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브랜딩 전문가는 무엇이 다를까? (3)
- 하라켄야(Hara Kenya)
통찰력은 현상을 꿰뚫고 본질적 가치를 발견하는 힘이다. 흔히 양적 경험이 질적 성장을 만든다고 믿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10년이 넘는 경력을 자랑하는 브랜딩 전문가, 리더들의 주제가 현상에 머무는 것은 아무리 경험이 늘어나도 통찰력이 빈약할 수 있음을 반증한다. 여행이나 독서로 다양한 경험과 풍부한 지식을 갖게 되어도 통찰력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면 고등학생 시절, 철학과 문학, 과학과 예술, 역사와 경제에 대한 폭넓은 독서로 내가 얻은 확실한 성과는 언제나 전국 수험생 상위 4%에 들었던 언어, 사회탐구 영역 성적이었다. 지식의 양이 늘어남에 따라 사고의 깊이나 폭이 넓어졌고 인간 본성이나 사회 현상에 대한 이해가 늘어났지만, 그것은 온전히 내 통찰력이라기 보다는 누군가 오랜 시간 고민하고 구축했던 세계관을 많이 알고 있었던 덕이었다. 정말 나만의 통찰력이 성장한 기간은 5000여 권의 책을 읽었던 학생 시절보다 100여 권의 책을 깊이 있게 탐독했던 군복무 시절이었다. 어중간한 경영전략 서적 100권 보다 프리드리히 니체와 유발 하라리처럼 자신만의 사유를 단단하게 정립한 이들의 서적 한 권을 깊이 읽으며 저자의 견해에 반론하고 스스로의 답을 고민했던 정반합의 대화가 나를 성장시켰다. 핵심은 나를 성장시킬 만큼 퀄리티 높은 경험이며, 그 경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노력 또한 중요했다.
통찰력을 얻는 손쉬운 방식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를테면 누군가의 고유한 관점을 공유하는 글을 주기적으로 읽는다면 그와 같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까? 무수한 브랜드 중 진정 가치있는 브랜드가 적은 것처럼, 정말 시간을 들여 탐독할 만큼 가치가 있는 책은 많지 않다. 하물며 인스타그램이나 콘텐츠 구독 서비스에 유통되는 단편적인 콘텐츠 가운데 질적 성장을 일으킬 정도로 깊이 있는 글은 드물다.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면 분명히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과연 그런 콘텐츠를 읽고 내 커리어가 변화했는가? 누군가의 통찰력 있는 글을 읽고 내 전문성이 상승했는가? 특히 누군가의 고유한 관점에 의해 읽기 쉽게 정리된 콘텐츠는 빠르게 휘발된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통찰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방대한 지식을 축적하거나, 트렌디한 현상을 파악하기에 앞서 세상을 보는 나만의 관점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기초적인 접근은 인간 문화의 근간이 되는 뿌리 깊은 사유들을 먼저 탐독하고 자신만의 답을 찾는 과정이다. 브랜딩은 단지 기획이나 디자인, 마케팅이 아니다. 하나의 완결성 있는 맥락을 만드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완결성 있는 맥락들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다양한 내러티브의 근간이 되는 책들을 깊게 탐독하고 내가 구축한 세계관으로 그 사유들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했던 군생활 동안의 독서 기록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내 업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브랜딩 전문가로서 클라이언트 사의 임직원들을 설득하고 그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답을 발견하기 위한 통찰력은 그 시절에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글로벌 기업의 혁신을 주도한 반도체 칩 설계의 최고 전문가 짐 켈러(Jim Keller)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해진 레시피를 따르고 있다.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극소수다."라는 말로 일류와 이류의 차이를 말한다. 그에 따르면 시장 조사와 브랜드 인식 조사, 임직원 인터뷰를 통해 도출된 브랜드 전략 역시 전형적인 레시피이다. 물론 나 또한 이런 레시피에 자유롭지 않다. 설득력 있는 브랜드 전략을 위해 팀원들과 해외 탐방을 다녀오거나, 기존 고객 데이터와 글로벌 리서치 기관의 시장조사 자료를 참고한다. 그러나 자료에 나와있는 수치와 고객의 답변은 어디까지나 현상에 불과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데이터에 숨어있는 의미를 발견하고 브랜드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브랜드의 현황에 대해서는 기업의 담당자들이 누구보다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브랜딩 전문가에게 요구되는 핵심 역량은 기업의 마케팅, 전략 기획, 디자인 담당자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의 본질과 브랜드의 고객에게 가치있는 기호적 가치를 통찰하는 능력이다.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기업에서 해왔던 기존 프로세스를 따른다면 효율적인 업무가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어떤 기업은 해외에서 인기인 브랜드와 유사한 브랜드 컨셉을 개발하거나 아예 해외 브랜드의 지분을 인수하여 국내 시장에 유통하기도 한다. 사업적으로는 효율적이나 브랜딩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미숙한 방식이다. 개인의 취향과 감도가 높아지고 문화적 경험이 풍부한 사회일수록 그 사회 구성원을 위한 브랜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때문에 모든 브랜드는 브랜드가 지향하는 방향에 따라, 브랜드의 주제 의식에 따라, 메시지의 대상에 따라 기존과 완전히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나는 좋은 브랜딩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종종 문학 작품을 예로 답한다. 훌륭한 문학 작품을 생각하면 쉽다. 소위 명작이라고 불리는 작품들도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한 무수한 이야기와 동일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 그 이야기를 명작으로 만들까? 작가의 탁월함은 동일한 소재를 다루더라도 자신만의 고유한 주제 의식을 선정하고, 이야기의 구성과 극적인 장치를 통해 독자에게 감동을 선사한다는 점에 있다.
