追伸
윤희에게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었을 수도 있겠지? 벌써 이십 년이 지났으니까.
갑자기 너한테 내 소식을 전하고 싶었나봐.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우리 부모님 기억해?
자주 다투던 두 분이 내가 스무 살 때 결국 이혼하셨어.
엄마는 한국에 남았고, 나는 아빠를 따라서 일본으로 왔어.
일본에 온 뒤로 아빠는 나를 고모한테 보냈어.
가끔 아빠랑은 통화를 하곤 했는데, 이젠 그마저 불가능한 일이 돼버렸어.
얼마 전에 돌아가셨거든.
오늘은 이상하게도 하루 종일 네 생각이 났어.
남들에겐 차마 하지 못하는 말들이 전부 다 너를 향해 있더라.
웃기지 않니? 언제 어떻게 돼버려도 상관없다고 저주했던 아빠 덕분에,
너한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다니.
우리 고모 알지? 내가 자주 말했던 마사코 고모.
아빠가 나를 고모한테 보냈을 때, 고모는 오사카에 살고 계셨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고모를 악착같이 따라오다보니,
오사카에서 삿포로, 삿포로에서 이곳 오타루까지 오게 됐어.
고모는 나랑 비슷한 사람인 것 같아.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과,
북적거리는 곳을 싫어하는 것,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을 좋아하는 것까지.
고모는 겨울의 오타루와 어울리는 사람이야.
겨울의 오타루엔 눈과 달, 밤과 고요뿐이거든.
가끔 그런 생각을 해. 혹시 한 번이라도 운명이 내 편을 들어준다면,
이곳에 여행을 온 너와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물론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참. 오래전에 결혼했다는 소식, 들었어.
늦었지만 축하하려 가지 못해서 미안해.
그때 나는 오사카에서 삿포로로 이사를 하고 있었어.
고모 뜻을 따라서 새 출발 하기로 결심했었거든.
늦었지만 대학도 가고, 무사히 졸업해서 어엿한 직업도 갖고...
어떻게든 이곳에 적응해보려고 했어.
나는 비겁했어. 아빠를 따라 일본으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도망쳤던 거야.
그때, 내가 싫어졌다는 네 말을 듣고 나서 나는 무너졌어.
그게 정말 네 진심일까 의심했으면서도,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웠어.
너는 내 전부나 다름없었거든.
그땐 지금보다 훨씬 어렸고, 여렸으니까.
오랫동안 네 꿈을 꾸지 않았는데, 이상하지.
요즘 자꾸 네 꿈을 꿔. 너도 가끔 내 꿈을 꾸니?
네 꿈속의 나는 어떤 모습이니?
내 꿈속의 너처럼 미소를 짓고 있니?
우리는 이십 년째 서로 외면하고 있는지도 몰라.
물론 나만 그런 것일 수도 있지.
그래. 나만의 착각이겠지.
아무래도 예전의 우리로는 돌아갈 수 없을 거야.
나는 단지, 너한테 말을 건네보고 싶었던 거야.
네 대답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바보 같은 걸까? 나는 아직도 미숙한 사람인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래도 좋아.
나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내가 부끄럽지 않아.
윤희야. 너는 나한테 동경의 대상이었어.
너는 내가 무지를 깨우칠 수 있도록 안내해준 존재였고,
탐험하고 싶은 미지의 영역이었어.
너를 만나고 나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어.
가끔 한국이 그리울 때가 있어.
우리가 살았던 동네에도 가보고 싶고, 같이 다녔던 학교에도 가보고 싶어.
한국에 있는 엄마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또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
보고 싶어. 윤희야.
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끊이지 않길.
좋은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 속에 있으렴.
안녕.
쥰에게
잘 지내니? 네 편지를 받자마자 너한테 답장을 쓰는 거야.
나는 너처럼 글재주가 좋지 않아서 걱정이지만.
먼저, 멀리서라도 아버님의 명복을 빌게.
나는 네 편지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어.
나 역시 네 생각이 났고, 네 소식이 궁금했어.
너와 만났던 시절에 나는 진정한 행복감을 느꼈어.
그렇게 충만했던 시절은 또 오지 못할 거야.
모든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래전 일이 돼버렸네?
그때, 나는 너랑 헤어진 뒤로 삶을 거의 포기했었어.
부모님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내가 병에 걸린 거라고 생각했어.
오빠는 나를 억지로 정신병원에 가뒀어.
나는 그 감옥에서 나오기 위해 오빠가 소개해주는 남자를
만나야 했어. 더 이상 너를 만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결국 나는 그 남자랑 결혼했어.
내가 그런 상태로 누굴 만나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었겠니.
나는 그 사람을 이용한 거야.
그 사람은 나 때문에 오랜 세월 외로워했어.
그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을 짓누르는 죄책감 때문에 고통스러웠어.
나 그 사람이랑 이혼했어.
우습게도, 그 사람이랑 이혼하던 날 가장 먼저 떠올랐던 사람이 너였어.
그래, 네 말대로 우리는 이십 년째 매정한 체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그게 서로를 위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쥰아. 나는 나한테 주어진 여분의 삶이, 벌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동안 스스로에게 벌을 주면서 살았던 것 같아.
너는 네가 부끄럽지 않다고 했지?
나도 더 이상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내 딸 얘기를 해줄게. 이름은 새봄.
이제 곧 대학생이 돼.
대학생이라니, 대단하지 않니?
나는 새봄이를 더 배울 게 없을 때까지,
스스로 그만 배우겠다고 할 때까지 배우게 할 작정이야.
편지에 너희 집 주소가 적혀 있긴 하지만,
너한테 이 편지를 부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한테 그런 용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만 줄여야겠어.
딸이 집에 올 시간이거든.
언젠가 내 딸한테 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용기를 내고 싶어.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야.
추신, 나도 네 꿈을 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