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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 kwangsu Sep 14. 2018

언어의 빈곤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는 풍성한 언어가 필요하다



나는 지금껏 오랫동안 되뇌곤 하는 문장은 있어도 다시 보고 싶은 영화는 많지 않다. 애초에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더욱 그렇다. 어린 시절 소설 원작들을 읽으면서 그 신비롭고 끝없는 상상의 세계 속에서 미로와 같은 문장들을 하나씩 탐험했던 아이의 눈에 비친 영화는 너무 헐벗고 빈약했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상상했던 그 풍성하고 무한했던 세계를 겨우 평면에 불과한 스크린에다 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선이 고정된 채로 잘 편집된 모습만을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영화를 볼 때면 그 세상이 더없이 비좁고 답답하게 느껴지곤 했다. 누군가 이런 내게 영화의 박진감 넘치는 장면과 압도적인 스케일을 어떻게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순간 문득, 그것은 분명 그 사람의 어휘 세계가 빈곤하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자신이 지닌 어휘의 분량에 따라 세계를 달리 경험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감정이나 사유는 모두 언어의 그릇 속에 담긴다. 우리의 일상이 언어의 형식을 빌리게 된다는 점에서 한 사람이 지닌 어휘의 수준은 세상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의 분량을 가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물론 어휘는 생활수준처럼 눈에 드러나거나 남들과 비교하며 으스댈 수 있는 지표가 아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구사할 수 있는 어휘의 수준이야말로 그가 지닌 세계의 풍성함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소득이나 자산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가 지닌 언어의 풍성함에 따라 그의 삶이 얼마나 풍성할 수 있을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언어가 풍성할수록 삶을 풍성히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살면서 보고 듣고 만지며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문장으로 표현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에 어울리는 형상과 색깔을 획득한다. 결국 하나의 경험이 얼마나 풍성하고 생생하게 기억될 수 있느냐는 오직 그 사람이 지닌 어휘의 수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사람이 겪게 되는 삶은 그가 지닌 어휘를 질료로 삼아 재구성된다. 훗날 과거의 일을 더듬거리며 다시 떠올렸을 때 그 기억들을 묘사하는데 필요한 것이 바로 어휘들이다. 만일 삶이 풍성하게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시간이나 돈이 부족한 탓이 아니고 지닌 언어가 빈곤했던 탓이다.



온갖 영상과 이미지들이 범람하고 또 빠르게 소비되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제 글을 읽거나 쓰지 않는다. 오히려 글보다는 사진과 영상으로 추억을 더욱 생생하게 간직할 수 있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이는 정작 기록해야 할 것은 자신이 경험한 어떤 장면 그 자체보다 그 장면 속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감정, 사유들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인생에서 값지게 느껴지는 순간들은 그저 영상이나 이미지가 아니라, 그 장면에 수반되는 어떤 감정과 사유에 더 가깝다. 모든 것이 덧없이 소멸되어가는 삶을 살면서도 내내 간직해야 하는 것들이 바로 살면서 경험한 감정과 사유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소중히 간작할만한 보물이 된다. 그리고 소중한 보물을 담는 상자는 언제나 그 감정과 사유에 알맞은 특별한 언어들을 재료로 삼는다. 어떤 감정과 사유를 경험하고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것으로 남을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한 순간들은 언제든 본래의 빛깔과 형체를 잃어버리기 쉽기에 적합한 낱말들로 잘 짜인 상자에 넣어 보관해야만 한다.





순간이 지닌 고유한 표정과 빛깔, 독특한 체취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일생에서 가장 풍성하고 값진 경험을 하고도 표현할 수 있는 어휘가 빈곤하여 그 감동의 풍성함을 있는 그대로 기록할 수 없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적절한 어휘들로 기록되지 못한 감동은 형편없이 구겨지고 버려져 결국 헐값으로 처분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풍부한 경험이 아니라 그것을 풍부한 것으로 간직할 수 있게 하는 어휘이다. 풍성했던 경험과 행복했던 장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정작 그것들을 하나씩 떠올리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듯 애틋하고 절절한 마음으로 소리 내어 불러야 할 때, 그 순간들이 마땅히 불려야 할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입으로 소리 내어 고백할 수 없는 사랑이, 글로써 담담히 적어낼 수 없는 마음이 그 순간의 감정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삶이라는 긴 여행에서 지난 여정을 추억하며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들이란 모두 고유한 언어로 인해 다듬어지고 재구성된다. 이처럼 저물어가는 희미한 햇빛에도 반짝거리는 광채가 선명한 빛깔의 보석들은 자신만의 언어를 지녔다. 반면 삶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을 경험했음에도 그 찬란함조차 흐릿하고 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지닌 언어의 빈곤함 때문이다. 평생을 살면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로 쓰인 문장, 훗날 낭독할만한 문장 하나 남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그런 빈곤의 소치이다. 감동적인 순간을 겪고도 묘사할 표현을 알지 못하고, 아름다운 꽃을 보고도 노래할 낱말을 찾지 못하여 그것들이 지닌 고유한 이름마저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흐르는 눈물이 내 몸을 흠씬 적시고 깊은 곳으로 흘러 마침내 메마른 영혼마저 소생케 하는 황홀한 순간을 겪고 난 후에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단지 '감동적이었다'라고밖에 할 수 없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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