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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이상 Aug 09. 2020

못난 인간의 잘난 단점,
스톡홀름 증후군의 반전

패션, 사람을 말하다 ; 패셔너블 자아성장 프로젝트

호감과는 거리가 먼 외양과 쓸데없이 생각만 많은 성격, 자의식 과잉을 신성시하는 자기 PR 시대를 철저하게 역행하는 자가 나다. 이런 현실 부적격자의 요건을 안고 20년이 넘게 ‘정상적’ 사회생활을 해온 내가 나는 정말이지 애틋하고 대견하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한쪽이 올라가는 비대칭 입꼬리에 주름 잡힌 미간과 어두운 얼굴빛까지 음울한 은둔자 분위기를 내뿜는다. 누가 봐도 비호감인 외모로 인해 자라면서 한 번도 엄마에게조차 “우리 딸, 예쁜 딸”이라는 말 한마디 들어보지 못했고 외할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늘 냉랭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서는 날 때부터 비호감 외모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의 유일한 정신적 아군인 이모마저도 조카인 나를 처음 마주했던 순간을 “고구마가 나온 줄 알았다니까”라고 기억할 정도인 걸 보면 내 외모가 태어난 순간부터 엄마에게 상처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외모 콤플렉스의 한풀이 대상인 엄마는 “누군 뭐, 나도 예쁜 딸 낳고 싶었어”라고 응수하며 본인 역시 딸의 못난 얼굴로 인한 피해자임을 주장한다.  

       

어릴 때는 뼈와 살밖에 없는 깡마른 몸에 피부가 까만 정도였다. 까만 피부와 툭 튀어나온 눈을 제외하면 그런 데로 봐줄 만했다. 고등학교 때쯤 대책 없이 하락하는 성적과 반비례 해 살이 찌기 시작하고 얼굴 윤곽이 틀어지면서 턱이 툭 튀어나온 사각턱의 비대칭 얼굴이 됐다. 때늦은 사춘기는 이렇게 얼굴과 몸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못난 인간의 못난 자학         


외할머니의 한심한 듯 바라보던 차가운 표정은 심장 깊은 곳에 뽑을 수 없는 비수가 돼 자리 잡고 있다. 사실 내 정서적 문제의 원인은 ‘외모 콤플렉스’보다는 무한 긍정의 애정을 받아야 할 대상에게 거부된 데서 오는 ‘거절 경험’의 뿌리 깊은 상처라는 해석이 타당할 듯싶다.  

     

기대보다는 포기, 미움보다 수용이 익숙해질 나이임에도 여전히 집단으로부터 거부당할 수 있다는 공포감에서 자유롭지 않아 습관적으로 매 순간 아웃사이더로 밀어내며 자신을 방어한다. 외할머니의 냉랭함과 엄마의 시니컬함에 익숙해 나 역시 독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본능적 객기를 부리기도 하지만 이 순간에서마저도 집단에서 거부당할 수 있다는 불안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런 과거가 고스란히 각인된 외모와 성격을 가진 채 20년이 넘는 시간을 타인과의 지속적 관계와 소통을 요구하는 기자로 보냈다. 기자로 꾸준히 버텨왔기 때문인지 가장 가까운 몇몇 지인들은 심각한 ‘자학성 외모 콤플렉스’라는 나의 호소를 의아해하기도 한다.   

   

외양의 가치를 중심으로 한 패션 부문은 되레 ‘개성’이라는 생존 방식을 터득할 있는 풍부한 자원을 제공한다. 가끔 아빠의 바람대로 교사가 된 내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하지만 그나마 개성 발굴의 기회가 있는 패션 부문 기자였기에 정상인 척 살 수 있었다.    

  

그렇다고 패션이 개인에게 개성의 외양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패션 영역에서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겪으면서 사회적인 자아와 진정한 자아를 분리하는 이중적인 삶의 방식을 터득했다. 사회적 자아가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상’ 범주 안에서 살아가게 한다면 진정한 자아는 사회적 자아와 공존하거나 대립하면서 ‘비정상’인 나의 불안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게 한다.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에서 마사 누스바움은 ‘정상’은 존재하지 않은 허상임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정상’에 관한 감정적 통찰을 통해 사회적 정체성 성장 과정 속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혼란의 이유를 설명했다.    

       

정상은 사회적으로 강제된 정체성이기에 누구나 ‘정상 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사회적으로 거부당할 수 있는 외양에 ‘개성’의 외피를 하나 더 씌웠다. 패션 부문은 정상인으로 자신을 재구성할 수 있는 자기 포장과 자기 가장이 가능한 영역이다. 그럼에도 삶의 일부가 된 만들어진 정상성은 콤플렉스로 응집된 본성을 바꾸지는 못한다. 


