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성 | 나다움을 찾아서

학습자 주도 교육과정의 핵심 목표

by 얼룩
| 주도성 |
학습자의 주도적인 모습은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
학습자가 자신의 고유한 역량을 발견하고 발휘하는 것, 그것이 학습자 주도 교육과정이다.

모범생은 자연히 태어나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모범생 DNA를 가진 청소년은 없다. 평가와 경쟁이 기본값이 된 집단과 사회에서 평가할 권한을 가진 사람의 눈에 들어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그들의 눈에 띄고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일과 활동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그를 우리 사회는 경쟁력이라 불러왔다. 조직은 적극적인 구성원에게 좋은 점수를 매겨왔고, 그들은 인재의 페르소나이자 전형적인 ‘모범’의 기준이 되어 왔다.

주도성과 적극성

적극적인 학습자들은 늘 티가 난다. 먼저 나서서 궂은 일을 맡고 의견도 곧잘 내서 본인이 속한 팀을 이끈다. 그들은 다른 동료들과의 관계도 원활하게 맺는다. 사람들은 학습자의 적극적인 성향에 주도적인 태도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주도성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적극적인 모범생이 마치 주도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극적인 태도의 학습자가 꼭 주도적인 것은 아니다.

주도성과 적극성을 구별하는 것은 학습자 ‘주도’ 교육과정을 고민하는 교육자에겐 교육 과정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데 정말 중요한 기준이 된다. 적극성은 학습자의 성향이다. 나는 적극성을 적응력과 같은 의미로 본다. 특정한 상황에 탁월하게 적응력을 발휘하여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적극성이다. 교실을 예로 들면 교사의 생각과 판단이 수업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교사의 의도에 정확하게 반응하고 행동하는 적극적인 학생은 당연히 교사의 눈에 띌 수밖에 없고 자연히 신뢰를 얻는다.

지금까지 교실은 적극적인 학생이 탁월하게 성장할 수 있는 구조였다. 교사가 질문했을 때, 손을 들어 의견을 말할 수 있을 정도, 조별로 활동할 때 조의 의견을 모으며 진행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적극성은 교사의 수업 진행에 큰 힘이 된다. 나도 프로젝트 활동이나 워크숍에서 적극적인 학습자의 존재는 참 고마웠다. 솔직히 터놓자면, 적극적인 학습자가 있으면 활동을 진행하기가 편하다. 그들의 적극성에 기대어 교육 과정을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교육자, 코디네이터의 역할과 책임을 그 모범생에게 전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적극성과 주도성을 같은 의미로 생각하던 나를 성찰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2019년, 지난 4년 동안 몽실학교 프로젝트 활동에 참여한 청소년들의 현황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때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 동안 결석을 단 네 번 한 청소년이 있었다. 매주 토요일에 진행되는 만큼 불가피하게 참여자들의 결석이 많은데, 3년 동안 단 네 번의 결석은 실로 엄청난 대기록이었다. 하지만 그 청소년의 이름을 봐도 나는 누군지 게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나름 청소년들과 관계를 돈독하게 맺어왔다고 자부했는데도 말이다. 담당 코디네이터에게 물어보니 그는 매주 토요일 프로젝트 활동 끝나면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는 3년 내내 공예, 만들기 활동에 참여했는데, 그의 출석율은 단순히 재미를 느꼈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록이다. 매주 주말 그를 몽실학교로 향하게 만든 본인만의 이유와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조금 더 깊이 청소년의 활동을 들여다보게 됐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황에 가려져서 티가 잘 나지 않는 학습자들의 노력과 정성을 찾아내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프로젝트를 처음 경험하는 청소년이 조금씩 활동에 진심을 담기 시작하는 그 순간을 더이상 놓칠 수 없었다. 누군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짜 본인이 해보고 싶었던 걸 찾아가면서 겪는 미숙함과 어색함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다.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조금씩 탁월해지는 그들의 변화는 정말 감동적이다.


