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언어로서 패션은 과거에는 계급사회를 유지하는 사회적 행위였지만, 1900년대에 진입한 이후 자아 정체성을 유지하거나 재구축하는 개인 행위가 됐다. 현대사회에서 남녀유별의 역사가 성 규범 파괴로 대체되면서 개인은 패션을 통해 사회질서 재편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사회학자 다이애너 크레인(Diana Crane)은 그의 저서 ‘패션의 문화와 사회사(FASHION and ITS SOCIAL AGENDAS)’에서 “컬렉션에서 성별의 경계를 허무는 정도는 현대에서만 볼 수 있을 정도로 극단적이다. 여성 패션에 나타난 양성성은 젊은 세대가 ‘무성(無性, genderless)’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암시라고 주장되어왔다”라며 현대사회 패션의 ‘무성성’을 언급했다.
지난 22일 포털사이트 연예계 실검(실시간 검색어)을 장악한 엄정화, 23일 방영된 JTBC 수목드라마 ‘런 온’ 임시완, 두 사람은 ‘호피무늬’, 일명 레오파드 패턴으로 21세기 패션의 절대 키워드가 된 ‘무성성’을 재현했다. 엄정화가 신곡 ‘호피무늬’ 뮤직비디오에서 입은 지극히 선정적인 여성적 코드인 보디슈트는 힘과 권력의 상징인 레오파드 패턴으로 인해 전형적인 여성적 뉘앙스를 비켜갔다. 임시완은 가는 상체 골격을 상상케 하는 하늘거리는 소재와 레오파드 패턴이 조합된 셔츠로, 게이룩 코드를 취했다.
패션의 무성성은 기존 사회질서를 뒤흔든다는 점에서 청년세대에게는 짜릿한 자극을 주지만 기성세대에게는 막연한 불안감을 품게 한다. 무성성은 여성을 피해자로 규정하는 성적 억압과 강인함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 남성 이미지 재구성에 기여하고 있다.
노골적 섹슈얼리티는 성적 대상으로 여성의 성 역할 고정화라는 측면에서 남녀평등을 역설하는 이들의 비난을 받아왔지만, 최근에는 성 주도권으로 반전해 여성 권력 상징이라는 지위를 확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노출과 선정적인 춤을 절정으로 치닫게 하는 디바의 무대의상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여전히 위협으로 인식된다.
엄정화는 지난 22일 발표한 신곡 ‘호피무늬’ 뮤직비디오에서 곡명 그대로 호피무늬, 레오파드 패턴의 보디슈트를 입은 노골적 성적 코드로 섹시 디바의 위용을 보여줬다. 엄정화의 파트너로 뮤직비디오에 등장한 화사는 엄정화의 카멜 브라운과는 다른 차가운 블루 바탕의 레오파드 패턴 보디슈트로 같은 듯 다른 색의 섹슈얼리티를 연출했다.
레오파드 패턴은 섹슈얼리티의 성적 억압의 주체와 객체에 관한 끊임없는 논쟁을 일으킨다. 엄정화의 보디슈트는 하이컷과 전신 두 디자인으로 노출이거나 아니거나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 타인의 관음증적 시선을 끌어낸다. 의례적인 디바의 성 상품화로 결론 내리기에는 힘과 권력을 연상하게 하는 레오파드 패턴이 마돈나의 ‘콘 브라’ 이래 섹시 디바들이 무대에서 주장해온 성 주도권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수면으로 끌어올린다.
레오파드 패턴의 여성 의상이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코드로 인식되는 이유는 ‘Fierce : The History of Leopard Print’ 저자 조 웰던(Jo Weldon)의 언급에서 명확해진다. 그는 “레오파드는 원주민인 일부 문화에서 가부장적 힘의 상징”이라며 ‘야만인(남성)’이라는 키워드와 연결했다.
1990년 월드투어콘서트 ‘Blond Ambition’에서 콘 브라와 코르셋이 연결된 장 폴 고티에 뷔스티에를 입고 등장한 마돈나는 콘 브라를 입은 남성 무용수들을 대동해 보수적 성 체제를 무너뜨리는 시각언어로서 패션의 위력을 보여준 바 있다.
억압의 상징인 코르셋과 저돌적인 반기로서 원추 형태의 콘 브라의 조합은 의상 자체만으로 충격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마돈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파격적인 자위 퍼포먼스마저도 시선 밖으로 밀어내는 잘 단련된 근육질 몸매로 무성성의 정점을 찍었다.
엄정화 역시 섹슈얼리티를 앞세우고 있지만, 망사 스타킹과 하이컷 레오파드 보디슈트, 목부터 발끝까지 연결된 레오파드 전신 보디슈트로 남성의 권력을 위축하게 하는 위력을 발산한다. 또한 25일 방영된 ‘2020 SBS 가요대전 in DAEGU’에서 다이애너 크레인이 동성애 코드로 독자들의 불편한 심경을 불러일으킨다고 언급한 두 명의 여자 모델이 등장하는 패션 사진과 비슷하게 받아들여질 만한 상황을 화사와 함께 연출하기도 한다.
다이애너 크레인은 1990년대 포스트 모더니스트로 분류되는 패션 디자이너들이 여성성을 표현한 방식에 관해 설명하면서 “디자이너 가운데 일부는 섹슈얼리티의 표출을 여성의 힘과 통제력의 한 형태로 해석하는 듯하다”라며 섹슈얼리티를 남성 권력의 희생물로 보지 않는다는 변화된 관점을 언급했다.
이는 마돈나 콘 브라처럼 ‘호피무늬’에서 엄정화의 레오파드 패턴 보디슈트를 어빙 고프먼이 성적 대상으로서 여성 이미지로 정의한 ‘종속적 의례화’로 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임시완은 ‘런 온’에서 레오파드 패턴 셔츠로 성 규범을 깨는 섹슈얼리티 이슈를 다시 한 번 각인했다. 런 온은 페미니즘 이슈를 재미있게 녹여낸 맛깔스러운 대사가 화제로, 육상계 간판스타 기선겸 역을 맡은 임시완은 후배 선수 김우식 역을 맡은 이정하와 일상에서 동성애를 연상케 하는 대사를 농담으로 무심하게 주고받는다.
이정하는 레오파드 패턴 셔츠, 체인과 스터드 장식의 블랙 스키니 팬츠를 입은 임시완을 보고 “인물이 너무 훤해서 여잔 줄 알았네”라며 웃고 임시완은 “남자예요”라며 공손하게 맞받아친다. “저 때문에 그러시잖아요”라며 팀 내 폭행 사건을 공론화를 말리려는 이정하에게 임시완은 “그럼, 사람들이 진짜 우리 오해하겠네”라며 동성애 연상 대사를 이어간다.
조 웰던은 지난 2019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진행된 2019 AW 남성복 컬렉션에서 "대중은 캣워크의 프린트(레오파드)를 보고 즉시 슈퍼히어로와 락앤롤에 대해 생각하겠지만, 저는 팝 스타들과 글래머 로커들이 몇 십 년 전 성 경계선을 흐리게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성 고정관념을 타파하려는 욕구가 남성들에게 나타났다고 생각한다"라며 다수 디자이너들의 선택을 받은 레오파드가 함의한 ‘무성성’의 메시지를 언급했다.
레오파드 패턴은 남성과 여성을 상하 성 권력 위계로 경계 짓는 틀에서 벗어나 남녀 모두를 권력화된 성에서 해방한다.
[* 본 글은 외부(미디어 리퍼블릭)에 기고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