마사 누스바움은 ‘수치심과 낙인’에 관한 문제점을 다루면서 ‘능력과 정상성을 지닌 거짓 치장을 한 자기를 만들어내는’ 환자들, ‘불완전함에 대한 거부’ 사례를 분석했다. 여기서 그는 위니콧의 ‘거짓 자기’의 사회 적응 방식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거짓 자기는) 일반 사람들에게 우리의 눈물이나 필요, 취약성을 보이고 싶지 않을 때 우리가 사용하는 자기 보호 방식이다. 바꿔 말하면 거짓 자기는 타당하고 제한된 형태의 사회적 수치심에 대한 일종의 방어이다”     


패션으로 구축한 ‘거짓 자기’는 사회에서 거부당할 수 있다는 태생적 공포를 꽤 그럴듯하게 잠재웠다. 그럼에도 사회적 자아로 구축한 ‘거짓 자기’가 진정한 자아의 불안까지 완벽하게 방어할 수는 없다. 지인들이 나의 자학성 외모 콤플렉스 고백에 의아할 때마다 ‘거짓 자기 전략’의 성공에 부정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바뀔 수 없는 본질로 인해 극심한 정체성 혼란에 빠져들었다.       


패피의 매력은 예쁨과 무관하다. 패피는 패션뿐 아니라 소비산업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예쁨의 개념까지 뒤바꾼다. (김나영, 린드라 메딘, 한혜연, 공효진)


못난 인간의 잘난 단점


허상으로서 정상이든 강박적 정상이든 패션 영역에서만큼은 비교적 통상적인 정상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자기 최면이 가능하다. ‘패션의 제국’ 질 리포베츠키의 표현대로 경박한 시대의 상징으로서 패션의 가변성은 변화 강박을 자극하지만 그만큼의 보상을 안긴다. 

       

“패피는 예쁘지 않아”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처음 이 말을 듣는 이들은 대개 의아해하지만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에는 대부분이 수긍한다. ‘전형적인 예쁨’의 조건을 충족한 사람은 결핍이 부족해 보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패션 블로거로 시작해 패션사업을 성공적으로 일군 린드라 메딘은 패션 산업에서 ‘못난 외모’의 상대적 경쟁력 우위를 입증했다. 한국 린드라 메딘이라 할 수 있는 한혜연은 로망을 벗어나는 체구와 외모지만 ‘슈스스’(슈퍼스타 스타일리스)라는 타이틀을 앞세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고, 패피가 직업이 된 김나영 역시 시작점은 과장된 행동으로 주목받은 방송인이었지만 지금은 스타일리시한 패피로 모든 여성들의 워너비가 돼 ‘셀럽 산업’을 주도하는 인물이 됐다. 배우 공효진은 ‘전형적인 예쁨’에서 벗어나 있지만 40대인 지금까지 전 세대를 아우르는 스타일 롤모델로 변함없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패션은 사회적 보완장치이고 문화적 보강장치다. ‘유한계급론’ 소스타인 베블런의 해석에 따르면 패션은 지위 계급의 ‘자기 과시적’ 기표로 작동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보다는 패션을 개인주의의 중심으로 해석한  ‘패션의 제국’ 질 리포베츠키의 주장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 타고난 지위로서 역량에 의해 성패가 가늠되는 가족 중심의 계급사회가 아닌 능력과 노력만큼의 성공이 가능한 개인 중심의 자유주의 사회로 전환되면서 패션은 개인이 사회적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긍정적 자아상의 ‘자아표출’ 수단으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닿을 수 없는 예쁨 욕망에 시달린 20대에는 각지고 불룩 튀어나온 턱을 감추려 애쓰고 조금이라도 가늘어 보이기 위해 몸을 조이는 옷을 입고 걷기도 힘든 킬힐을 신고 뒤뚱뒤뚱 걸었다. 30대가 돼서는 섹시해 보이고 싶어 납작한 가슴에 패드를 덧대 클리비지룩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패션은 욕망이지만 유행에만 편승한 욕망은 정상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사회적 경쟁력 제고는커녕 진정한 자아로서 ‘나다움’과 더욱 거리를 두게 한다.  

    

패션이 지위의 상징이었던 시대는 19세기를 기점으로 종말을 고하고 이후 여성 해방의 코드로 전이된 데 이어 20세기에는 사회적 반항의 코드로 젊음의 욕망을 불러일으켰고, 21세기가 열리면서 과하지 않은 자연스러움, 차별이 아닌 구별되는 개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질 리포베츠키가 주장한 현대 패션의 본질로서 개인주의가 과시에서 성숙으로 전환돼 흥미진진한 스펙터클의 중심에 있는 시점이 21세기 일듯하다. 

