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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기록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by 희구

1931년, 약 100년 전 태어난 작가가 경험한 세계는, 2000년생인 내가 쉬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다르다. 소설 속 '나'가 사는 시간 속에 아파트는 당연히 없을 뿐더러 뒷간이 있었고, '나'는 그 뒷간에서 친구들과 함께 엉덩이를 깐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경하기 위해 처음 개성에 갔던 날, 유리창에 부딪힌 빛을 처음 보았고,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감정을 끌어안은 채 개성의 땅을 밟았다. 그 후 방학마다 기차를 타고 개성을 오갔으며 서울살이에 대한 자부심, 시골에 대한 그리움을 동시에 느끼며 유년기를 보냈다. 좌익 빨갱이라는 오해를 받아 벌레 취급을 받은 경험도, 현저동에서 사람 하나 없는 풍경을 바라보며 찬란한 예감을 느낀 경험도 있다.


이 시기는 나에게, 띄엄띄엄 정보로만 채워져 있었다. 하물며 나에게는 그 정보조차 희박했는데, 나는 무엇이든 재미가 있어야 관심을 갖는 성질을 지닌지라, 맥락 없이 사건만 툭툭 던져놓는 역사가 나에게는 그토록 재미가 없었다. 이는 아마 제대로 된 역사 선생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나에게 이 시간은 일제강점기, 2차 대전, 육이오, 이렇게 큰 사건이 나열된 과거에 불과했다. 그 시간에 살고 있던 사람을, 그 사람이 보았던 풍경을 떠올리기에는 내 상상력이 부족했다. 이토록 생생한 묘사를 보기 전까지는.


나는 이 기록 덕분에, 꽤나 가까운 시간임에도 무지했던 그 시간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생생한 묘사가 그려내는 선명한 장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 시기의 풍경을, 가족애를, 교육적 환경을 살펴볼 수 있었다.


앞으로 100년 간 이 세상은 또 얼마나 바뀌게 될까. 2100년생인 누군가는 지금 이 시기를 가히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을 기록하고 있는 수없는 글이, 이미지가, 영상이 그 상상력에 보탬이 되리라. 어쩌면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등장했을 수도, 기계가 지배하고 있을 수도, 혹은 계급과 차별이 더욱 판을 치고 있을지도 모르는 미래에, 2025년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 되리라. 그 현장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소설가라는 직업은, 소중할 수밖에 없다.





"요즘도 싱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다는 독자 편지를 받으면 내 입 안 가득 싱아의 맛이 떠오른다. 그 기억의 맛은 언제나 젊고 싱싱하다. 나의 생생한 기억의 공간을 받아 줄 다음 세대가 있다는 건 작가로서 누리는 특권이 아닐 수 없다."



"뒷간도 재미있지만 뒷간에서 너무 오래 있다 나왔을 때의 세상의 아름다움은 유별났다. 텃밭 푸성귀와 풀숲과 나무와 실개천에서 반짝이는 햇빛이 너무도 눈부시고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어 우리는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한숨을 쉬었다. 뭔가 금지된 쾌락에서 놓여난 기분마저 들었다. 훗날 학생 입장 불가의 영화를 교복의 흰 깃을 안으로 구겨 넣고 보고 나와 세상의 밝음과 낯섦에 접할 때마다 나는 유년기의 뒷간 체험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처럼 느끼곤 했다."



"저녁노을이 유난히 새빨갰다. 하늘이 낭자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을의 풍경도 어둡지도 밝지도 않고 그냥 딴 동네 같았다. 정답던 사람도 모닥불을 통해서 보면 낯설 듯이. /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내 갑작스러운 울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건 순수한 비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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