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토록 우아한 할머니 되기

유튜버 크리에이터 '밀라논나'가 보여주는 말의 품격

by 알지
2.jpg?type=w773


'밀라논나'. 밀라노 할머니라는 뜻의 이태리어.

"헬로, 아미치~(안녕, 친구들)"라며 손녀에게 이야기를 건네듯 따뜻한 음성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한 여성이 있다. 나는 그녀를 포털 사이트 한 게시판에서 누군가 그녀의 영상을 캡처해 올려놓은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리고 흥미가 생겨 영상을 한 편 눌러보았고, 이것을 시작으로 나는 그녀를 '구독'하게 되었다.


진주가 잘 어울리는 패셔니스타 할머니, 장명숙.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러니까 20대 초반일 때부터 '진주 목걸이가 잘 어울리는 할머니가 되어야지'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진주 목걸이가 유일한 장신구였던 나의 어머니를 보고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의 이런 생각에 딱 어울리는 '할머니'를 만났다!

여기, 화이트 드레스와 진주를 기가 막히게 소화하고 계시는 이 분.

이 분이 바로 장명숙, '밀라논나'이시다.



'우리나라 최초의 밀라노 유학생'이 그녀의 인생을 가장 빠르게 설명할 수 있는 수식구일 것 같다. 얼굴이 못생겨 어릴 때부터 옷에 관심이 많았다는 소녀, '돌체 앤 가바나'의 '돌체'와 같이 나란히 앉아 공부했다는 이 할머니가 나에게, 그리고 3040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이유는 이 분의 화려한 경력보다 -물론 이 역시 멋지고 훌륭하지만- 워킹맘으로서, '52년생 장명숙'이 관통했던 삶 자체가 감동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우리 세대에는 이런 선배 여성이 필요했어. 이렇게 삶으로 보여주는 여성이.



'밀라논나'를 만나고 옷장 정리를 하다.


'밀라논나'는 패션 채널이다. 나는 유튜브 영상을 많이 보지 않을뿐더러 '명품 하울', '언박싱' 영상들이 넘쳐나는 것을 보면 골치가 아파진다. 어째서 이 세대는 끊임없이 소비를 부추기는가. 그리고 이러한 영상 앞에서 나 역시도 영향을 받고 자유롭지 못함을 고백한다. 그런데 '밀라논나'가 여타의 패션 채널과 다른 차이점은, 보고 나면 '저거 사야지, 갖고 싶다'가 아니라 '내가 가진 저것과 비슷한 게 뭐가 있더라'하게 된다는 것이다.(그녀의 옷장을 보면 몇십 년 이상 된 옷들이 대부분이다.) 옷을 사는 것도 멋이지만 내가 가진 옷들을 잘 '관리'하고 '오랫동안' 입는 것이 진짜 '멋'임을 그녀는 가르쳐 준다. 하나를 사도 제대로 된 것을 구입하고, 그것을 잘 관리하여 오랫동안 입을 것. 그녀를 만나고 더 확고해진 나의 쇼핑철학이다. (영상을 보면 그녀는 공항에서 받은 스티커, 줄 등도 그냥 버리지 않고 재활용해서 다시 쓴다. 환경을 늘 염두에 두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옷장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철 지난 옷들은 차곡차곡 개어 정리해 두고, 새로운 계절에 맞는 옷들을 하나하나 꺼내 걸어 두었다. 그리고 구김이 간 옷들은 잘 다림질했고, 생각지도 못했던 옷이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내가 필요한 옷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관심 없이 옷장에 오래 있었던 바람막이, 셔츠 하나하나가 갑자기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래, 이 옷은 부산에 놀러 갔다가 갑자기 비를 만나는 바람에 샀던 옷이지. 옷에 얽힌 추억의 조각들을 주우며.



겸손과 품격이 배어있는 그녀의 화법에 대하여

나는 말을 연구하고 글을 지어 사는 사람이다. 내 전공이 이렇다 보니 연사의 화법에 대해 '자동분석'이 머릿속에서 이루어진다. '밀라논나' 영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한다. 이유는 뭘까. 그녀가 화려하고 유창하게 말을 잘해서? 물론 조곤조곤 말씀을 참 잘하시지만 사람들이 '마음이 움직이는' 즉, 감동하는 지점은 화자의 '인격(Ethos)'과 '말'이 일치할 때이다. 누구보다 좋은 '스펙'을 가지고 있는 그녀이지만 그녀의 말에는 늘 겸양의 태도가 있다.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을 과시하지 않고 그저 조용한 목소리로 조언을 건넬 뿐이다. 청자에게 선택권을 넘기는 그녀의 화법은 어느새 '꼰대'가 되어버린 기성세대에게 귀감이 된다.



워킹맘 선배가 주는 가르침

그녀가 매체와 한 인터뷰 기사를 보면 한 평생 워킹맘으로 살았던 그녀의 삶이 결코 녹록하지 않았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녀의 치열했던 삶은 지금의 워킹맘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고등학교에서 근무했을 때 이직을 결심한 큰 요소 중의 하나가 '이 학교에는 롤모델 여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늘 그 갈증이 있었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리고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을 불어넣어주는 선배 선생님이 (안타깝게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결혼을 하고 아기를 키워보니 그때는 참 별 볼일 없어 보였던 기혼 여자 선생님들조차도 '엄청나게 부지런하고 대단한' 여성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네들의 대부분이 그랬듯, 그 '평범한'삶 조차도 친정엄마의 도움 없이는 이루어내기 어렵다는 현실에 좀 씁쓸해진다. 그래서일까. '밀라논나'가 내게, 그리고 많은 여성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이런 '여성 선배'가 '롤모델'이 필요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 멋진 할머니를 나는 앞으로도 애정과 존경 어린 눈으로 바라볼 것 같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30호 가수' 이승윤의 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