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 스스로 탁월해지기

학습자가 성장하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by 얼룩


| 성장 |

탁월(卓越)함은 내 안의 벽을 뛰어넘는 성장이다.


교육활동은 학습자들의 긍정적인 변화를 추구한다. 단지 아는 것이 많아지고, 다룰 수 있는 기술이 늘어나는 것만이 교육으로 인한 변화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우린 모두 알고 있다. 교육은 세상을 더 자세하게 이해하는 나만의 관점이 생기도록 돕는다. 그동안 교육자들은 학습자가 자신의 삶을 주도적인 태도로 개척해 나가는 힘을 키우길 바라며 교육과정을 고민해 왔다. 그들은 “당신 덕분에 제가 더 나은 모습으로 변했습니다.”라고 말해주는 몇몇 다정한 학습자들이 있기에 그 어려운 상황을 버텨가며 교육 현장을 일궈왔다.

이렇게 큰 보람을 주는 학습자들의 변화와 성장이 일어나는 과정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사자가 직접 말해주기 전까지, 눈에 띄는 변화가 생기기 전까지 학습자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은 변화의 과정을 알아차리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변화의 작은 싹이 자라날 때 미처 눈치채지 못해 금방 그 싹이 다시 시든 것은 아닌지 불안할 때도 있다. 분명한 것은 프로젝트 활동을 겪으면서 학습자들은 분명 어딘가 달라졌다. 그 달라진 지점을 찾아내는 조금 더 섬세한 말그릇과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단순하게 달라졌다는 말로 뭉뚱그리지 않기 위해 변화와 성장의 상을 잡아줄 기준을 세웠다. 그것은 학습자가 스스로 추구하는 탁월함이다.


탁월해지기

기준을 바꿔 보자. 남들보다 뛰어난 성과를 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자신 앞에 높게 세워진 벽(卓)을 넘어서는(越) 모든 사람이 탁월하다. 학습자가 그동안 상상하기 어려웠던 목표를 도전하는 시도에 기꺼이 동행하는 것이 역시 교육의 역할이다. 잘 짜인 교육과정은 학습자가 탁월해지는 변화를 일으킨다. 앞에 놓인 벽은 사람마다 다르다. 시험 점수일 수도 있고, 늘지 않는 실력일 수도 있다. 실패가 반복되어 소극적으로 움츠러들었다면 눈앞에 있는 벽은 감히 넘어설 상상조차 못 할 만큼 강고할 것이다. 벽에 가로막혀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늪에 빠져있을 때 이를 극복하고 나아가기란 정말 힘들다. 남들과 비교하여 자신이 지나치게 평범하다고 생각하거나, 남들보다 못하다는 무력감에 빠져버린 청소년이 너무나 많다.

2023년 다가치학교에 화장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청소년 8명이 모였다. 모두 화장을 배워보고 싶다는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메이크업을 주제로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금손강림이라 이름 지은 프로젝트는 초반에 정말 많이 헤맸다. 화장이라는 뚜렷한 분야가 있어 화장 기술을 배워볼 수는 있었지만, 기술을 배우는 것 외에 프로젝트 목표로 삼아 볼 도전 과제와 목표를 세우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그때 코디네이터가 집중한 목표는 기술을 배우고 싶어 하던 학습자들과 조금 달랐다. 그는 자신에게도 어려운 화장 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팀원 사이에 형성된 관계의 밀도를 높이는 작업에 힘을 썼다. 코디네이터 가이아는 늘 대화를 돕는 카드들을 가지고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감정, 요구, 관계, 꿈 등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카드들이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늘 20분은 대화 카드로 자신의 감정과 상태를 이야기하고, 깊은 고민까지 나눴다. 코디네이터가 꾸준히 시도한 대화는 자기 자신을 꾸미는 화장의 기술이 아니라 스스로 드러낼 수 있는 태도와 마음을 메이크업하도록 이끌었다. 처음엔 코디네이터가 진행하던 대화 시간은 그 팀만의 문화가 되었고, 학습자가 돌아가면서 직접 대화를 이끄는 진행자가 되기도 했다. 금손강림 팀은 모두가 쉬지 않고 수다를 떨면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금손강림 팀의 첫 셀카 단체 사진이 기억난다. 활동을 시작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았을 때 찍은 이 사진 속 청소년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거나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코디네이터 한 사람뿐이었다. 화장은 단점은 가리고 장점은 돋보이게 한다. 화장에 처음 관심을 가진 청소년들도 처음에는 자신의 얼굴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가리는 방법과 장점을 드러내는 방법을 궁금해했다.

최종 목표가 된 마지막 작업은 사진전이었다. 전시된 사진에 담긴 것들은 내가 예상한 화장과는 달랐다. 전시에는 활동으로 익힌 화장 기법이 두드러지는 사진이 아니라 프로젝트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진짜 모습이 담긴 사진들로 가득했다. 떨어지는 낙엽 속에서 은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어떤 사진에는 바닥에 누워 눈을 감고 편안한 표정이 담겼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이 돋보이는 사진도 있었고, 남몰래 취미로 애니메이션 코스프레를 하는 청소년은 자연스럽게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화장은 그 모습을 돋보이게 해줄 수단일 뿐이었다. 금손강림 팀은 자기 자신이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드러낼 수 있는 모습을 연출해 사진을 찍었고, 그것을 엽서로도 만들었다. 사진전에는 화장법을 익히며 서로의 캔버스가 되어준 그들의 장난스러운 얼굴도 걸렸다. 엽서가 담긴 택배 상자를 여는 날, 나에게 그들은 수량이 부족하지만, 선물로 주겠다며 자신 있게 엽서를 건네주었다. 프로젝트를 끝까지 완주한 그들은 모두 조금은 탁월해진 티가 났다.