주도성의 시작은 사랑

적극성과 소극성이 학습자의 성향이라면 주도성은 학습자의 역량이다. 내가 나아가야 할 목표를 이해하고 있으면서 그 과정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획력이다. 문제 해결 능력이자 진로 역량과 공동체 역량을 아우른다. 활동에서 주도성이 나타나는 면면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교육이 이루어지는 공간, 현장에서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과 배우는 내용이 학습자 당사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신뢰와 애정이 쌓여야 비로소 주도성이 조금씩 비집고 나온다.

2022년 다가치학교 첫해, 종종 조용히 찾아와 간식을 받아 가던 오류중학교 1학년 섭씨에게 대대적으로 다가치학교의 시작을 알리는 개소식, <다-씨작>에 놀러 오라고 한 마디 건넸다. 그날은 개소를 축하하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나는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다가 한쪽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는 섭씨를 발견했다. 걱정이 되어 잠시 섭씨와 대화를 조금 나누어 보니 사람이 많은 곳에 있으면 심장이 뛰고 답답하다며 혼자 숨은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날 이후 섭씨가 마음에 쓰였는지, 직원 코디네이터 앙꼬가 마술 프로젝트에 참여해 보는 것은 어떤지 그에게 제안해 봤다. 섭씨는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결국 마술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시간이 조금 흘러 축제 날 섭씨는 마술 공연을 올렸다. 그는 어떤 멘트도 없이 망토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마술 공연을 했다. 물론 실수도 많았다. 그래도 그는 사람들 앞에 서서 카드 마술을 조용히 선보였다.

언젠가 행사 사진과 영상을 찍어야 하는데 사람이 없어 곤란하던 차에 우연한 기회로 섭씨에게 카메라를 맡겨봤다. 섭씨는 그날을 계기로 카메라에 푹 빠졌다. 2024년에 특수사진반 프로젝트를 직접 만들었고, 팀장이 되었다. 영상과 CF를 제작하는 C to F 프로젝트에도 들어갔다. 2024년 모든 프로젝트들이 1년 간의 활동 결과를 선보이는 축젯날, 섭씨는 C to F 프로젝트 영상 편집자로서 무대에 올랐다. 섭씨는 영상 취지를 소개하며 소감을 전했다. 움츠러들지 않았고, 머리끝까지 망토를 뒤집어쓰지도 않았다. 스포트라이트 조명을 받으며 편집자이자 감독으로서 무대에 섰다. 발표가 끝난 후에는 곧바로 팀원들과 직접 조성한 사진관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사진을 찍어줬다.

처음 섭씨가 놀라운 용기를 내어 개소식에 찾아온 그 순간부터, 흥미를 느끼는 프로젝트을 찾아 거기에 몰두해보고 팀장으로서 무대 위에 섰던 그날까지. 섭씨는 조금씩, 천천히 성장했다. 사람이 두려웠던 그가 사람들과 함께 영상 작업을 해내기까지 무려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구석에 숨어 웅크리길 멈추고 이제 자기만의 세계를 짓기 시작했다. 주도적으로.



서로를 궁금해하는 마음

청소년이 가장 어려워하는 질문이 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볼까?” 학습자가 주도하는 교육과정에 참여하게 되면 초반에 받는 이 질문이 어렵기는 모범생, 성적이 좋은 학생도 예외가 아니다. 정답이 없이 활짝 열린 질문은 그동안 누군가 시키는 과제를 하고 정해진 답을 찾아갔던 청소년에게 정말 낯설 것이다. 이 질문에 대부분은 침묵하고, 빨리 회피하고 싶은 티를 낸다. 내가 들은 가장 당황스러웠던 대답은 “(부착 메모지에)의견을 몇 개 적어야 돼요?” 였다. 세 개만 적어 보자고 했더니, 딱 세 개만 적고 끝났다.

