같은 소리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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