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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술한 공작새 Apr 19. 2019

내 이십 대의 절반에 안녕을 고함

긴 짝사랑의 마침점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언어는 밤하늘의 별빛처럼 반짝이는데 나는 차마 손을 놀려 별을 딸 수가 없었다. 작년 이 맘 때만 해도 상사 열병에 걸려 하룻밤을 천 년 같이 보내며 수 백 수 천 개의 문장을 써 내려가곤 했는데 올해는 도무지 그 무엇으로도 별을 딸 수 없는 것을 보니 이제 사뭇 차가워진 밤공기처럼 내 마음이 식기는 했나 보다.


 내가 너를 못 보던 지난 수년간 너는 내게 마치 신기루와 같았다. 어디엔가는 분명 존재하지만 닿을 수 없던 그런 존재였다. 왜 그때 나는 네 앞에 나타날 수가 없었는가 하는 후회는 접은 지 오래다. 나는 너를 애타게 갈망하면서도 추억 속에 남겨두고 싶었던게지.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했던 아름답게 끝맺은 우리 둘의 추억, 그것만으로도 나는 좋았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날 네가 추천해주었던 책을 그제야 읽었다. 책의 여주인공은 남주인공과 함께 스페인 여행을 떠났지만 도착한 첫날 앓아눕고 만다. 증상의 이름은 안헤도니아. 행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오는 증상이라고 한다.


 화룡점정이라는 말의 유래를 따라가다 보면 한 고사를 마주하게 된다. 용을 벽에다 그리던 한 화가가 마지막으로 비어있는 눈에 눈동자를 그리니 용이 벽을 박차고 승천해버렸다는 일화였다. 나는 애써 그린 우리의 그림이 캔버스를 나와 하늘로 날아가버릴까 두려웠던, 안헤도니아 환자였다.


 그래서 그랬던 것 같다. 새 연애를 해보기도 했고 전역 후 일에 다시없을 정도로 몰두해보기도 했다. 너와의 그림은 미완성으로 남긴 채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나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제대로 그릴 수가 없었다. 용의 눈알을 그려야 한다는 강박이 들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 오랜만에 술에 얼근히 취했던 날, 미친 척하고 전화를 걸었다. 그 용기가 계기가 되어 우리는 점을 찍으러 만나게 되었다. 내가 찍는 점이 용의 눈알이 되어 우리의 추억이 하늘로 날아가버릴지, 아니면 다음 숨으로 이어지는 쉼표로 남을지는 미지수였지만 그 점 하나를 찍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너는 신기루이자 무지개였다. 수년 전 내가 사랑했던 소녀는 그 자리에 없었다. 어쩌면 내 기억 속에만 존재했던 것이었을 수도 있다. 3년 전 우리는 참 순수했고 열정이 넘쳤는데 3년 간의 긴 시간 동안 서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녹차라떼를 가운데 두고 어색한 웃음을 띄우며 취업과 토익과 그 사이의 긴 여백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날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문득 든 너뿐만이 아닌 나도 참 많이 변해버렸다는 생각에 괜스레 서글퍼졌다. 슬프게도 우리의 점은 서로에게 있어 어색한 말줄임표였다.


 3년 전에 네가 추천해 준 책을 이제야 다 읽고 간만에 기억을 되새기며 너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어느새 너는 결혼을 하더라. 청첩장을 보내준다 웃으며 말하던 네게 요즘 바쁘다며 행복하라 하고 전화를 끊고선 네 연락처를 지웠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네 옆에서 환히 웃는, 무지개 끝의 보물을 찾은 그 사람과 네 행복한 웃음을 보며 작년에 진작 진 줄 알았던 내 안의 신기루가 이제야 져감을 비로소 느낀다. 점을 찍고도 무엇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점이 이제야 찍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 일 간 마음이 뒤끓다 이제 한결 편해졌다. 4년 간의 기나긴 소설이었으니 탈고의 고통이 컸던 탓이다. 이제 나는 새로운 소설을 쓸 수 있겠다. 하늘에 반짝이는 언어를 따다 누군가를 위해 새로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비어있는 눈에 동자를 그려 넣고 하늘로 승천할 수 있길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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