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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술한 공작새 Apr 18. 2019

테린, 아니, 파테 이야기

루르드에서 만난 프랑스인의 소울 푸드, 파테

지극히 편견과 맞아떨어지던 루르드의 숙소

  이른 새벽에 목이 말라 일어난 김에 물을 마시고 발코니로 나갔다. 밤하늘엔 별이 총총 박혀있고 호젓한 가로등 하나가 동쪽하늘 동이 터오는 산 밑에 서있다. 동이 터오는 산 너머로는 아직 빛을 잃지 않은 샛별이 보인다. 다시 들어와 눈을 감고 여독을 푼다. 한국을 떠나 청두를 경유하여 파리에 내려서 다시 TGV를 타고 카톨릭 성지라는 루르드까지 무려 50시간 동안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한 덕에 잠이 무척 달았다.     


 알람이 아닌 새소리에 잠을 깨 다시 발코니로 나갔다. 저 멀리 깎아지른 듯한 설산이 보이고 앞 건물 지붕에는 새가 앉아있다. 발코니에서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들어와 아래층으로 아침을 먹으러 내려가면 바게뜨, 크로와상, 정물화에나 나올 것 같이 생긴 사과가 지극히 유럽 가정집스러운 테이블 위에 놓여있고 갓 내린 뜨거운 커피에 우유를 탈 것인지 물어보는 백발의 주인아저씨가 있다. 느지막한 아침을 먹고 들어오면 창문 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침대를 비춘다. 한국에서 꿈꿨던 유럽 시골의 모습이다. 그래, 이 정도는 편견이 맞아떨어져야 여행하는 재미가 있지.      


 아침을 먹고 좀 더 자다가 루르드 성지로 나가 한 바퀴 휘 돌았다. 세계 3대 성모 성지라는 어마어마한 이름과는 달리 한적하고 조용하다. 매 시간 정각이 되면 성당 종탑에서는 어렸을 적 자주 듣던 성가의 멜로디가 종소리로 울린다. 그리고 한 곳에서는 모여서 각 나라 언어로 기도하는 이들의 소리가 들린다. 사뭇 경건해진다. 나는 가톨릭 모태신앙이지만 대학에 온 이후 성당에 잘 나가지 않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했지만 딱히 그것이 종교적인 동기에서 나온 선택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알 수 없는 이유에 이끌려 나는 이 곳 루르드에 왔다. 성지를 한 바퀴 도니 허기가 진다. 점심을 먹으러 다시 숙소로 돌아간다.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마음만으로는 이미 VVIP를 찍은 한 와인 바가 있다. 임기학 셰프가 운영하는 도산공원의 라 꺄브 뒤 꼬숑이 바로 그곳이다. 샤퀴테리 전문 와인바인데, 샤퀴테리란 소세지나 햄 등의 가공육을 말한다.     


 군 시절 사회를 그리워하며 에스콰이어 지를 자주 읽었다. 멋진 옷을 입은 사람들이 멋진 차를 타고 멋진 곳에 가는, 그야말로 군인의 허영에 딱 맞는 잡지였다. 전역 후 그러한 옷을 입지도, 그러한 차를 타지도, 그 사람들처럼 잘생겨지지도 못했지만 다행히 시급은 군인 시절보다 껑충 올라 적어도 그 중 몇몇 장소들에는 도전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라 꺄브 뒤 꼬숑은 그 중 꼭 가봐야지 하던 곳 중 하나였다.     


 에스콰이어지에서는 라 꺄브 뒤 꼬숑의 우설 테린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그때까진 우설을 먹어보지도, 테린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다만 어린 시절 어디서 주워들은 바로 우설이 대단히 맛있는 부위라고 해서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나보다. 복학 후 첫 과외비를 손에 들고 설레는 첫 방문을 했다. 테린과의 첫 만남이었다. 우설과 푸아그라를 겹겹이 쌓아올린 우설 테린은 크레페 케이크를 떠올리게 했다.     


전채 요리로 나온 사퀴테리. 상추 뒤로 테린이 살짝 보인다.

 테린의 비주얼을 처음 마주하면 드는 생각은 다 비슷할 것이다. 이게 뭐더냐 싶겠지. 군필자라면 고급 전투식량에 나오는 파운드케이크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아니면 순대에 딸려 나오는 돼지 간을 떠올릴 사람도 많다. 어쩌면 스팸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맛을 보면 이건 지금껏 먹어보지 못했던 그 무언가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모르는 맛, 새로운 맛이다. 비유하자면 고기 맛이 나는 쨈이라고 할 수 있다.     