         

패션의 매력적인 경박함에 부화뇌동하며 살아오면서 자연스러움이 각광받는 21세기 현재 나 역시 비호감 외모를 더는 부정하지 않게 됐다. 여전히 외모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않아 후천적 학습효과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각진 턱을 더는 감추지 않는 것은 물론 외모 콤플렉스를 아무렇지 않게 언급할 수 있는 여유를 부린다. 단점을 객관화하는 여유는 자기 표출 수단으로서 패션의 활용 범위를 넓힐 수 있게 하고 결국 상대에게 편하게 다가가는 ‘정상적’ 관계를 형성하는 전환점이 됐다.   

 

        

차별 철퇴는 디자이너들에게 창의의 원천이다. 디자이너들은 남녀차별 인종차별 외모차별, 못난 인간의 사회적 인식을 창조적으로 이탈함으로써 패션을 의미있는 모더니즘으로 탈바꿈했다.


못난 인간의 단점 공존

       

‘느낌의 진화’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느낌과 감정을 시작점에 두고 인간 진화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작은 키에 당당한 자신에게 친구가 내린 진단명인 ‘스톡홀름 증후군’을 재치 있게 언급했다. “내 동료는 나의 태도가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Stockholm Syndrome)이라고 했다. 단점의 인질이 되자 그런 단점과 친해졌다는 것이다” 가볍게 던진 말이지만 단점이 범죄가 아닌 이상, 단점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지배를 받는 피지배자가 되기보다 단점과 친해지기는 단점을 극복하는 가장 현명한 해결책일 수 있다.   


짧은 쇼트커트, 남성복 탐닉은 패션의 경박성에 충실한 내가 최근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 선택한 현재의 방식이다. 단점의 인질이든 단점의 극복이든, 패션의 경박한 유행에 적절하게 편승하면서 단점과 공존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단점은 제아무리 무의식으로 밀어내려 해도 뇌에 각인된 기억만으로 사람을 움츠러들게 한다. 그러나 단점을 부정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게 되면 단점에 갇힌 자아를 밖으로 끌어낼 수 있다. 패션의 영역은 자신의 외양을 분석하게 하고 이 과정에서 단점을 더는 부정할 수 없는 지점에 서게 한다. 이렇게 마주하게 된 단점과의 조우는 조급한 몰개성에서 여유로운 개성으로 패션 열망의 색을 뒤바꾼다.  

    

‘패션의 제국’ 질 리포베츠키는 ‘삶을 위한 패션’에서 새로운 자아 이미지의 생성과 치유를 하게하는 심리적 측면으로 패션의 역할을 접근했다.      


“옷을 새로 바꿔 입는 것은 개인 취향만이 아니라 “새로운 너를 창조하라”는 욕망에 의해 점점 더 지배를 받는다. … “정신을 다시 가다듬자” 패션이 지령에 따르는 균일적인 현상이 되지 않으면서 그것은 이전보다 더 자주 심리적 현상이 되고 있으며 패션제품의 구매는 사회적이고 미적인 고려에 의해서만 지배되지 않고 정신치료적인 현상이 됐다”   

    

패션을 매개체로 한 단점의 역전은 더 기막힌 반전을 안긴다. 돋보이고 싶은 태생적 욕망은 불안을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패션은 그러한 불안마저 적당한 긴장감이 있는 유희로 뒤바꾼다. 패션에 관한 집착과 애착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이전이라면 휴지통으로 직행했을 법한 불만 가득한 삐딱한 표정이 그대로 담긴 사진이 애착 일 순위 목록을 차지하고 있다. 어느 때부터인가 활짝 웃고 있는 나답지 않은 어색한 표정보다 삐딱해서 익숙하고 나다운 표정이 연민에서 애정으로 바뀌었다.       


“단점이나 콤플렉스가 있어?” 뜬금 맞은 질문에 선배가 “단점? 콤플렉스? 있었던 거 같긴 한 데”라며 이런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를 어이없어했다. “그래서 네 콤플렉스는 뭔데? 아직도 그걸 끌어안고 살아”라며 역공을 가했다. 

     

단점과 친해지기는 정상으로서 사회적 자아를 구축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에 불과할 뿐 진정한 자아의 불안 해소는 기대할 수 없다. 사회적 자아와 진정한 자아의 건강한 조우는 단점을 의식하지 않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단점을 의식하고 의식적으로 친해지기를 시도함으로써 수치심을 감추려는 스톡홀름 증후군을 껴안고 사는 것이 현재의 나다. 단점이 친근해지다 결국 어느 순간 의식되지 않는 지점에 들어설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내일을 위해 오늘을 돌아본다. 



사진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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