브랜딩에서 가장 우선이 되는 문제는 브랜드의 근간이 되는 주제가 무엇인지 통찰하는 능력이다. 이런 능력은 브랜드의 미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비효율적이고 집요한 브랜딩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이를테면 브랜드 방향성 도출을 위한 브랜드 자산 진단 과정에서 글로벌 기관에 의뢰한 몇 백 페이지의 브랜드 인식 조사 자료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면 이는 피상적인 답으로 연결된다. 많은 데이터 중 유의미한 수치를 발견하려는 노력과 데이터 이면에 존재하는 진실을 입체적으로 검증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현상과 본질을 분별하는 통찰력을 기르기란 요원한 일이다. 또한 시대의 흐름과 고객의 니즈를 민감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면 완벽한 브랜드 전략과 자산으로도 실패를 피하기 어렵다. 애초에 브랜드가 나아가는 방향 자체 틀렸기 때문이다.
브랜딩 전문가는 결국 브랜드에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 브랜드가 처한 현황을 분석하는 것을 넘어 시대적 흐름 속에서 브랜드가 지향해야 할 지속가능한 내러티브를 발견하고 무수한 내러티브를 관통하는 고유의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브랜드 디자이너의 예를 들자면 일반적으로 브랜드 디자이너의 전문성이 높아질수록 단순히 로고와 컬러, 브랜디드 콘텐츠 등 작은 요소를 관리하는 업무가 아니라 기업 임원들에게 브랜드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들을 설득하는 업무를 하게 된다. 어떤 기업의 브랜딩 프로젝트에서 내게 인상적이었던 순간이 있었다. 기업 본부장과의 인터뷰 중 브랜드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에 대한 힌트를 얻고자 건냈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의뢰를 한 것이니, 답은 전문가의 몫이죠." 그 대답에 나는 작은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그렇다고는 생각해왔지만 한편으로는 이전에 느낀 적 없던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런 충격 덕에 나는 브랜딩을 위한 가설들을 세우고 무수한 데이터와 내러티브를 조사하며 방향성에 대한 검증을 거듭했다. 그런 집요하고 치열했던 시간 덕에 브랜드 임직원은 물론 고객들에게도 유의미한 주제 의식을 정의하고 브랜드의 모든 역사를 관통하여 미래 가치로 연결되는 브랜드 자산을 개발할 수 있었다.
브랜딩을 하는 사람들은 "디자인은 지능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감성과 통찰력"이라는 하라 켄야의 정의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브랜딩의 핵심은 통찰력에 있다. 가장 중요한 경험은 스스로의 힘으로 업의 본질을 끝까지 뚫어보는 경험이다. 이를테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의 이면에 숨겨진 깊은 욕망과 복잡한 요인들을 파고드는 탐구의 과정, 수천 년의 인류 역사가 축적한 무수한 내러티브 가운데 시대의 니즈를 관통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굴하는 경험, 당장의 라이프스타일이나 트렌드가 아니라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방식, 새로운 철학, 새로운 가치를 고민하고 검증하는 과정. 이런 경험들을 통해 브랜드에 필요한 답을 직접 찾아보고 브랜드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벽을 부수고 나아가는 통찰의 힘을 기르게 된다. 물론 브랜딩의 답은 하나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은 하나의 문제를 두고도 가능한 다양한 시도와 끝없는 검증을 해야 한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만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감성과 통찰력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 연재글에서 이어집니다.
브랜딩 전문가의 성장법 : 탁월한 브랜딩 전문가는 무엇이 다를까?
브랜딩을 위한 통찰력을 기르는 방법 (현재글)
차별화된 브랜드 경험을 위한 고민
AI 시대를 리드하는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필요한 핵심 역량
AI 시대의 브랜딩 그리고 표절
브랜딩은 한 권의 소설을 쓰는 일이다
브랜딩의 시대 시리즈
브랜딩의 시대, 디자인은 브랜딩이 될 수 있을까?(1) : 브랜딩에서 디자인은 중요하지 않다
브랜딩의 시대, 디자인은 브랜딩이 될 수 있을까?(2) : 좋은 브랜딩은 무엇이 다를까? (1)
브랜딩의 시대, 디자인은 브랜딩이 될 수 있을까?(2) : 좋은 브랜딩은 무엇이 다를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