개별화 교육과정

개별화 교육과정이라는 개념이 있다. 학습자 개개인이 마주한 난관을 파악하고 그를 지원하는 교육공동체가 팀이 되어 맞춤형 전략을 세운다. 장애를 가졌거나 학습 능력이 부진한 학생을 대상으로 편성된 특수교육 설계 방안으로 시작되었다. 일반적인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운 학습자들을 대상으로 진단과 교육과정 설계, 실행과 평가까지 섬세하게 이어진다. 특별한 학습자들을 위해 설계된 교육과정에서 시작한 개념이지만 교육활동에 참여하는 모든 학습자에게 적용할 수 있게 확대해 봄 직하다. 학습자 주도 프로젝트가 개별화 교육과정의 보편적인 모델이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것을 넘어보려는 모든 시도가 배움이고 공부다. 교실에서 교육자는 학습자가 처한 서로 다른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기 어렵다. 교육자가 더 자세히 학습자를 관찰하고 소통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학습자의 욕구와 상태, 학습 동기를 파악할 수 있는 학습자 주도 프로젝트 활동을 통해 학습자를 이해하고 또 학습자가 탁월해지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다른 수업이나 프로그램 구성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교육자들이 팀을 이루어 학습자 개개인이 마주하고 있는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의견을 나누고 실질적인 방안을 찾을 수도 있다. 학습자 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학습 공원에서는 교실에 얽메이지 않는다. 교사 역시 협력을 통해 학습자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다. 이후에 소개할 ‘코디네이터 크루’가 교육 활동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도 개별화 교육과정, 학습자 주도 프로젝트를 지향하는 학습 공원을 조성한 덕분이다.

2019년, 경기도교육청의 청소년 방송국 사업을 맡아 운영하며 청소년들과 재미난 시도를 해봤다. 프로젝트 이름은 여성 청소년 단편영화 제작 프로젝트. 감독 겸 작가를 먼저 모집했고 함께 시나리오 작성부터 시작해 영화 초반 작업을 3주간 진행했다. 여러 차례의 회의 끝에 조율하면서 작품을 두 개로 만들기로 하였고, 감독이 되지 못한 청소년들은 자연스럽게 촬영, PD 등 지원 역할을 맡았다. 할머니와의 추억을 담은 잔잔한 작품과 여성의 외모지상주의 강박을 스릴러로 표현한 작품이 만들어졌다. 처음 자신의 의견을 잘 얘기하지 못했던 소극적인 청소년은 다른 동료들의 응원과 배려에 힘입어 영화감독으로서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영화로 구현해 냈다. 특성화고등학교를 다니며 영화 촬영 경험이 많았던 한 청소년은 자신의 시나리오보다 할머니 이야기를 담은 시나리오가 더 매력적이라며 촬영감독을 자원했다. 그는 초보 감독을 적극적으로 보좌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청소년들도 직접 촬영 장소를 섭외하기 위해 어른들을 설득하고 또 배역에 적합한 배우를 뽑으려 홍보에도 열심히 발로 뛰었다. 배우를 꿈꾸던 청소년들은 처음으로 영화에 배우로 등장했다.

의견을 잘 내지 못하던 청소년을 더 자세히 소개하자면, 그는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대본을 작성했고, 진심을 다해 팀원들을 설득했다. 영화 촬영 당시에는 본인이 원하는 그림이 나올 때까지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찍었고,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다독였다. 심지어 촬영 장소로 부모님을 설득해 집을 내어줬을 정도로 그의 마음이 커졌다. 편집을 담당한 청소년과 지치지 않고 소통하면서 결국 하나의 단편영화를 완성했다. 이처럼 잘 지어진 학습 공원에서 학습자들은 움츠러든 자신감과 자존감을 조금씩 높여가며 실력도 키운다. 학습자는 스스로 탁월해지기 위해 공부하고 도전하고, 노력한다. 그 과정을 홀로 해내는 것이 아니라 동료 학습자와 함께 협력하고 교육자의 도움을 받는다. 개별화 교육과정은 학습자를 집단이 아닌 온전히 개인으로서 존중하는 관점이다. 일주일에 단 하루만이라도 이 안전한 배움터에서 자신의 탁월함을 추구할 온전한 시간이 필요하다.


늘 그렇듯, 벽을 넘으면 또 다른 벽이 눈앞에 보인다. 하지만 스스로 벽을 넘어본 경험, 동료들과 함께 벽을 부순 경험, 또 조금은 먼 길로 벽을 돌아 새로운 길을 찾은 경험으로 말미암아 내 인생에 또다시 등장할 한계가 그다지 두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 변화를 문제상황에 대처하는 탄력성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활동을 하다보면 스스로 조금은 유연해졌다고 느끼는 시기가 온다. 전보다 시야가 넓어지고, 여유가 생기고, 스스로를 지지하는 힘이 있다고 느껴진다. 그때서야 안다.

“와, 나 조금 성장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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