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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deer Jun 17. 2019

쌈, 마이웨이

2019-06-16

"리얼하기만 하고 어두워서 불편한 것은 피했어요. 리얼하지만 그 세계 안에서 이 네 친구는 패배감이나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신나게 사는 애들이에요. 항상 밝아요. 걔들이 너무 착한 게 판타지라면 판타지겠죠." 2017-07-12 한겨레 인터뷰 중에서


오늘은 아침은 먹었고 책은 안 읽었다. 사실 아침 열한 시에 집을 나서 딸기와 밥을 먹으러 가면서 근처 땡스북스에 들러 책을 사 가려고 했는데 - 먼지가 앉도록 쌓여만 가는 책은 무시하기로 한다, 언젠가는 읽겠지, 읽을 거지? 어!라고 해야지 - 오픈 시간이 12시였다. 아무튼 요즘은 책을 펼치는 대신 내내 티비를 틀었다. 딱 '건어물녀' 포즈로 드러누워 티비만 봤다. 시간이 남는데도 그렇게 했다. 아니 시간이 남아서 그렇게 했다. 일이 바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일만 해서 그랬다. 아, 그러니까, 나 같은 애가 연애를 안 하니까 심심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 남아도는 거다. 아, 그러니까, 나 같은 애가 이렇게 날씨 좋을 때 밖에 돌아다니지도 않고, 뭐 먹는 것도 다 귀찮고, 그저 누워서 티비만 보는 상태가 지속된다는 건 일종의 신호다. 우울이든 현실 도피든. 그 남아도는 시간이 못 견디겠는 거다. 자꾸만 흐르는 시간이 무거운 거다.


그래서 그 남아도는 시간에 책 대신 멍하니 티비를 봤다. 넷플릭스로 철 지난 영화도 한 두 편씩 보고 다큐도 보고 그러다 꽂히는 것이 없으면 티비로 예능도 보고 뭐든 닥치는 대로 봤다. 그러다가 지나간 드라마 다시보기를 결제하기에 이르면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얘기. '폐인' 모드가 되어 화장실 가는 시간을 빼고는 '정주행'을 하는 것이다. 물론 장르는 주로 내 취향의 유치하기 짝이 없는 로맨틱 코미디. <태양의 후예>도 다시 보고 <그녀의 사생활>도 보고 <김비서가 왜 그럴까>도 봤다. 몰론 나는 '금사빠'라서 송중기, 김재욱, 박서준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역시 판타지가 최고다.


<쌈, 마이웨이>는 <김비서가 왜 그럴까>의 박서준이 주연이길래 보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이거 뭐 이렇게 괜찮은겨. 캐스팅도, 연기도, 연출도, 음악도 다 적당하고 적절하고 괜찮은 거다. 무엇보다 대사가, 이야기가 좋았다. 곧바로 작가를 찾아봤다. 임상춘이라는 필명을 쓰는 30대 초반의 여성 작가로 한겨레 단독 인터뷰 내용 외에는 별로 알아낸 것이 없었다. 아, 그런데. “드라마를 쓰면서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는 게 철칙”이라는 말이라든가, “사람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휴대폰으로 드라마를 보면서 웃는 걸 봤어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드라마를 쓰자고 생각했어요.”라는 대답을 읽으며 속이 막 뜨끈뜨끈 해지는 거다.


얼마 전에 "선배는 꿈이 뭐예요?"라는 얘기를 듣고 엄청 당황했던 일이 생각났다. 황당하다 못해 무례한 질문 아닌가 싶어 속으로 괜히 화가 났더랬다. 저기, 그러니까, 내 나이가 이제 곧 마흔인데, 꿈이라니! 뭐 그런 기분이었다. 물론 나한테 화가 나는 거였겠지. 나는 별다른 야망도 배포도 없고, 그냥 결혼하고 아기도 낳고 그렇게 사는 게 꿈이라고 대답하고 돌아오는 길에 기분이 영 이상했다. 뭐 솔직한 대답이었는데, 그렇긴 한데. 


드라마에서 철들수록 꿈이 사라지는 거면 철드는 거 포기하겠다고, 모 아니면 도라고, 한 번 사는 인생 니 쪼대로 살라고...막 그런 '우리에겐 밝은 미래' 류의 메시지들이 하나도 고깝게 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위로가 됐다. 아, 그러니까, 신나게 살고 싶어 졌다. 신나게, 살고, 싶어 졌다.


이야기. 신나게 살고 싶어 지는 이야기. 그런 거, 내 꿈이라고 말하고 싶어 졌다.  


+ 인터뷰 전문

http://www.hani.co.kr/arti/culture/entertainment/80246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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