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거실에는 티비가 없었다.

나를 키워낸 책들

by 꼬마거인

어릴 적 우리 집 거실은 사 면이 온통 책이었다.

티비장이 들어갈 곳에는 책꽂이가 자리 잡고 있었고,

천장만 한 책꽂이 속에는 얇고 두꺼운 책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엄마는 책을 좋아했다.

어릴 적 당신이 그러지 못한 걸 복수라도 하겠다는 듯이 책을 읽었고 사 모았다.


우리 자매의 옷이나 장난감은 사촌에게 물려받은 걸로 어찌어찌 때울 망정,

책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관대했다.

덕분에 나는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언제든 볼 수 있었고,

매달 엄마가 배송시키는 책들로 인해 주기적으로 택배상자를 뜯는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릴 적 나의 책 취향은 오로지 엄마의 마우스 클릭에 의해 결정되었다.

엄마의 책구매에는 경향성이랄 게 없었다.

어릴 적에는 동화 전집, 시공주니어 소설 시리즈 등으로 일관되었던 반면,

우리 자매가 커 갈수록 엄마의 도서목록 범위도 넓어졌다.


어떤 날에는 르네상스 시대로 빠졌다가, 조선왕조실록, 삼국지, 초한지로 시대를 거스르기도 했고,

소크라테스와 니체, 공자를 넘나들며 철학에 몰두하기도 했으며

과학, 미술, 건축, 자연사를 차례차례 탐닉하기도 했다.


나는 세 자매 중 유독 책을 좋아했다.

좋아한다기보단 중독이었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릴 것이다.

어릴 적의 나는 밥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자기 직전까지도 책을 달고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내가 꽃힌 게 게임이나 드라마, 혹은 사람이 아니었음이 다행이었다.


우리 가족은 주말마다 도서관에 갔는데, 다섯 가족 이름으로 총 15권을 빌릴 수 있었다.

엄마에게 2권, 동생에게 3권을 양보하고 나면 나머지 10권의 책은 전부 내 몫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릴 책을 찾는 일은 내겐 무척 즐거운 방황이었다.

이거다 하는 책이 나올 때까지 찾고 또 찾았다.

그러다가 하나에 꽂히면 선 자리에서 전부 읽어버리기도 했다.

물론 편식이 심했던 내가 읽었던 건 대부분이 소설이었다.


토요일에 책을 빌리면 일요일 저녁까지 10권을 다 읽었다.

엄마한테 혼날까 봐 모두 잠들고 나면 혼자 불을 켜고 새벽 2시까지 책을 읽다가 잤다.

그리고는 일요일에 다시 도서관에 가서 새로운 12권을 빌려왔다.

이제는 그다음 토요일이 올 때까지 얘네들로 버텨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그랬다.

책으로 시작해서 책으로 끝나던 날들이었다.

잠들기 전 아빠가 읽어주던 부엉이 이야기,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리며 읽었던 예손미디어의 만화한국고전,

벼룩시장에서 오백 원에 사 온 능인 만화고전 말괄량이 길들이기,

포장마차에서 술 취한 아빠 옆에 앉아 읽던 피노키오,

동생과 싸우고 읽었던 B사감과 러브레터,

플루트 선생님 집에서 악보 대신 정독한 삼국지,

피아노 학원의 무서운 원장 선생님 눈을 피해 읽던 만화한국역사 시리즈,

미술 학원 불이 꺼질 때까지 정신 놓고 읽은 프뢰벨 어린이세계명작 전집,

중간고사 기간에 부모님 몰래 밤새 다 읽은 해리포터,

단짝과 싸우고 울면서 읽었던 내 영혼의 닭고기 수프.


가만히 책 이름을 하나씩 떠올리면 당시의 상황과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어른이 된 나를 풍요롭게 만드는 건 대단한 철학이나 가르침이 아닌, 달콤 짭짤한 그림과 이야기들이었다.


나를 키워낸 책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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