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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deer Jan 15. 2020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2020-01-14

그렇다. 인간은 허약하므로 무언가 부여잡고 삶을 지탱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혼신을 다해 사랑하고 원망할 대상을 찾는다. 죽거나, 미치거나,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하늘이 무엇을 말하던가?"(天何言哉.) 신이 침묵할 때 인간이 할 일은 무엇인가? 공자에 따르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 들지도 말고, 신과 거래하려 들지도 말고, 스스로 신이 되려고 들지도 말고, 완전히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도 말고, 신을 무시하지도 말고, 신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도 말고, 신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인간에게 허여된 일을 하다가 죽는 것이다. p.146-147.


유치원 방학이 끝났다. 만세! 왜 만세냐 하면, 어린이들이 유치원에 간다는 것은 친구가 그 시간에 나와 놀아줄 짬이 난다는 말이기 때문. 흐흐. 아무튼 오늘은 어린이를 등원시킨 친구가 요가 갔다가 커피 한 잔 하러 오겠다고 연락이 와서 아예 아침(친구는 점심)을 함께 먹기로 했다. 열두 시 반에 식당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는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머리도 감고 여유를 부렸는데, 알고 보니 시간 계산을 잘못한 거였다. - 역시 새해에도 변함없는 나란 인간... 쯧쯧 - 늦은 데다 날은 춥지, 걸어가기에는 조금 멀고 지하철을 타기에는 애매한 거리니까, 하고 합정역에서 망원역까지 택시를 탔는데, 이럴 수가. 이번에는 지갑을 안 가져온 것을 발견했다. 정말 당황했지만 기사님께 - 다행히(?) 여성분 - 한참 죄송한 뒤에("정말 죄송하겠어요!" / "... 아하하, 네네, 정말 죄송해요") 계좌 입금해드리고 무사히 하차할 수 있었다. 먼저 도착해 좋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친구를 보자마자 오늘의 바보짓을 고백하며 사과하고 웃을 수밖에.


그 와중에 챙겨간 책은 겨우 한 챕터를 읽었을 뿐이다. 친구와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집 앞 미용실에 들러 - 실은 집에 잠깐 들러 지갑을 챙겨 다시 나가서 - 앞머리를 다듬고 오자마자 청소, 빨래, 설거지 3단 콤보를 하고 쓰레기를 내다 버리고 저녁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더니 벌써 8시, 9시인 것이다. 큰일이네. 그런데도 오늘 요가는 패스. 배도 너무 부르고 밖은 너무 춥고 좋아하는 선생님 수업도 아니고, 핑계는 잘도 갖다 붙인다. 대신 티비로 유튜브나 틀어놓고 이것저것 보다가 조성진의 라흐마니노프 연주를 듣는다. 아름답다. 살짝 삐끗하는 부분조차도. 좋은 오디오가 있었으면 하면서 뜨끈한 바닥을 굴러 다니다가 뉴스 기사를 읽는다. 그러다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얼음은 녹고 불은 나고 화산은 폭발하고 동식물이 다 죽는데, 너무 복잡한 마음이 되어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고 한참을 누워 있었다. 뭣 같은 인생을 '소소한 근심' 따위로 버텨보려고 해도, 진짜 근심거리들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신과 거리를 둔다고 해서, 공자가 기도를 게을리한 사람이었을까? 공자의 병이 위중해지자, 제자가 신에게 기도하기를 청한 적인 있다. 그때 공자는 짧아서 그 뜻을 혜량하기 어려운 한마디 말을 남긴다. "나의 기도는 오래되었다." (丘之禱久矣.) 이것은 신에게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기도해왔다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신에게 기도한 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이야기일까? p.147.


내일 아침에는 삼성동까지 가야 한다. 얼른 자야 하는데.


그러나 공자를 무결점의 인간으로 만들고 싶은 것은 후대 사람들의 열망일 뿐, 나는 오히려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황동규의 시 <기도>의 마지막 구절을 상기한다.
 
깃대에 달린 깃발의 소멸을
 그 우울한 바라봄, 한 짧고 어두운 청춘을
 언제나 거두소서
 당신의 울울한 적막 속에

p.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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