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내게 건네준 시간
독감에 걸렸다.
며칠째 고열이 이어지고, 몸은 납덩이처럼 무겁다.
밤새 뒤척이다 겨우 잠들면, 새벽빛이 희미하게 창문을 비춘다.
이불 속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바쁘게만 살았을까.’
몸이 멈추자 세상의 소리도 함께 멈춘 듯했다.
평소엔 알아차리지 못했던 작은 소리들이 귀에 들어왔다.
냉장고의 낮은 진동,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발자국 하나.
그 모든 게 이상하리만큼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내가 지금, 세상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플 때면 마음이 약해진다.
그러나 그 약함 속에서 오히려 마음의 결이 또렷해진다.
평소엔 무심히 넘겼던 말들이 마음에 오래 머물고,
누군가의 “빨리 나아”라는 짧은 문장이 눈시울을 건드린다.
몸이 고장 나면 마음이 맨살처럼 드러난다.
그곳엔 외로움도 있고, 고마움도 있다.
나는 늘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려 애써왔다.
하지만 이 며칠 동안 깨달았다.
괜찮지 않은 순간이야말로, 나를 가장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을.
아픔은 나를 부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틈으로 빛이 들어와, 오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녹인다.
차가운 물로 이마를 적시며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 아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나는 오늘도 기침을 하고, 약에 의지하며 버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쪽이 조금 자라난 것 같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흐르겠지만,
나는 잠시 그 흐름에서 벗어나 나를 바라볼 줄 알게 되었다.
아픔이 내게 가르쳐준 건,
삶이란 잘 견디는 일이 아니라,
때로는 흔들리며 머무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 머묾 속에서 마음은 천천히 자라난다는 것.
오늘은 여전히 아프지만, 이상하게 따뜻하다.
아마도 나는 지금, 회복이 아닌 ‘깊어짐’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