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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deer Jan 10. 2020

내가 있는 곳

2020-01-09

얼마간의 돈으로 멋지지만 사실상 필요 없는 물건을 사고 나면 늘 마음이 괴롭다. 돈 한 푼이라도 신중하게 계산했고, 내게 지폐를 주기 전에 혹시나 한 장이 더 붙어 있는 건 아닌지 비벼보던 아버지 때문이 아닐까? 외식하는 걸 몹시 싫어하고, 카페에서 파는 차 한 잔 값이 슈퍼에서 파는 스무 개짜리 차 한 박스 값과 맞먹는 걸 허용할 수 없었던 아버지 때문이 아닐까? 부모님의 엄격한 규칙이 나로 하여금 늘 더 저렴한 옷과 축하 카드와 메뉴판 요리를 선택하도록 한 것일까? 그래서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기 전에 푯말을 읽으려 하는 사람처럼 상품을 보기 전에 가격표부터 확인하는 걸까? p.100.


아침으로 빵과 커피를 차려놓고 책에 가름끈을 - 책갈피 말고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 방금 찾아봤다. 갈피끈 혹은 가름끈이라고 한단다. - 끼워둔 부분을 펼치자 이런 글이 나왔다. 아, 저 마음 너무 잘 알지. 작가의 부모님 못지않게 나의 부모님도 검소한 편이다. 그러나 나는 작가와는 조금 다르게 자란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반발심 때문인지 갖고 싶은 게 생기면 기어코 사버렸던 것이다. 한 달 용돈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다 써버리는 식, 분에 넘치는 것이라도 일단 사고 보는 식, 그러고도 예쁜 것이 보이면 갖고 싶어 안달이 나는 식이었다. 그래서 자매님과 달리 늘 용돈이 부족했다. 문제는 여전히 그렇다는 것.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보곤 하던 대학생 때 이후로 읽고 싶은 책은 무조건 사서 보고, 맛있다는 곳을 알거나 먹고 싶은 것이 생기면 먹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니까 반드시 사 먹고, 수수와 보리는 '소듕하니까' 사료도 제일 좋은=비싼 걸로만 사 먹이고(쌀값의 몇 배다)... 게다가 요즘은 인스타그램 광고 때문에도 쓸데없는 소비가 느는 것 같기는 하다. 그렇지만 나에게도 변명의 기회는 필요하다. 모두 다 '소확행'일 뿐, 몇 백만 원 하는 '명품' 가방을 사모은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이유가 다 있다니까!


'그는 사치하는 일은 있어도 낭비는 절대로 아니합니다'라는 피천득의 '구원의 여상' 속 한 문장을 마음에 담아두고 오래 생각했었다. 예전에 지큐 강지영 기자님이 어딘가에(<지큐>였나 <오보이>였나, 가물가물) 쓴 글을 읽고 알게 되었더랬다. 단정하고 고운 글이었다. 곧바로 '돈의 가치를 명심하면서도 인색하지 아니합니다'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그런 태도로 살아가야겠다고, 가진 돈도 별로 없지만 그러면 되겠다고 생각했더랬다. 이 나이 먹도록, 이렇게 터프한 세상에 살면서, 내가 가진 '경제관념'은 그게 전부. 나라는 인간은 정말 어쩌나 싶지만, 뭐 어쩌랴 싶기도 한 것이다. 그럼에도 요즘은 조금씩 애써봐야겠다고 생각은 한다. 수수와 보리도 끝까지 돌봐야 하고, 나도 귀엽고 멋진 할머니가 되려면 품위 유지비가 필요하단 말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 그 후로도 - 지구가 망하면 안 되니까 말이다. 미니멀 라이프니 제로 웨이스트니 그런 거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왕 물건을 살 거면 쓰레기와 오염을 덜 만들어내는 것으로, 아름다우면서도 오래 쓸 수 있는 것으로, 가치는 높고 비용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것으로 신중하게 골라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며칠 전에는 대나무 칫솔과 유기농 햄프코튼 재사용 화장솜을 샀지. 신규 회원 가입 쿠폰까지 '먹여서', 과대 포장이 묘미인 '친환경 오가닉 쇼핑몰'에서. 촤하하.


그렇지만 사람은 가끔 쓸모없이 아름다운 것을 가지고 싶은 법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에밀리 디킨슨이 편지 봉투에 쓴 시를 모은 책 <The Gorgeous Nothings>가 떠오른다. 당장 장바구니에 넣고 싶네.


그는 바닥에, 침대 아래, 안락의자 쿠션 사이에 떨어져 잊고 있던 동전을 버리고 싶어 했다. "아무 가치가 없어, 그걸 주워봐야 아무 소용 없어"라고 그가 말했다. 그는 몇 년 동안 가구 뒤에 쌓인 먼지 더미와 함께 그 동전들을 모두 쓸어 버렸다. 순간 나는 우리의 관계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가슴 아프지만 명확히 깨달았다. p.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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