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신축년으로 해가 바뀌었지만 코로나19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20년 만의 기록적인 한파와 폭설까지 더해져 집 1백 미터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반강제 감금 생활이 이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 89년 만의 이상고온으로 서울 한낮기온이 10도를 훌쩍 넘긴 지난 1월 23, 24일 주말, 강남의 한 백화점에 모피를 차려입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모피 코트의 물결은 코로나19로 극심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과 대조를 이뤄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주요 백화점 모피 의류 매출은 해마다 감소하고 관세청 수출입통계에 따르면 지난 2020년 1월부터 11월까지 모피 및 모피 의류, 관련 부속품 수입은 전년 동기 대비 49% 줄어들었다. 이뿐 아니라 런던패션위크 외에 해외 럭셔리 브랜드와 유통까지 잇따라 퍼 프리(fur free) 선언을 하는 등 모피 시장은 지속적인 ‘윤리적 소비’ 압박을 받고 있다. 모피 시장의 이 같은 동향은 최근 초고가 모피 코트의 등장이 ‘과시적 소비’가 아닌 ‘과시적 행위’임을 입증한다.
‘최상품 밍크’로 만들어져 수천만 원대는 할 법한 밍크코트의 복귀는 ‘그들만의 리그’의 이례적 외부 노출로 추정된다.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은 물론 국내 행동반경 역시 좁아지면서 부를 과시할 통로가 차단되자 집에서 가까운 백화점이나 쇼핑몰이 이들의 과시 욕망을 대리 충족하는 장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시장조사전문 트렌드모니터가 지난해 9월 발표한 백화점 인식 조사에 따르면 백화점 이용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가운데 쇼핑 이외의 목적으로 방문하는 비중은 2014년 28.9%에서 2020년 32.4%로 늘었다. 이는 유통채널로 경쟁력이 감소하고 있는 백화점이 코로나19로 제한된 사적 모임을 대체하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의미 있는 수치 변동으로 분석된다.
패션의 자기충족적 기능이 커진 가운데서도 모피 코트는 타인의 시선을 절박하게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과시적 사치’의 범주에 고정돼있다. 모피 코트가 코로나19 전에는 특정 사회 계층 내에서 ‘경쟁적 과시’로 기능했다면, 코로나19로 인해 외출이 일부 공공장소로 제한되면서 ‘차이의 과시’로 복귀되는 듯하다.
영화 ‘캐롤’은 차이의 기호로서 모피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귀부인 캐롤(케이트 블란쳇)은 맨해튼 백화점을 찾을 때마다 고급스러운 카멜 모피 코트를 걸치고 나타난다. 반면 백화점 점원 테레즈(루니 마라)는 품이 넉넉하고 거친 질감의 울코트 걸쳐 상대적으로 앳된 모습으로 캐롤과 대조를 이룬다. 그들이 걸치고 있는 코트만으로도 손님과 점원, 부유층과 노동자 계층이라는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각인한다.
영화 ‘관상’과 ‘설국열차’는 차이의 기표로서 모피를 십분 활용했다. ‘관상’에서 수양대군 역을 맡은 이정재가 검은 모피 숄을 걸치고 슬로모션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한 장면만으로 수양대군이 절대지존 왕이 될 재목임을 관객이 수긍하게 한다. 당시 제작진들은 캐릭터들의 계급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수단으로 의상이 최적이라고 판단해 각각 인물의 성격은 물론 인물 간 계급 격차를 나타내기 위해 설정 하나하나에 신경 썼음을 밝힌 바 있다.
‘설국열차’에서 메이슨 총리 역을 맡은 틸다 스윈튼은 묵직한 갈색 모피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꼬리 칸 사람들에게 연설을 한다. 이 모피 코트는 열차의 자원으로 문명 생활을 향유하는 앞 칸 사람들과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블록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꼬리 칸 사람들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역할을 한다. 제작진에 따르면 의상 디자이너 캐서린 조지가 준비한 이 코트는 상당한 고가로 스틸 작가의 카메라, 메이킹 기사의 카메라와 함께 스튜디오의 금고에 항상 따로 보관했다(씨네21 2014).
이처럼 차이의 과시로서 모피는 과장된 스타일과 높은 가격대가 위압적인 분위기를 내는 물리적 심리적 기여 요인으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영화에서 빠져나와 한국 현대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여성에게 모피가 욕망의 매개체로 강렬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6, 70년대 경제부흥기 강남지역 땅값을 쥐락펴락했던 복부인들에게 모피는 땅을 사들이는 이유이자 결과인 동시에 거래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모피가 이처럼 부의 과시이자 신분 상승의 욕망 코드로 부상한 데는 자본가들만이 구매할 수 있었던 한정된 공급과 높은 가격에 따른 희소가치, 상대를 제압하는 위압적인 분위기를 내는 시각적 이미지의 상호작용에 기인한다.
한국 복부인들의 모피는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존재” “남성이 소유한 동산(動産)을 증명하는 품목”(유한계급론, 2005)이라는 19세기 철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에서 벗어나, “사치의 여성화는 남성의 ‘간판으로서 여성’의 특징을 드러내기를 멈추었고 구매 결정에서 여성의 재정적 독립의 특징을 드러냈다”(사치의 문화, 2004)라는 21세기 철학자 질 리포베츠키 주장에 설득력을 더한다. 이처럼 남성 소유물이 아닌 ‘독립된 개체’로서 여성, 욕망을 채우는 데 주저하지 않는 ‘소비 주체’로서 여성의 등장을 알린 시작점이 됐다.
단, 주체적 개인으로서 소비 이면에는 남성적 권력의 복제를 함의하고 있어 미완의 독립이라는 아쉬움을 남긴다. 모피가 복부인들은 물론 남성에 비해 왜소한 체구의 여성들이 상대에게 힘을 과시하는데 효과적이었던 만큼 남성적 권력 재현 의지가 내포돼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모피는 이처럼 과거 남성과 동등해지기를 주장하는 여성이 사회적 관계에서 폭군적 위치를 점할 수 있는 도구로 유용했다. 그러나 위압과 제압으로서 모피를 입는 행위가 결국 남성적 행동의 재현이자 복제라는 한계를 가진다.
‘마조히즘(masochism)’의 시작으로 알려진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소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 제베린은 “티치아노의 아름다운 모델이 부끄럼 때문이 아니라 감기에 걸릴까 봐 걸쳤을 법한 이 폭군 같은 여성의 모피는 여성과 여성의 아름다움 속에 깃들어 있는 포악함과 잔인성의 상징이 되었죠”라며 티치아노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에 관해 설명한다.
소설 속 모피는 원시사회 사냥을 통해 힘을 과시하던 남자들의 상징을 받아들인 여성들의 미러링(mirroring)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는 과정에서 남성의 환상이 만들어낸 것으로 제베린은 극 중 반디의 폭력적 사랑을 여성들에게 그대로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환상을 완성한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모피의 권력이 남성적 힘의 상징을 복제한 여성에게 부여된 특권이면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보는 자의 시각에 따라 권력으로서 가치가 증폭되기도 하고 빛을 잃기도 함을 말해주는 듯하다.
모피를 입은 여자들의 과시 욕망의 기저에 지배자로 군림해온 남성의 권력을 향한 동경이 깔려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상 고온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피의 출현은 경쟁적 과시의 기회가 줄어든 이들의 절실한 도발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가 과거와 달리 보는 이들의 위축을 끌어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허한 도발에 그치고 있다.
[* 본 글은 외부에 기고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