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의 가치가 퇴색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디자인이라는 언어가 매개하는 것
디자인이 언어라는 데는 어느 정도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디자인은 결국 정신이라고 말하면 정말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얼마 전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디자이너가 아니다. 그러나 디자이너가 아닌 그가 디자인을 보는 관점은 어느 디자이너보다 더 본질적이었다. 그는 디자인이 하나의 언어라고 보는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 언어란 결국 어떤 정신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디자인이란 고객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기업의 고객 중심적인 철학과 정신이 기업 내부에서 살아 숨 쉬도록 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가 추구하는 디자인은 독존하고 있던 기업의 정신을 일련의 상호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도록 하는 것을 뜻하며, 무엇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포장이라기보다는 이미 그 자체로 의미가 되는 언어인 것이다. 디자인이 언어가 되었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디자인이 지닌 정신과 소통할 수 있고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디자인이 중요하지 않은 이유
내가 지금 현실과는 멀리 있는 형이상학적인 세계에 대해서 떠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상업 전선의 최선봉에 있는 신세계의 디자인이 정신을 말하고 있는데, 정작 많은 디자인들은 오직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범람하고 있는 것에 나는 종종 의아함을 느끼곤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JOH 조수용 대표는 시간이 갈수록 눈으로 보기에 그럴싸한 디자인이 과연 정말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고 말한다. 속상하지만 이 말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도 디자인이 정말 중요함을 힘주어 말해야 하는 입장인데 말이다. 디자이너라면 디자인에서 몇 발자국 물러서서 지금의 현상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디자인은 정신에 뿌리를 둔 언어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전달하려는 무엇 자체라기보다는 그저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로써 소비되고 또 소비될 뿐이다. 사람들이 그럴듯하게 포장된 어떤 디자인을 일컬어 예쁜 쓰레기라고 하는 것에는 분명 와닿을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부분에 있어 디자이너에게 허락된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감각적인 디자인, 어떤 목적의 수단으로써의 역할에 충실한 디자인이라고 하더라도 그 비즈니스의 근간이 되는 정신을 담지 못하면 여전히 오해의 소지를 지닌 불완전한 디자인이 될 수밖에 없다.
브랜딩은 정신과 몸의 디자인
보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흔히들 디자인을 시각적인 언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언어라고 하면 응당 정신을 담아야 한다. 조형이나 색과 같은 감각적 요소들이 전달하는 느낌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시각적인 요소 이전에 분명 그 디자인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간이 필요하다. 이때 그 근간을 이루는 것이 바로 언어가 된다. 언어가 없는 시각적 언어라니 그야말로 모순된 표현 아닌가. 언어가 없는 조형과 색이 어떻게 긴밀한 상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까. 어떻게 무수한 해석 속에서 본연의 가치를 잃지 않은 채 온전히 전달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디자이너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다. 디자이너는 보이지 않는 정신과 보이는 몸을 모두 다뤄야 한다. 오직 심미적이기만 한 것들은 참을 수 없이 가볍고, 오직 정신만 있는 것들은 불친절하고 무뚝뚝하여 외면받기 쉽다. 브랜드의 본질적 가치와 그것을 담아내는 시각적 언어가 하나가 되었을 때, 그것은 비로소 온전한 존재 가치를 지니게 된다. 결국 완성도 높은 브랜딩을 위해서는 브랜드의 본질과 브랜드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줄여 일체감을 높이는 작업이 지속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