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교육의 가능성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꽤 자주 내가 아닌 세계를 간과한다. 국제개발과 교육의 세계도 그렇다.
특수교육, 통합교육, 그리고 포괄적 교육
특수교육Special Education은 흔히 장애 아동에 대한 교육으로 통용된다. 우리나라 법에서 특수교육은 ‘장애인 및 특별한 교육적 요구가 있는 사람에게 통합된 교육환경을 제공하고, 생애주기에 따라 장애 유형과 정도를 고려한 교육을 하여, 이들의 자아실현과 사회통합을 목적으로 한다’고 설명한다. 문자 그대로 정상 범주를 벗어난 특수한 교육적 요구가 필요한 경우라면, 사실 통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영재아동 또한 특수교육대상자로 고려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반적인 특수교육의 흐름을 보면 초기에는 장애 학생의 교육적 요구에 초점을 두고 분리ㅣ된 체제에서 교육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성과 교훈은 점차 통합교육Integrated/Inclusive Education으로 지향점을 옮겨갔다. 하지만 모든 다름에 대해 차별이 일어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통합이 필요한 것은 비단 장애 맥락뿐만이 아닐 터. ‘정상’프레임에서 벗어난 이들을 더 포괄해야 할 필요성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유네스코에서 말하는 포괄적 교육Inclusive Education 또는 교육에서의 포괄성Inclusion in Education은 보다 넓은 관점을 보여준다. 유네스코 협약과 기타 국제 인권 조약에서 명시하듯 성별, 민족, 사회적 출신, 언어, 종교, 국적, 경제 상황, 능력에 따른 교육에서의 차별을 반대하는 것이다. 주변화되고 소외된 그룹에 도달하여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려면 포괄적인 정책 및 프로그램의 개발과 구현이 필요하다고 보고, 개인의 변화보다 시스템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존엄을 위한 교육
포괄적 교육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파트너기관이 뭄바이에서 개최한 ‘존엄을 위한 교육Education for Dignity’ 워크숍에 참석했을 때 였다. 활동 중심으로 워크숍이 이루어 졌는데 ‘물리적 접근’ 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학습’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들을 탐색할 수 있었다. 활동 중 진행자는 보드마커를 꺼내 들고 참가자들에게 ‘이 마커를 수학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의견을 내보라고 했다. 웅성이던 무리 중 한 참가자는 길이를 재는 도구(자)로 활용할 수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뒤이어 다양한 대답이 쏟아졌다. ‘교자재’ 그 자체보다, 창의성을 요구하는 ‘교사의 시간’을 사는 비용이 더 귀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워크숍 내용을 관통했던 교훈을 한 가지만 꼽자면 존엄을 위한 교육사업이 되기 위해 기획, 과정, 그리고 성과 도출에 있어 아동의 필요에 따른 반응Responsiveness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이전에 다양한 교육사업을 진행하면서 ‘문제’에 집중해서 필요한 ‘개입’을 기획하고 ‘목표’를 설정하는 논리적 수순을 따르기는 쉬웠지만, 그곳에 실제 아동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감지하지 못했다는 걸 뒤돌아보게 되었다. 사업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다양한 특성에 따라 교육적 필요를 세밀하게 고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정부 정책이나 학교 시스템은 실제 ‘아동’이 ‘누구’이고 ‘어떠한지’에 대한 개별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설계되기 때문에, 이는 곧 취약아동에 대하여 배타적인 프레임을 제시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때 아동과 청소년기의 전반적인 특성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역 내 아동이 가진 특성을 알고 공식 체계가 이를 반영할 수 있도록 고려해야 하며, 이를 위해 지역사회가 이미 가진 지식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발달장애아동을 위한 직업훈련
저개발국에서 장애 아동을 위한 교육은 일반 교육 사업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과제다. 포괄적 교육사업의 일환으로 장애 아동을 주요 참여자로 고려해 수행한 사업이 있었다. 장애 아동을 위한 보조학습 도구를 지원하고, 장애 학생을 돕기 위한 교내 학생 지원단을 꾸려 장애와 수화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지역 내 장애 아동의 부모나 양육자에게 수공예 직업훈련을 지원하는 활동이 있었다.
직업훈련에 참여했던 한 아이의 소회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디스아바바에서 만난 한 발달장애 소녀는 수공예품 제작 훈련에 함께 참여했다.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다양한 주민들을 만나고, 어느새 공동체 이루어 교류하고 기술을 익혔다. 덕분에 사회적 소속감과 효능감을 느껴 공동체의 일원으로 어우러질 수 있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만들어 낸 일을 설명하는 맑은 기쁨이 어린 표정을 그 어떤 설명도 대체할 수 없었다. 얕게나마 들여다본 특수교육은 한 인간의 존엄성을 다루는 학문이었고, 포괄적 교육도 같은 의미에서 앞으로 지속해서 확장되어 나아가야 할 주제다.
우리가 바라던 시험지, 우리가 바라던 성적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개학과 학습성과 평가에 관한 유네스코와 세계은행 주관의 웨비나가 있었다. 토론을 이끈 교육자가 ‘한국은 디지털 격차가 적고 어느 나라가 보기엔 질투할 만큼 잘 대처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전과제가 없는지’ 물었다. 한 공립기관 소속의 발제자는 성취도 평가가 여전히 다지선다 형식으로 지식의 정도를 측정하는데 그치는 것이 한계라고 언급했다. 너무 오래된 반성이라는 게 오히려 인상 깊었다. 문득 한국과 다르지 않은 지난 출장 중 기억이 떠올랐다.
허름하고 어둑한 교무실 안, 각종 행정 지침과 통계표가 빼곡히 빈틈도 없이 붙어 있었다. 그 한 켠에 아이들의 성적표도 공개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다가 교무실 안쪽을 힐긋이며 입구를 스쳐가는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한국과 물리적으로 3,000km 이상 떨어진 이곳에서도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는데 필요한 태도와 실천보다 지식과 경쟁이 우선의 가치로 여겨지고 있는 건 아닐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적절한 지식이 필요하긴 하지만, ‘은행저축식’ 교육 후에 일회성의 기억력 시험을 치르고 점수를 매기고 서열을 구분하는 것이 과연 적당한 척도일지, 기록에 의존하는 권위와 기호 체계로 ‘인격적인 존재’를 가리는 건 아닐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 체제를 성공적으로 통과한 사람들이 짜는 판이란 결코 다를 수 없지 않은가.’ 왜 학교에 이상한 교사가 많은지 물음을 던지고 한국 교육계의 실상을 그려낸 작가는 말했다. 교실 안에서의 전체주의, 성과주의, 그리고 절대권력. ‘구조에 순종적이고 모범적인 학생’이었던 그들이 ‘교사’가 되었을 때 아이들에게 당연하게 요구하는 바람직한 태도와 행동양식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고.
그렇지만 지금까지 희망을 봐왔던 것처럼, 지속적으로 발전을 바라는 사람들에 의해서 가로막힌 것이 깨어지고 불편하던 길이 평탄해지기를 바라본다. 사회계층, 빈곤, 인종, 성별 등에 따라 교육에 대한 접근성과 성취도가 차이 나는 현실에 주목하는 교육가들이 더 절실한 이유다.
현장에서 진심과 열정으로 아이들과 함께하는 교육가들이 워크숍에서 나눈 교육의 정의는 아직도 여운이 깊다. 교육이란, 생각하고 결정할 자유와 용기를 주는 것이라고. 누군가의 존재와 공간에 대한 존중, 관계 맺기와 참여. 그게 전부라고.
Education is an act of love,
and thus an act of courage.
– Paulo Frei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