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의 역할이란
‘디자인의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
디자인의 영역과 역할은 어디까지인 것일까. 그리고 지금에 와서 디자인이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외의 정부 각료들과 굴지의 기업의 결정권자들이 새로운 성장의 화두로 디자인을 외치는 것을 보고선 한국 정부에서 이제 우리도 디자인이 성장의 핵심 동력이라고 큰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저 실소가 나왔다. 이런 현상은 기존의 비효율적이고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던 프로세스를 새롭고 창의적인 시각으로 재설계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는 디자인의 더 능동적인 정의를 모르고 그저 눈으로 보기에 괜찮게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수동적인 정의에 매몰된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의식은 비단 한국 정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팽배해 있다는 사실이다.
도심의 보행환경을 개선하는 작업부터 의료사고 예방, 범죄율 하락, 교실의 학습성과 향상 등 “디자이너가 이런 일까지?”라고 의아해할 만한 다양한 프로젝트에 디자이너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디자이너들은 이제 스스로를 ‘자유로운 사상가(free thinker)’라고 부른다. ‘디자인=순수 예술’이라는 고정관념은 무너진 지 오래고, 대신 ‘디자인=문제해결(problem solving)’이라는 새로운 공식이 등장했다.
영국왕립미술학교 줄리아 카심(Cassim) 교수는 “디자인은 원래 오감(五感) 중에서도 시각, 즉 아름답게 보이는 것에만 집중했지만 지금은 오감 전체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발전했다”며 “한발 더 나아가 이제는 디자인의 문제해결능력이 강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경영혁신의 주체, 디자이너
세계적 디자인 컨설팅 기업 아이데오(IDEO)는 디자인적인 관점에서 기업의 문제들에 접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그러한 프로세스들이란 나름의 노하우가 있는 스튜디오나 디자인 에이전시들이 갖추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고 생각한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디자인을 기존의 디자인의 영역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더 큰 영역에서 자유롭게 발상하고 적용했다는 것이다. 이 역시도 발상의 전환이며 혁신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가만 보면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치이다. 분명 기존의 유수의 컨설팅 기업들의 제안서보다 디자인 컨설팅이 대안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상에는 디자인적 사고가 관찰과 공감에 특화되어 있으며, 단순히 수치와 통계로 판단하는 경영자보다 소비자의 니즈와 행동양식을 보다 세심하게 읽어 낼 수 있는 직업군이 디자이너라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 말하는 디자이너라고 함은 기존의 디자인 영역에서 국한되었던 제품이나 그래픽을 아름답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뜻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은 더욱 능동적이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디자이너들에게 요구되는 능력 또한 심화되었고 융합되었다. 이러한 역할은 단순히 디자인 전공자에게만 요구되는 사항이 아니며 모든 이들이 디자인적 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실을 바라보면 꽤나 회의적인데, 현재 한국 기업의 환경이 악화되고 맥킨지와 같은 컨설팅 전문업체의 제안서도 효용을 인정받기 어렵고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 마당에 디자인 컨설팅이 경영에서 대안으로 채택되기란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애초에 한국의 기업문화에서 디자인으로 기업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는 없을 뿐더러 기존의 관점에서는 디자인에 대한 기대치 역시도 한정적이다.
디자이너를 원하는 기업 수요가 급증하면서, 디자이너의 전공도 빠른 속도로 세포분열하고 있다. 디자인컨설팅업체 AIG대표 팀 펜들리(Fendley)는 “현재 런던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들의 전문분야만 50개는 족히 넘는다”며 “인터페이스 디자이너·아이덴티티 디자이너·시스템 디자이너 등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이름들이 줄줄이 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가장 빠른 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분야는 전략적(strategic) 디자인이다. ‘전략 디자이너’들은 기업의 경영전략을 개발하고, 시장 조사를 통해 소비자욕구를 파악하며, 신제품이나 서비스 출시를 돕는다. ‘디자인식 문제해결능력’을 기업 경영에 접목시킨 것이다.
세계적 디자인 컨설팅 기업 아이데오(IDEO)의 톰 켈리 파트너는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적 사고(design thinking)’를 통해서 사람들의 감성을 기존의 경영학자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더 섬세하게 관찰한다. 그리고 시행착오를 거쳐서 어떤 제품이 시장에서 잘 되는지 실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디자이너들은 제품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소비자들에게 전달하게 된다. 이렇게 소비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원하는지를 알아내는 과정과 절차에 있어선 디자이너들이 더 숙련되어 있으며 소비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능력 역시도 탁월하다.
앞으로 디자이너에게 요구되는 것은 결국 디자인적 사고와 문제 해결 능력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분명 기존의 컨설팅보다 좀 더 소비자 중심의 사고를 하는 디자인 프로세스를 통해서 공감대가 형성되는 솔루션을 제공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쟁력을 갖는다. 이런 역할이 바로 디자이너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맥킨지와 같은 글로벌 컨설팅기업의 제안서도 외면받는 한국 기업의 생태에서 디자인적 사고로 기업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매우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진다. 기업 문화 자체가 창조성을 중시하는 외국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고 한국에서는 현실성이 없다 싶은 느낌이랄까. 다만 이런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문화가 받아들여지고 정착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참조한 원문: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10/05/2007100500666.html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1/19/2014111903601.html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287080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287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