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역치

내 행복의 가성비를 따져봤다.

by 꼬마거인

항상 어서 서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나이에 가까워지니까 거부감이 든다.

가족, 책임감의 증가, 건강 등 다른 이유보다도
내 행복의 역치가 올라가는 것에 거부감이 든다.

10평 살다가 20평은 살아도
20평 살다가 10평은 못 산다더니

행복도 딱 그런 거 같다.

하굣길에 엄마 몰래 동네 마트에서 사 먹었던
500원짜리 돈돈 초코볼이나
600원짜리 가나 초콜릿으로 꽉 채워졌던 행복이,


머리가 크면서 abc 초콜릿을 먹어야 채워지고
초코하임은 되어야 했다가
허쉬 키세스가 되고
설빙의 초코 빙수가 되는,

이렇게 어른이 되는 건가 싶으면서도
여기서 더는 행복의 역치가 올라가지 않길 바란다.

다행히 아직은 abc 초콜릿에도 달큰한 행복을 느낀다.
이렇게 가성비가 좋다니..
가뜩이나 먹는 양도 적는데..ㅎ

전에는 잘 몰랐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나는 사소한 것에도 행복을 쉽게 느끼는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끓여먹는 라면 한 그릇이 너무 행복하고
조용한 방에서 좋아하는 영상 틀어놓고 집안일하는 순간이 너무 행복하고
더운 날 에어컨 틀어두고 유리컵에 망고주스를 따라 마시는 게 너무 행복하고
식당에서 짭 김치볶음밥이랑 짭 양념치킨 픽업해서 조금씩 나눠먹는 게 너무 행복했다.

파키스탄에서 친해진 언니와 두바이에서 하루에 48만원짜리 방에 묵고
수십만 원어치 쇼핑을 하면서 은연중에 행복하기보다는 불안했다.
사회 초년생인 내겐 감당 안 되는 사치임을 알았기에.

주변의 기준에 다 맞춰 살아가려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입속에 바늘이 걸려 뭍으로 끌어올려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급격한 수압 차이로 부레가 부풀어 오른 채 허덕거리며 그제야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가 마음 놓고 숨 쉴 수 있는 곳은 여기가 아님을.

아직의 나는 어려서일까
귀한 것을 경험하기보다는
신기한 것을 경험해 보고 싶다.

좋은 물건을 갖고 싶기보다는
좋은 마음을 갖고 싶다.

돈이 되는 일을 하기보다는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몸이 편한 걸 하고 싶기보다는
할 수 있는 걸 그냥 해보고 싶다.

하지만 나 역시 어느 정도 속세의 맛을 알게 된 사람인지라
어떤 부분에서는 전보다 더 좋은 걸 원하게 되고
전보다 더 나은 컨디션을 바라게 된다.

아마 서른이 되는 동안 지금보다 더 많은 좋은 것들을 경험하게 될 거고
자연스레 세상에 대한 내 기준치는 더 높아지게 될 거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존중하기 위한 기준은 높이되,
행복의 역치는 가능한 천천히 높아지길 바란다.
누구보다 나 스스로를 위해서.

그래서 서른의 내가 여전히 사소한 것에도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길,
초코빙수의 맛을 알지만 abc 초콜릿에도 비슷한 행복을 느낄 수 있길,
하지만 내게 안 좋은 걸 아무거나 주워 먹지는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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