학습자 주도 교육과정의 핵심은 “어떻게 해볼까?”라는 질문에 코디네이터와 학습자 모두가 진심으로 고민하고 토론하여 답변을 합의하고 결정해서 실제로 해보는 것이다. 주도성을 추구하는 모든 과정의 전제는 신뢰와 애정을 기반으로 쌓아 올린 관계다. 관계에는 해야만 하는 것을 하고 싶은 것으로, 나아가 그것을 해내고 싶은 목표로 바꿔내는 힘이 있다. 그리고 사랑과 애정은 프로젝트에 풍부한 상상을 일으키는 마법을 부린다. 다가치학교는 교실을 벗어나 공원을 조성하면서 코디네이터와 학습자 사이의 위계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학습자가 동료들, 코디네이터와의 관계가 좋을 수록, 배움터를 신뢰할 수록 주도성은 비례하여 커진다. 이 모든 과정의 시작, 그리고 신뢰로 이어지는 첫 번째 관문은 서로를 궁금해하는 마음이다.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와 경험, 취향이 궁금해.”

학습자들이 어떤 취향을 가지고, 어떤 동기에 의해, 어떤 이야기와 경험을 가지고 이곳에 왔는지 묻는다. 단순히 말로만 묻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돕는 다양한 도구를 활용한다. 프로젝트 교육과정 초반에는 간단한 활동을 해보면서 학습자가 솔직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마련하고 관계를 쌓아간다. 자신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신뢰가 생기기까지 짧게는 한 달, 정말 오래 걸리는 경우에는 반 년 이상 걸린 경우도 있었다. 그 대화 속에서 학습자들의 욕구와 관심 주제를 발견하고 프로젝트로 견인하는 것은 응당 코디네이터의 몫이다. 활동은 그 자체만으로 학습자가 자기 자신을 탐색하고 취향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어야 한다. 학습자는 자신의 취향을 또렷하게 만들고, 타인과 교류하고 공감하면서 함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학습자 개개인의 고유함이 드러나는 활동

앞서 주도성이 나타나는 모습에는 다양한 면면이 있다고 했다. 그 다양한 면면을 하나의 말로 표현해 보자면 ‘쪼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쪼가 있다는 말은 특유의 습관이나 고집이 있다는 의미인데, 나는 그것을 고유성이라 부른다. 코디네이터라면 두 눈을 번쩍 뜨고 안테나를 바짝 세워 그 작은 반응을 찾아내 기꺼이 환대해 보자. 섭씨는 2년 동안 지독하게 카메라와 영상을 파고들었다. 그가 만든 콘텐츠에는 나름의 개그 요소가 들어갔는데, 그 장면에 굉장히 뿌듯해 했다.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할 때 유독 좋아하는 구도와 포즈도 있었다. 이처럼 꾸리들을 떠올리면 그들의 고유한 ‘쪼’가 보인다.

다가치학교의 가장 중심이 되는 프로젝트 교육과정 이름도 <다-움 프로젝트>라 지었다. 이때 다-움은 나다움과 우리다움을 뜻한다. 나다움을 찾아 우리답게 프로젝트 활동을 해나가자는 의미다. 다가치학교의 프로젝트들이 유독 특별하고 유별난 활동을 해낼 수 있는 이유도 꾸리들의 고유한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각자의 고유함이 잘 어우러져 있는 ‘다가치스러운’ 모습이 이 공간의 정체성이자 우리 다운 모습이다.

사람마다 다른 고유성이 교육 활동에서 드러나고 반영되는 것이 우리가 부르는 학습자 주도성이다. 학습자가 진심을 다해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학습자가 주도하고 성취해 본 경험으로 발견한 자신만의 고유함은 일상과 다양한 활동을 이루는 힘이 된다. 이렇게 주도적으로 활동을 이어가다보면, 어느새 자신만의 특별하고 고유한 구석이 삶에 자리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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