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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deer May 18. 2019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2019-05-18

당신의 연음(延音)

맥박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는
답장을 쓰다 말고

눅눅한 구들에
불을 넣는다

겨울이 아니어도
사람이 혼자 사는 집에는
밤이 이르고

덜 마른
느릅나무의 불길은
유난히 푸르다

그 불에 솥을 올려
물을 끓인다

내 이름을 불러주던
당신의 연음(延音) 같은 것들도

뚝뚝
뜯어넣는다

나무를 더 넣지 않아도
여전히 연하고 무른 것들이
먼저 떠올랐다 

p.18~19.


벌써 오월 중순이다. 오월 초에 이 책을 선물 받았는데 - 무려 시인의 친필 사인본 -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깐 펼쳐 본 이후로 손도 못 대고 있었다. 브런치의 서랍을 열어보니 4월의 '아침과 책' 몇몇이 아무렇게나 들어있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못한) 봄날들은 그렇게 지나가버렸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나는 광고 기사나 열심히 썼다. '애드버', '타이업', '프로모션' 그런 것들 말이다. 늦고 실수하고 열 받고 혼나기도 하면서 간신히 마감을 했다. 그러면서 또 배우기도 했다. 이 나이, 이 연차에 막내 기자처럼 어리바리하기 짝이 없다며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다가, 그러니까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되는구나 깨달음도 얻었다가, 혼자서 '삽질', '난리 부르스', '대환장 쇼'를 해가면서. 일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결국 스스로의 능력과 무능력을 점검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지지난주 통화할 때 너무 바쁘고 할 일이 많다는 내 말에 아빠는 "오늘 다 못 하면 내일 하고, 내일도 다 못 하면 그냥 하지 말고"라며 속 편한 농담을 했었는데, 그 말이 중간중간 생각나 속으로 피식 웃기도 하였다. 뭐 아무튼, 역시 먹고사는 일은 쉽지가 않다, 허허.


오랜만에 아침을 차렸다. 내 사랑 버터를 잔뜩 넣고 시금치 소테를 만들고, 손질해 데친 아스파라거스를 구워 수란 위에 올렸다. 커피와 빵을 곁들여 천천히 먹었다. 그리고 책을 펼쳤는데, 그만 몇 줄 읽다가 눈물이 줄줄 났다. 그 사람 생각도 좀 했다. 옛 연인과 추억과 인간의 고독과 슬픔과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청승 떨기에 꽤 어울리는 날씨다. 마음껏 '여전히 연하고 무른 것들'을 생각한다고 해도 나무랄 수 없도록.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p.82.' 같은 시구가 눈에 걸리고 그러는 거다. 한참을 감상적이다 말고 '연음'을 한자로 입력하려고 맥북에서 한자 키 입력하는 방법을 - 단축키 못 외우는 병에 걸렸나 - 찾아봤다. 이렇게 "오늘도 배웁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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