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몇년 만에 만난 사촌 오빠와 밥을 먹었다. 그간 사는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찮게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몇 마디를 주고 받다가 오빠가 놀란 눈으로 "페미니스트야?" 라고 묻길래 "응. 나는 페미니스트야."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오빠의 비아냥이 시작되었다. 그는 " 너는 참 매력적인 여자고, 춤도 잘추는 재능이 많은 여자였는데, 어쩌다 페미니즘과 같은 것에 빠져.." 라고 말했다. 그에게 나는 '착하지만 우매해서 세류에 현혹되어 남들 따라 페미니스트가 된' 안타까운 동생이었다. 몇 번인가 전화가 와서 페미니즘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 왈, 동물의 세계만 봐도 새끼는 암컷이 기른다며 돌봄 노동은 여성에게 부합하는 것이라 말했다. 여성인 사업 지원을 위한 국가 예산의 형평성에 어긋난다 말했다. 노브라로 공중파 방송을 나온 어느 아나운서가 페미니스트의 본보기냐 묻기도 했다. 질문과 의견 사이 "페미니스트 같은 그런 쓸데없는 거 하지 말고.."라고 말했다.
극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내가 페미니스트가 된건 여성으로서 겪은 차별의 경험과 힘듦 때문에 책을 찾아 읽다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고, 인권과 평등과 정의에 관해 더 알고 싶어 계속 공부 하고 있다 말을 해도 '페미니즘은 공산주의와 궤를 같이 한다'와 같은 헛소리를 했다. 페미니즘에 대해 편견을 가진 분들은 많다. 그 편견으로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들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무식과 편견으로 뭉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도 나를 설득할 수 없고, 나도 그를 설득할 수 없다는걸 잘 알기 때문이다. 감자 한 개 물 없이 먹은 심정으로 그의 말을 받아 주고, 내 의견을 얘기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왜 이런 무익한 대화를 받아줘야하나 의문스러웠다.
오빠와 나는 가볍게 웃으며 안부를 묻는 관계 정도의 관계이다. 페미니즘은 한 개인의 철학이고 정체성인 문제인데, 그는 선을 넘어 나를 설득하기를 바랬다. (아니 대체 왜????) 나를 설득하고 싶었다면 페미니즘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얘기하면 좋을텐데, 논증이 되지 않는 의견을 마치 반박불가의 사실인냥 말했다. 생물학적 여성의 특성과 돌봄노동의 상관관계에 대한 과학적 근거 없이, 여성인 사업 지원 사업의 맥락에 대한 이해없이, 탈코르셋에 대한 인문사회, 철학적 지식도 없이. 얕음이 드러나는 질문과 의견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없었다. 그는 공산주의와 궤를 같이 한다고 말하며 "대학 때 정치경제학을 수강한 바 있음" 이라고 말했다. 대학 때 정치경제학을 수강하며 대체 뭘 배웠길래 페미니즘과 공산주의를 엮는 뇌의 회로를 가졌나 잠깐 궁금했지만, 답장 조차 하지 않았다.
모를 수 있다. 나도 모르는 것 투성이다. 똑똑한 척 하고 싶을 수 있다. 나도 잘 모르지만 아는 척 할 때 많다. 모르지만 가르치고 싶을 수도 있다. 나도 모르지만 아이들에게 자꾸 가르치려 든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감히 누군가의 정체성을 바꿀 수 있다고 여기지 않고, 쉽게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선을 넘는 행동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중요하다. 몇년 만에 만난 사촌동생이 페미니스트가 된 것이 왜 그에게 그렇게 안타까운 일이 되었고, 나를 가르쳐서 바르게 선도해야 할 의무가 갑자기 왜 생긴건지 이해할 수 없다.
그에게 선을 확실히 그어야 겠다고 생각한건 결정적으로 그의 눈치없고 배려없는 태도때문이었다. 주부에게 저녁 시간은 바쁘다. 아이들 목욕도 시켜야하고, 밥도 해야하고, 할 일 투성이다. 식사 준비가 늦어져 종종거리고 있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바빠서 통화 힘들다고 문자를 보냈는데, 남편인줄 알고 실수로 받아버렸다. "그런데, 그 페미니즘 말야.. 오빠가 예전에 말이야.."주절주절. 말을 끊지 않고 주절주절 말하기를 좋아한다는건 알지만, 바빠죽겠는데 전화 붙들고 있느라 애들 굶기랴싶어 매몰차게 끊었다. 대화 상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오빠가 전화했는데.."와 같은 말을 하며 기분 나빠하는 그 어이없는 뻔뻔함에 당황했다. 결국 다음날 전화를 걸어 "오빠는 나에 대해서도 모르고,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 같아. 오빠가 조언이라고 해주는 것들 내게 전혀 도움 되지 않을 것 같으니 그만해줘. 부탁할께."라고 말했다. 속 뜻은 '됐고, 저리 꺼져 줄래?' 였다. 오빠에게서 긴 문자가 왔다. 영어와 일어를 섞어서. 사실 읽기도 싫어서 읽지 않았다. 국어 보다 영어나 일어가 더 편한 것도 아닐텐데, 왜 굳이 영어와 일어로 문자를 보냈을까? 내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했고, ' 나 이만큼 똑똑한 사람이야'라는걸 티내고 싶었던 걸까? 설마 그정도로 찌질하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하며 문자를 지웠다.
오빠 때문에 내가 어떤 유형을 싫어하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배움의 열의 없이 고정된 사고로만 사는 사람, 그 고인 생각들로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 궤변인데 자기만 의기양양하고 다른사람의 의견은 도통 관심 없는 사람, 자신의 궤변으로 누군가를 논리적으로 쉽게 설득시키거나 변하게 만들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 말의 핵심없이 주절주절 늘어놓는 사람, 'stop' 사인을 읽지 못하는 눈치 없는 사람, 상대방을 피곤하게 만드는 자신의 행동이나 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 자신을 견뎌내야 할 의무가 상대방에 있다고 믿는 사람.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피해야 할 사람은 상대하지 말고 차단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