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 | 말그릇을 다시 새롭게 빚자

2015, 2022 교육부 개정교육과정과 청소년 자치배움터

by 얼룩


| 배움 |
지금, 이곳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행복을 추구하며, 풍부한 관계를 쌓는 행위.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충분히 찾아보고, 익숙하지 않은 것은 직접 경험하며 익힌다.


나는 2016년 의정부에 자리 잡은 〈청소년자치배움터〉 몽실학교를 시작으로 교육 현장에 발을 들였다. 당시 몽실학교는 청소년 주도성과 자치를 실현하고 있는 유독 빛나는 사례 중 하나였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몽실학교로 찾아와 청소년 주도 프로젝트 교육과정을 배워가고 학교에서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했으며, 지역 곳곳에서 몽실학교와 비슷한 〈청소년자치배움터〉를 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몽실학교는 늘 위태로웠다. 매년 운영 예산을 지키기 위해 담당자들은 고군분투해야 했고 “몽실학교니까 가능한 거지.”라고 투정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성과를 증명해 내야 했다. 난 억울한 마음에 꿈짱(모두가 담당 장학사님을 꿈짱이라 불렀다)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는데, 그때 꿈짱은 씁쓸하게 웃으며 교육부가 발표한 〈2015 개정 교육과정〉을 한번 들여다보라며 자료 하나를 보내줬다.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창의융합형 인재 핵심역량 6가지’를 정의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몽실학교의 중심을 이루는 주요 가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몽실학교는 교육부의 비전을 현장에서 구현하고 있는 사례처럼 보였다.

2015 교육부 개정교육과정과 몽실학교 비전 비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실학교는 2021년 겨울, 존폐 위기에 처했다. 답답한 마음에 홀로 무작정 연구를 시작했다. 몽실학교를 통해 관계를 맺었던 또래 동료들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밥 한번 살 테니 당신의 이야기와 고민을 들려달라고 말이다. 김포, 광명, 인천, 대구, 울산 등 서로 다른 지역에서 청소년의 주체적인 삶을 고민하며 분투하고 있는 이들과 만나 오랜 시간 수다를 떨었다. 총 11개 현장에 직접 찾아갔고 그렇게 만난 사람들이 21명이었다. 교내 학생 자치 담당 교사, 〈청소년자치배움터〉 길잡이 교사, 비진학 청소년 그룹으로 시작해 지역사회에서 자발적으로 프로젝트를 하고있는 청년 모임, 문화예술교육 전공자, 폐교된 시골 학교에서 청소년을 만나는 마을 교사, 청소년학과에 진학한 대학생, 지역 소멸을 막기 위해 마을교육공동체를 양성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연구원, 자신이 자란 지역에서 협동조합을 설립한 청년들까지.

21명의 동료들과 울고 웃으며 공감과 응원으로 가득 찬 대화들을 이어가다 보니 어떤 의문 지점에 다다랐다. 우리가 일하면서 자주 마주하게 되는 단어들을 너무 좁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대표적으로 프로젝트, 마을, 공동체, 진로, 자치, 성장, 주도성, 상상, 활동 등이 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모든 단어에는 풍부한 의미가 담겨 있을 텐데, 우린 당연한 듯 일상과 분리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아주 좁은 의미로, 혹은 정책이나 사업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말이다. 물론, 이 단어들이 공적인 영향력을 갖도록 선배들이 쏟은 놀라운 헌신과 노력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경쟁 그 자체가 중심이 된 사회 구조에서, 또는 현장에 적용하면서, 단어 본래의 의미는 변질되고 퇴색했다. 그리고 때로는 정치적인 이유로도, 단어가 가진 다채롭고 넓은 개념은 협소해졌다.

말그릇, 단어가 가진 의미로 만드는 그릇이라는 의미로 내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다. 용어를 좁게 해석하면, 그러니까 말그릇을 작게 만들면, 단어가 지닌 본래의 의미를 모두 품을 수 없게 마련이다. 때문에 이 판을 둘러싼 말그릇을 다시 빚어야 한다. 더 크고 넓은 의미로 빚은 말그릇에 사업과 정책을 담을 수 있도록. 변화를 위해 꼭 새로운 말이나 용어가 필요하지는 않다. 마치, 〈2015 개정 교육과정〉의 핵심 용어와 몽실학교가 내 건 슬로건이 비슷하지만 실현된 내용은 완전히 다른 것처럼, 단어가 가진 가장 포용적이고 넓은 의미를 그릇 삼아 사업과 정책의 판을 짠다면, 교육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배움을 다시 빚기

몇 해 전, 몽실학교에서 한 해의 과정을 마무리하고 공간을 정리하다 발견한 작은 메모지에 적혀있던 인삿말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잘 배우고 갑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 인사에는 배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2022년 2월, 나는 제1호 서울형 〈청소년자치배움터〉, 다가치학교-남부의 사무국장을 맡아 운영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21명이 빛나는 눈으로 나눠준 경험과 고민은 다가치학교에서 빚을 새로운 말그릇의 원료가 되었다. 익숙하지만 낯선 단어들이 가진 진짜 의미를 찾아 구현해 내려는 집요한 작업의 시작이기도 했다.

몽실학교에서처럼, 다가치학교에서 가장 먼저 빚은 말그릇은 배움이었다. 학생들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어떻게 학생의 성과를 평가할지, 점수는 어떻게 매길지, 이 사회는 너무 오래 고민해 왔다. 미래를 위한 현재의 희생이 당연시되는, 청소년의 배움과 삶의 시점을 지금으로 맞췄다. 그렇게 학습자 주도성을 가장 중심에 두고 배움터를 조성했다. 다가치학교에서는 꿈이라는 말도 최대한 아꼈다. 꿈, 이 아름다운 단어는 청소년이 겪는 지독한 모순을 참 많이도 감춰왔다. 꿈을 묻기보다 지금 관심이 가는 무엇이든 함께 하자고 외친다. 지금 당장!

때마침 2022년, 교육부에서는 새로운 교육과정을 들고나왔다. 다가치학교의 중심축을 이루는 단어들이 눈에 띄었다. 그 단어들이, 그러니까 동료들과 함께 다가치학교에서 부단히 빚어온 우리의 말그릇이, 새로운 용어 없이도 충분히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증명처럼 느껴졌다. 자주 쓰는 단어와 용어를 재정의하고 실재로 구현하는 일, 처음을 열 가장 중요한 말그릇, 배움이라는 말그릇을, 우리는 빚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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