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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deer Jan 24. 2021

집을 쫓는 모험

2021-01-24

돈이 없으면 우아하게 살 수 없다. <폰 쇤부르크 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이란 책이 있다. 폰 쇤부르크는 구조 조정으로 언론사에서 퇴직당한 기자. 그가 쓴 위 제목의 책은 돈 없어도 나를 지키고 우아하게 사는 생각과 태도에 관한 글이다. 해박한 문화인류학적 지식, 송곳 같은 통찰이 빛을 발해 재미있게 읽었는데 중간중간 '응? 이렇게 사는 것은 우아하지 않은데?'라는 생각도 들었다. 비싼 와인을 마시지 않아도 되고, 돈을 아꼈다가 휴가지에서 펑펑 쓰는 것을 자제하고, 공기 탁한 헬스클럽에서 차례를 기다렸다가 운동하기보다 집에서 팔굽혀펴기를 하고, 공원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 된다는 제안. 어떤 맥락과 메시지인지 알지만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들었다. 더 즐거워지고, 새로 시작하기 위해 우리에겐 가끔 와인이 필요하고, 잠시 돈 걱정 붙들어 매고 마음 편히 비싼 것, 맛있는 것 먹으로 해외여행도 가야 한다. 최신 기구가 있는 헬스클럽에서 폼 나게 운동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때론 그런 사치가 우리를 다시 건강하게, 열심히 살게 한다. p.44


여의도로 출근한 지 어느덧 3주가 흘렀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이런저런 일 때문에 실로 오랜만에 '스트레스 만땅' 상태를 경험했다. 하지만 오늘은 음악이나 들으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 '존버'하리라, 속으로 마음을 다잡아 보는 느긋한 일요일 밤. 그래도 사정이 있어 하루 종일 굶고 종종거리며 일할 수밖에 없었던 목요일 재택근무 날 저녁에는 쫌 많이 서러웠다. 다행히 저녁으로 제주 흑돼지 한 근에 공깃밥 두 개, 김치찌개까지 거의 남김없이, 말도 없이, 혼자서 먹어치우는 여자 친구를 위해 묵묵히 고기를 구워주는 남자 친구가 곁에 있어(자랑이다, 물론 두고두고 놀림감이긴 하겠지마는) 아침에는 다시 씩씩하게 일하러 갈 수 있었다.


오늘은 눈뜨자마자 오랜만에(하, 코로나!) -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번 등록 기간 마지막으로 - 테니스 레슨을 받고 와서 기분 좋게 샤워를 하고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3주 동안 아침을 거의 못 챙겨 먹은 것은 물론 책도 펼쳐보기가 힘들었다. 위의 발췌는 평일 밤에 그나마 조금 읽을 수 있었던 앞 페이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 수수의 방해로 겨우 몇 줄을 더 읽었을 뿐이다(지금도 무릎 위에 올라와 꾹꾹이를 하면서 방해하는 중이다). 고양이 정말 뭘까...


또래들이 적금을 붓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파트를 사고 대출금을 갚는 동안, 훔쳐갈 거라곤 없이 책만 잔뜩 있는 코딱지만 한 월세방에 13년을 살면서 고양이들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는 자신이 가끔 한심하게 느껴질 때도 물론 있다(사실 은근히 많다). 게다가 요즘은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 한 도무지 감당이 안 될 서울의 아파트 가격을 보며 반 포기 상태인 것도 있고. 그러나 여전히 아파트보다는 내게 꼭 맞는 집이 있을 거라고, 언젠가는 내 가족과 그런 집에서 오손도손 살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해보는 것이다. 꿈처럼 아득한 일이라고 해도. 아무튼 그런 마음으로 기웃거리다 산 책인데, 꽤 재미있게 읽고 있다.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그래도 꿈을 계속 꿔보라고 조언해주는 선배 같달까.


우아한 삶은 안정적 경제 상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가끔 생각한다. 70세 넘은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스시가 먹고 싶으면 마음 편히 먹고,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클래식 음악 공연에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영화 <아무르>의 노부부처럼 편한 옷차림으로 오늘 본 공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더 이상은 바라지도 않고 딱 그 정도만 되면 좋겠다고. 그런데 소비할 때마다 통장 잔고가 신경쓰인다면 그건 우아하지 않다. 우아함에는 일단 불안이 없어야 하는데 현대인의 주된 큰 불안은 역시 돈에서 시작된다. 나 역시 그랬다. 좋은 음악, 공연, 미술, 책, 건축을 일상으로 접하는 잡지기자로 살아 좋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늘 불안했다. 예순까지 정년이 보장되는 직업도 아니고, 어느 날 회사를 그만두면 어떻게 먹고살아야 한단 말인가. ~ 당장 회사를 그만두어도, 어쩌다 노인이 되어도 먹고사는 데 걱정이 없는 사회가 되지 않는 한 아파트값은 잡힐 것 같지 않다. p.45


먹고사는 일과 노후 걱정을 비롯한 온갖 고민으로 일찍 잠들지 못하는 직장인의 눈에는 형광펜으로 밑줄이라도 그어둬야 할 것 같은 문장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별 수 없지 뭐, 자고 일어나 씩씩하게 일하러 가야지. 월급을 받으면 고기 구워주느라 고생한 남자 친구와 비싼 스시나 먹으러 가야겠다.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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