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노함과 갈등에 민감한 개발
주니어 시절의 나는 갈등 민감성(Conflict Sensitivity)이라는 개념을 몰랐다. 국제개발 분야에서 일을 시작하고 두노함(Do No Harm) 원칙에 대해서는 어디서나 들려왔지만 실제 적용할 수 지식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아닌, 스스로 알아서 적용해야 하는 추상적 개념이나 당연히 따라야 할 정언 명령처럼 간주되었다. 하지만 갈등 민감성과 두노함 원칙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지침(Conflict Sensitivity Consortium, 2012; CDA Collaborative Learning Projects, 2015)이 있다는 걸 알고 난 후에는, 단순히 동의할만한 격언이 아닌 사업 개발 시 상황 분석과 갈등 분석에 활용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입 과정에서 전달되는 메시지와 지원하는 내용이 적절한지 모든 액션의 잠재적 영향을 지속적으로 재평가하는 것이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계속해서 상기시켰다.
갈등에 민감한 개발(Conflict-Sensitive Development)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면 분쟁 이후 개입에 대한 기획, 실행, 모니터링 및 평가하는 방식을 연상하기 쉽다. 1994년 르완다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 이후, 인도적 지원과 개발이 현지에 해를 끼치기(do harm) 보다 좋은 일(do good)을 어떻게 할지 성찰하면서 갈등 민감성이란 용어가 유래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갈등에 민감한 개발은 분쟁 후 환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갈등 이전(prior)과 진행 중인(ongoing) 갈등, 더 일반적으로 갈등이 영향을 미치는 환경(conflict-affected settings)이면 적용될 수 있다. 이는 인도주의적, 개발 및 평화구축 개입을 통해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갈등 민감성의 목적과도 연결된다.
생계 지원 이전에 필요한 지역사회 이해와 신뢰 구축
A국 프로그램 데스크 모니터링을 담당할 때 동료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생계지원과 소득창출 사업의 일환으로 마을에 가축을 나눠준 후 한 가정의 건강한 아이가 갑자기 피를 토하며 죽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을 만나 정황을 조사해 보니, 그 가정이 기관의 지원을 받아 경제적 상황이 나아지자 질투심에 사로잡힌 이웃이 음식에 독을 섞어 벌인 일이었단다. 마을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독살당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그 사건을 가난이 낳은 불행한 비극이라 생각하며 애도했다. 의도하지 않은 참사가 사실은 예방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지역주민의 절대적이고 직접적인 욕구를 파악하고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근본적인 요소인 '보이지 않는' 요소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했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트라우마적 사건 자체뿐만 아니라 갈등의 역사적 배경과 주기, 그리고 마을 전체를 잇는 요소(connector)와 불화 요소(disconnector)에 대한 분석이 필요했을 수 있다. 다양한 출처로 정보를 수집해 커뮤니티가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누리고 있는지 아니면 습관화된 폭력 패턴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면, 시간에 따라 역동이 어떻게 진화하는지에 알고 개입의 본질을 더 잘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잠재적으로 소득을 늘리거나 부를 창출하여 불평등을 조장하는 프로젝트의 시장 효과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방 조치와 혜택 격차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궁극적으로 조직 운영과 직원 차원에서 갈등에 대한 인식이 철저했다면 다른 결과를 낳았을 수 있다. 결국 가치를 제공하고 프로세스를 구현하는 것은 사람과 조직이기 때문이다. 특히 적절한 참여자 보호 절차가 없는 소규모 기관에서는 이러한 위험이 정기적으로 발생하기 쉽다. 정부 기관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국제개발산업 전반에 지속적으로 갈등 민감성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갈등 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초등 교육 프로젝트를 위한 인프라 구축
2014년 스리랑카 북부지역을 방문했을 때 그곳은 여전히 내전의 여파에서 회복 중이었다. 그때의 나는 유니세프와 스리랑카 교육부가 마련해 둔 학교운영지침을 두고 어떻게 학교에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 당시 분쟁에 민감한 개발 원칙을 활용해 학교 건물 인프라 자체가 어떻게 평화 구축에 기여할 수 있을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인프라를 장기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식(knowledge)과 제도(institutions) 구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부자들은 보통 건축이라고 하면 더 넓은 시스템의 필수 요소로 보기보다는, 적당히 화려해 보이는 ‘외관’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 그래서 ‘역량(capacity)’과 ‘자산(assets)’을 체계적으로 구축했을 때 지속 가능한 발전과 궁극적으로 평화의 기반을 이룰 수 있다는 경험적 가정을 관철하기 어려웠다.
프로젝트 진행 중에는 아이들이 선호하는 학습 공간의 조건을 조사하고 아동 참여 모니터링 방식으로 학교 내부와 주변 안전 문제를 탐색했다. 이 과정은 프로젝트의 즉각적인 목표는 아니더라도 폭력의 징후(교사의 체벌에 대한 어린이의 두려움, 부모의 실제 또는 인식된 내전 트라우마에 대한 인식)를 알게 해 주었다. 또 아이들이 바라는 교육 기관의 모든 가능성을 볼 수 있게 하는 기회였다. 그 결과 후속 프로젝트에는 갈등의 영향을 받은 부모와 아이들을 위한 심리 사회적 지원을 추가 반영할 수 있었다. 물론 더 나아가 인프라 시설의 실질적인 활용과 운영을 고려하는 것 외에도 보안, 경제, 환경 및 정치적 측면과 같은 사회적 프레임워크에서 취약한 영역 분석도 계획 단계에서 고려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분쟁이 직접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에 미치는 영향을 더 잘 반영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지역 내 문제를 해결에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사업 너머의 맥락
마지막으로 갈등에 민감한 개발과 평화 구축을 위해 수직적-수평적 관계 구축의 중요성에도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역의 목소리를 고위 공무원 같이 다른 영향력을 가진 대상에 전달하는 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지역 주민들에게 메시지나 가치를 전파하는 것만큼이나 평화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평화학자 존 폴 레더락이 평화구축 피라미드에서 보여주었듯이, NGO는 조정하고 연결하는 현장의 중간 행위자로서 "상호 의존 격차"를 보다 적극적으로 촉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상향 옹호 캠페인, 하향 인식 캠페인 또는 양방향 이니셔티브는 사회•문화 환경에 적합한 미디어를 통해 정보 전달 및 상호 교류 공간 형성을 촉진하고, 대안적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의사소통을 통한 관계 구축은 특정 분야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범분야적으로 꼭 필요한 요소이다.
또 다른 평화학자 리사 셔크가 강조한 것처럼 개발 관행의 전반적인 특징은 대다수의 이니셔티브가 '외부자'의 요구 사항에 맞춰 진행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지 정부는 자국에 유리한 부문을 지원하도록 유도하고, 공여국은 외교 의제 등 자국의 목표에 부합하는 지원을 원한다.) 하지만 그 결과를 피부로 체감하는 건 결국 '내부자'(지역 주민)다. 따라서 갈등 평가와 평화 구축 계획은 지역 이익과의 마찰을 완화하고, 책무성을 유지하며, 장기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참여적 평가 렌즈를 통해 우리는 결국 외부인으로서 촉진자 또는 조력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현장에서의 끊임없는 학습과 신중한 대응이 폭력적인 긴장을 완화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 유익한 영향을 증가시키는 유일한 방법임을 새겨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발 실천의 길과 평화 구축의 길이 공유된 길임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