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엔 모든 것이 얼어있다.
마치 원래 아무것도 살아있지 않았던 것처럼 많은 것이 얼어버린다.
피어나는 생각을 한데 놓아두고, 완전한 어떤 명제를 가지고 살려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려낸 다는 것은 죽은 것을 어찌해볼 심산으로 관찰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든 움직이게끔, 혼자서 다시 무언가를 할 수 있게끔 다시 세상에 초청하는 것과 비슷하다면 겨울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아무것도 없다. ‘무’라는 개념은 하나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개념의 자리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실적으로 가능하기나 한 말인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한, 아니 인간이 살아만 있다면 언제나이고 아무것도 없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언제인가 제한된 자유가 자유인지에 관한 질문이 피어났을 때, 나는 꽤 그 순간을 사랑하곤 했다. 그것이 궁금했고, 관찰해보고, 서슴치 않고 만져보고, 재단해보곤 했다. 그러나 마치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이 이것이 언제까지이고 지속될 거 같은 생각이 드는 것과 비슷하게 이것이 너무나도 나에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비슷하게 그 순간이 착각으로 가득했다. ’무‘란 착각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라는 규정은 하나의 개념으로 피어난다. 피어나는 생각을 하나의 명제로 되살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해야겠다. 다만 하나의 명제만 가지고도, 수 많은 생각을 피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인정할 수 있게되었다. 그러니 겨울은 하나의 명제를 가지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사계는 어찌하여 뚜렷한가.
겨울은 어찌하여 이토록 추위를 선사하는가.
멈추어진 시간이 아님에도 행동을 멈추게 하고, 멈추어진 생각이 아님에도 사유를 멈추게 한다. 겨울은 마치 권태와 비슷하다. ’잠깐, 내가 뭘 하고 있었던 거지‘하는 일상의 끝을 접어두는 하나의 권태로 말미암아진 질문과 같다. 그래서 질문은 답변을 요구하고, 답변은 행동을 요구한다. 명령하는 어떤 명제가 탄생하는 것이다. 멈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겨울에 가능해진다. 얼어버리는 순간 가능해지는 것이다. 겨울은 추워야지만 겨울인 것이다. 기계가 얼마나 결함이 없는 지, 레일엔 윤활유가 제대로 발려있는지와 비슷한 관찰은 겨울에 심화된다. 더욱 자세히 저욱 정확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가 짧아지는 것은 밖이 아닌 안을 집중하라는 것과 같다. 내 안에 피어있는 어떤 생각을 충분히 관찰할 수 있도록, 다른 것들이 빛나는 시간이 짧아지고, 나라는 주체가 어디에 있는 지, 그것또한 나였는지와 같은 의문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다음 계절의 아니 다음 챕터에 얼마만큼이고 자신에게 영향을 끼칠 지를 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겨울잠을 청하지 않는다. 다만 안에 피어나는 사유를 생동하게끔 하고, 자유의 범위를 스스로 가지게 한다. 예컨데, 수렵채집시절의 인간이었다면 다음 여름에는 어디로 가서 열매를 구하고, 어디로 가서 사냥을 할 지를 결정하게 한다. 겨울이 얼마나 혹독한 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것을 몸소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겨울은 영하로 떨어지는 순간이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혹독하다고 느껴진다. 여름이 그리워지고, 여름날의 그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여름의 기억이 겨울에도 찾아온다. 쌓인 낙엽을 얼마만큼이고 쓸어야 할 지 잘 모르겠으나, 쌓인 낙엽이 있기에 쓸어낼 무언가가 있다. 멈추었다는 착각이 있기에 살아갈 의지를 피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