 테린과의 첫 만남 이후로 두어 번 더 방문을 했지만 올해는 와인 바보다는 갓포에 꽂힌 덕에 늘 라 꺄브 뒤 꼬숑에 가고 싶단 생각만 하고 한 번도 걸음을 못 했다. 그런데 내 생각을 숙소 주인아저씨가 읽기라도 한 듯 오늘 내 눈 앞에 테린이 나타났다. 테린? 하고 아는 척하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주인아저씨는 테린이 아닌 파테라고 했다. 한 입 떠 먹어봤다. 테린이 맞았다. 말을 꺼내자마자 다시 한 번 파테라고 수정되었다. 빵에 발라먹어봤다. 테린이 맞았다. 그것도 아주 훌륭한 테린이었다. 그런데 주인아저씨는 완고하셨다. 세 번째로 수정을 당했다.     

 현지인이 파테라는데 파테겠지 하며 찾아보니 파테 앙 테린이다. 테린은 요리 이름이기도 하지만 파테 앙 테린을 만들 때 쓰는 그릇 이름이기도 하단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파테와 테린을 구분 없이 쓴다고 한다. 굳이 따지자면 달고나와 떼기 정도의 관계인 듯하다. 하지만 나도 오늘부터 파테라고 부르기로 했다. 적어도 어디 가서 파테인지 테린인지 논쟁이 생겼을 때 현지인 찬스가 하나 정도 생긴 셈이다. "루르드의 루피노 아저씨가 파테라고 했다." 라고. 탕수육 찍먹 부먹 논쟁에서 이연복 셰프가 다 필요 없고 자기가 만든 게 제일 맛있다고 했을 때만큼 든든하다.     


 점심에 전채 요리로 파테가 나와서 무척 반가웠는데 주인아저씨에게 격하게 반가움을 표시한 덕이었는지 저녁 식탁에도 또 올랐다. 심지어 한 덩이가 늘어 왔다. 아저씨는 파테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는데 내 반응이 제대로 그 자부심을 건드린 모양이다. 본인 어머니의 레시피대로 직접 만들었고, 이제는 그 따님분이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한다. 아마 이 레시피는 언젠가 그 따님분의 외동딸로 이어지겠지. 이 호텔이 지어진 지 거의 100년이 되었지만 아저씨의 연세를 생각하면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유서 깊은 레시피이다. 한국으로 따지면 종갓집 오백년 김치 양념 배합법 정도 되려나.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유럽음식 방랑기>라는 책을 쓴 장준우 기자의 말에 따르면, 프랑스인의 피는 와인으로 살은 파테로 이루어졌다고 할 정도로 프랑스인들은 파테를 좋아한다고 한다. 즉, 파테는 프랑스인들의 소울 푸드이다. 그러니까 나는 100년이 넘은 레시피로 만든 프랑스인의 소울 푸드를 먹고 있었다.     


 어제는 프랑스 하면 누구든 떠올릴 만한 에스까르고를 먹었다. 하지만 오늘은 프랑스인의 생활 속에 녹아든 파테를 접했다. 그리고 바게뜨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매일 끼니 때마다 열심히 버터, 쨈, 파테 등을 발라가며 먹고 있다. 모든 프랑스인이 매일 프랑스식 요리를 먹고 살진 않을 것이다. 거리에 나가면 이탈리아어 형식의 이름을 가진 피자집과 스시 바가 가득한데다 당장 나만 봐도 한국에서 제대로 된 한식은 하루 내지 이틀에 한 번씩 먹었으니까. 하지만 프랑스에 온 이방인 입장에서는 어디가나 먹을 수 있는 스테이크 같은 음식보다는 그래도 그 나라 음식을 먹어보고 싶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행은 정말 계획대로 되고 있다. 팔굽혀펴기라도 하고 먹어야 하나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점심의 닭가슴살을 제외한다면. 닭가슴살에서는 하나스퀘어 헬스장의 맛이 났다.     

해질녘의 루르드 삼위일체 대성당

 이 곳 루르드엔 내일 하루 더 머문 후 모레에는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 바욘이라는 바다와 가까운 도시에서 다시 2박을 한다. 바욘에서는 본격적으로 걸을 때 필요한 준비물들을 사고, 바다도 잠깐 보고 올 생각이다. 하루에 평균 25km 이상을 걸어야 하는 기간의 시작일이 오늘도 이렇게 하루 더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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