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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deer Aug 25. 2019

열세 살의 여름

2019-08-24

집 앞 무화과나무에서 열매가 떨어졌다.
그걸 내가 밟고 넘어지면 가을이다.
5월 5일 어린이날은 반팔, 반바지 입는 날. 그때부터 여름 시작.
내가 여름과 가을을 기억하는 방법이다. p.186.


8월도 며칠 안 남았다. 벌써. 좋아하는 차가운 계절이 다가오는 것은 반갑지만, 이러다 올해도 순식간에 끝나겠다 싶어 두려워진다. 어쨌든 시간은 잘도 가겠지. 무서워하면서 매일을 낭비하고 있다. 토요일인 오늘은 해가 중천에 뜨도록 늦잠을 자고 일어나 요거트에 복숭아를 넣어 대충 퍼먹으면서 지난주에 주문한 책 중에 한 권을 펼쳤다. 만화책이라 술술 넘어가서 앉은자리에서 금세 다 읽었다. 무화과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를 밟고 넘어지면 가을이구나, 한다니! 예쁘기도 해라. 하긴 나도 어릴 때는 똑똑하고 생각도 깊고 섬세한 아이였지, 머릿속으로 쓸데없는 혼잣말을 해가면서 책장을 넘겼다. 주인공인 해원이가 언니랑 둘이 종아리를 빈 병으로 밀면서 깔깔대는 장면에서는 - 함께 쓰는 방에 31일에 개학이라고 빨간 동그라미가 쳐진 8월 달력이 벽에 걸려 있다 - 자매님과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아, 근데 내가 6학년 때 좋아했던 그 아이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뒤이어 읽기 시작한 김애란의 산문 <잊기 좋은 이름>에서처럼 '~이제는 피곤한 얼굴의 도시 노동자가 되어 있을 한 남자아이도. 그 애도 이제는 나처럼 예전보다 모든 일에 재미를 덜 느끼고 또 덜 놀라는 어른이 돼 있을지 모르지만. p.23.' 하고 잠깐 생각했더랬다. 또 여름이 지나가고 있고, 추억은 이렇게 방울방울이네.


며칠 전 우연히 <백 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쓴 김형석 교수의 인터뷰를 읽고 이런저런 생각을 했었는데, 오늘은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을 쓴 이근후 교수의 인터뷰를 읽게 됐다. 오후 늦게 서촌에 있는 에토프 쇼룸에 가는 길이었는데, 사람으로 가득한 지하철 환승역 계단에서 하마터면 울 뻔했다. '- 50년 넘게 15만 명을 진료하면서 깨달은 것이 삶의 고통은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에 집착해서라고요. 딱 제 얘기 같았습니다.(웃음) - 그게 대표적인 환자의 증상이야(웃음). 49% 병리에 51% 정상이면, 다들 겉으로 보이는 51%로 정상인처럼 살아갑니다. - 억울한 생각, 불안한 생각이 차오를 땐 어찌합니까? - 그런 생각은 인위적으로 끊어낼 수 없어요. 잊으려고 애쓸수록 과거는, 미래는, 괴물처럼 커져요. 방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는 일을 찾는 거예요. 원한은, 걱정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즐거운 일을 찾아서 야금야금해야죠. 상한 마음이 올라올 틈이 없도록. 불안을 끊어낼 순 없지만 희석할 순 있거든요. 그렇게 작은 재미가 오래 지속하면 콘크리트 같은 재미가 돼요.'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필요하다고. '인간은 죽을 때까지 버텨야 하는 운명'이고, '운명 앞에서 약자인 자신의 처지를 고뇌하며 꿋꿋하게 버텨내는 게 인간다운 삶'이라고. 다행히 눈물을 흘리지 않고 무사히 출구로 나가며 사두고 아직 펼쳐보지 못한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라는 책을 떠올리는데, 이번엔 무시무시한 '태극기부대'와 딱 맞닥뜨리고 말았다. 맙소사...


기사의 사진 캡션에서 읽은 건데, 유엔의 100세 시대 생애주기에 따르면 1세~17세가 미성년, 17세~65세가 청년(!), 65세~79세가 중년, 79세~99세가 노년이라고 한다. 곧 마흔이네, 중년이네 떠들어댔던 입을 얼른 꼭 다물 수밖에. 네네, 아직 새파랗게 어린것이옵니다, 크크. '죽는 것 따위 하나도 두렵지 않던 시절. 정말로 용감하다기보다 죽음이 너무 멀어, 죽음이 추상이라 깔봤던 때. 나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삶을 업신여기는 방식으로 삶을 만끽하며 젊음을 누렸다. p.16. <잊기 좋은 이름>' 어쩌면 지금도 마음껏 젊음을 낭비해도 괜찮은 나이일지도.


또 아직은, 세상에 귀여운 사람들과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가능한 것 같다. 그래서 참 다행. 예를 들면 요즘은 네이버 블로그 '더농부'의 '사무실 농부' 시리즈, 유튜버 '성호육묘장' 아저씨(와 동물 친구들), <삼시세끼> 산촌 편의 흥 많은 염정아 언니, 배우 성훈의 애견 '양희' 이야기, <캠핑클럽> 속 핑클 때문에 쫌 웃었다. 아 물론 수수, 보리 고양이가 최고지만!


그러고 보니 오늘은 열세 살부터 백 살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을 오간 하루였네. 열심히 살아서 피곤하니까 그만 떠들고 '쇳덩이처럼' 푹 자야겠다. 귀엽고 똑똑한 할머니가 되려면 말이다.


P.S. 이근후 교수의 큰 아들이 천문학자 이명현 선생이라고. 자신은 미시적인 사람의 마음을 다루지만, 아들은 가시적으로 광대한 우주를 설명한다고. 뭐야 멋있잖아.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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