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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폭력 : 환경과 기후변화

모든 존재의 안녕

by 사야

한국에서의 기후 변화 논의는 국제사회 보다 훨씬 더디다 생각했다. 5년 전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최근 정책 동향이나 시민들 인식은 자뭇 달라진 걸 느낀다. 환경 운동을 이어온 활동가들은 반짝 주목에 큰 의미 두지 않고 여전히 진실과 현실 사이를 좁히기 위해 분투하며 다르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파리협약 이후 우리는 어디쯤 와있는 걸까.




지구의 현주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제개발에서 ‘환경’이란 사업 수행 시 전반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크로스커팅 이슈로 거의 미세하게만 거론되었다. 재난위험경감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일부 기후변화대응 사업을 제외하고는 단순히 미래 먹거리(사업 아이템)‘ 수준에 머물 뿐이었다. 특히 국내에 저개발국 현장의 환경 이슈를 딱 집어 다루는 전문적인 기관이 없거나, 있어도 현지와의 협업 없이 독자적 비즈니스 형태로 개발사업 생태와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거나, 무엇보다 가장 높은 확률로 환경 분야를 최우선 투자 순위로 두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19가 분기점이 되었다. 글로벌 차원에서 천재(天災)와 인재(人災)의 구분을 흔들어 놓으며 환경보호 이슈에 다양한 시사점을 남겼다.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자리가 정치적으로 부상하고 ESG(Environmental, Social, and Governance) 같은 개념이 경영 키워드가 되면서, 각 국가 정부와 국제기구의 노력과 이니셔티브뿐만 아니라 개발 NGO에서도 환경에 대한 책무가 더 부각되었다. 이제는 환경을 범분야 이슈가 아닌 본격적으로 주류화하는 사업, 기업 협력과 기술 적용을 통한 혁신사업, 오직 환경만을 위한 사업 등 다양한 시도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인권 담론이 발전해 나가듯 환경과 기후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게 더는 너무 멀리 나간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니게 된 것이다. 현재를 성찰하든 낙관하든 우리는 46억 년 지구 역사에 여섯 번째 종말을 앞두고 있다. 존재의 멸종, 해양오염, 메가시티, 화석연료, 쓰레기 문제를 마주하고 보면 그린뉴딜과 탄소중립은 결코 급진적이지 않고 오히려 지극히 뒤늦은 현실이다.




분노의 얼굴을 하고서


사회를 모르던 학생 때는 인권 운동이나 환경 운동이 그저 막연히 어두운 현실을 외쳐내는 것처럼 보였다. 활동가들의 얼굴은 결연했고, 목소리는 단호했으며, 눈빛에는 왠지 모를 노기가 서려 있었다. 적어도 내가 받은 인상은 그랬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고 90년대 이후 민주사회에서 성장해 새롭게 세상을 읽어나가는 세대들은 이전과 다른 문제 해결 방식과 소통 방식을 통해 인권과 환경 문제를 풀어가고 있다. 굳이 인류를 위한 대단한 일을 추구해서 감동을 주는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아도, 우리네 실생활과 맞닿아 가려는 노력들이 지금도 어디선가 창조되고 있다. 하지만 그 활동들의 뿌리에 결국 불의와 불공정에 대한 분노가 어려 있을 수밖에 없음은,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 감정이 ‘어떤 소외된 존재에 대한 공감’을 원천으로 삼기 때문일 것이다.


용감한 청소년 환경 운동가가 외치듯 ‘어떻게 감히’ 우리는 환경을 우선순위에서 미뤄둘 수 있을까. 우리가 늘 듣는다는 현장의 목소리에는 이미 위기가 녹아있었는지도 모른다.




익숙하고 오래된 이야기


오리 떼가 뒤뚱이던 방글라데시의 습지대도, 도로의 반이 잠기던 캄보디아의 강변 마을도, 연이은 홍수로 고통받고 있었다. 주민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시기에 대비할 수 없이 쏟아지는 폭우에 피해가 크다고 말했다. 미간에는 두려움과 체념이 묻어 있었다. 놀랍게도 주민들은 해마다 극단적으로 변화하는 날씨 앞에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할 수 없다. 단순히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은’ 선호의 문제라기보다 대부분 떠날 수 ‘없는’ 문제이거나, 오랜 공동체를 벗어나면 이방인으로 취급받는 문화적 인식에 대한 기피 때문이었다.


180도 다른 이야기도 있다. 에티오피아 수도에서 차를 타고 3시간 거리 전방 100미터 내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마을에서 주민들을 만났다. 불어오는 모래바람에 실눈으로 겨우 걸어가 마주한 얼굴들은 바짝 메말라 있었다. 생계유지조차 어려운데 죽어보라는 듯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매서워진 환경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유례없는 가뭄으로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재난은 사회적으로 가장 보호가 필요한 이들에게 가장 치명적으로 찾아왔다. 빈익빈 부익부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재난의 잔인함이 단순히 신의 분노나 무심 때문일까. 우리는 신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건 분명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여 살아있는 누군가가 ‘간과’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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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문제만이 아닌 이유


인류의 터전이 무너져갈 때 우리는 생존에 미칠 영향을 피부로 체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극단적인 환경이 유발하는 이차적 문제와의 상관성을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어떻게 연결해 갈 수 있을까.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사회적 불안정과 갈등, 심하게는 폭력적 상황을 촉발한다는 점은 이론과 현실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특히 저개발국에서 가뭄이 발생했을 때 성폭력, 강제추행, 강간의 위험을 높인다는 사례는 현장의 여러 기관에서도 보고되고 있다. 홍수나 폭염도 식량 불안, 실업, 가정 내 긴장을 유발해 취약자에 대한 학대를 높인다. 아동들은 교육을 중단하고 조혼과 해로운 노동에 발을 들이게 되거나, 지역 주민들은 기후난민으로서의 이주와 자원 부족으로 야기된 분쟁을 겪게 되기도 한다. 지구의 안녕이 우리의 안녕에 직접적이고도 간접적인 방식으로, 또는 복잡하게 얽힌 모양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결국 롭 닉슨이 말한 ‘느린 폭력’이 더 이상 느리게 머물지 않고 ‘빠르고 즉각적인 폭력’으로 재생산되는 것이다.




모두에게 이로운 발전은 가능할까?


비인간 존재의 안녕이 인간의 안녕과 연결되어 있다면, 비인간 존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Do No Harm, 두노함) 개발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연은 흔히 문명과 대비되고 여성에 비유되어 착취의 대상이 되곤 한다.


누구나 ‘개발의 기적’으로 보는 보츠나와 사례를 아프리카 의학 역사가이자 인류학자인 줄리 리빙스턴은 ‘자기 파괴적 성장(Self-Devouring Growth)’이라는 다른 각도로 포착했다. 그녀의 통찰에 따르면 현 인류는 자기 파괴적 성장이라는 전지구적 우화(Planetary Parable) 속에 살고 있다. ‘스스로 먹어치운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자본주의 성장 모델이 어떻게 인간의 생존 기반을 스스로 파괴하는지 기본적 필요 세 가지 요소(물-비, 식량-가축, 이동-도로)를 중심으로 설명했다. 이러한 성장 모델은 단기적인 번영을 가져올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환경 파괴와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하여 지속 가능성을 위협한다고 역설했다. 기술 발전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인간과 비인간 존재, 식물, 광물 등과의 관계를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ChatGPT가 생성한 ‘Self-devouring development’ 이미지




이야기의 끝


원인을 제공하고 현상을 수습하는, 생명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그것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가담하는, 보이지 않는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 단순히 운이 좋았던 나를 연결 짓지 못하는, 다른 존재와 관계의 끈을 그리는 데 실패한, 누군가의 방관. 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정체성의 상실, 사회경제적 격차, 그리고 생태학적 단절(Ecological divide) 현상은 모두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결국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결과이다. 근본 원인과 문제 해결 과정의 구조를 들여다보는 시스템 사고(Systems Thinking)와 생태계의 연결성을 인지하고 인간중심사고에서 벗어나 생태중심 사고를 강조하는 생태전환(Ecological Transformation)에 주목하는 이유다.


자연과의 공존을 꿈꾸지 못한다면 그 어떤 생명의 존엄을 지키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해를 끼치기보다, 거대한 담론과 막대한 자원을 프로젝트에 쏟아 넣어 버리기보다, 일상에서 실천들을 만들어 나갈 때다.


인도네시아의 붕인섬은 기후위기와 인구과밀의 현실을 보여주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섬이 지구를 1억 분의 1로 축소해 놓은 모습이라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각자의 붕인섬’을 어떻게 돌볼 수 있을지 조용히 떠올려본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온 끝없는 성장 신화와 오래도록 믿어온 자연의 무한 자원화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서 말이다. 이 잠깐의 멈춤이 다른 방식의 삶이 가능하다는 상상력을 열어줄 첫 번째 걸음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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