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디자이너의 성 추문, 미투(MeToo) 고발과 함께 마약 남용 의혹까지 불거져 전 세계 패션계가 들썩이고 있다. 2020년의 끝을 이틀 앞둔 12월 30일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의 성 추문 사건이 SNS에서 일파만파 확산한 가운데 ‘마약 중독자’라는 고발까지 나와 충격을 안겼다.
대만계 미국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은 ‘T by ALEXANDER WANG’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구축했을 정도로 ‘웨어러블(wearable)’에 충실한 간결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2007년 SS 시즌 데뷔 무대를 가진 왕은 당시까지 패션가를 지배하던 전위적 디자인에 식상한 패션 피플들의 마음을 간결함으로 움직이며 섹시함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그에 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간결한 섹시함의 미학이라는 평이 있는 반면 미니멀리즘이라기에는 디자인으로 평가할 만한 요소가 부족하다는 평이 공존한다. 그의 발렌시아가(BALENCIAGA) 이력은 왕에 대한 패션계의 반응을 대변한다. 왕의 간결한 섹시미는 2012년에서 15년까지 3년으로 마감됐지만, 2015년 10월 그의 자리를 대신한 이후 지금까지 발렌시아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뎀나 바잘리아는 왕과 상반된 디자인을 쏟아내며 런웨이를 또다시 전위적 실험 시도의 장으로 뒤바꿨다.
이처럼 의도했든 아니든 이력 하나하나가 패션계의 전환점과 연결돼온 왕의 성 추문 사건은 마약 남용 의혹을 동반하고 있다는데 더 큰 충격을 안겼다. 패션계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진입한 이후 기존 사회 규범을 깨는 파격으로 예술계와 거리 좁히기를 시도하고 이를 통해 대중에게 선망의 시선을 받아왔다. 그러나 패션 흐름을 주도하는 일부 층에서 이뤄지는 파격은 때로 파괴를 동반하기도 했다.
다수의 해외 매체는 모델 오웬 무니(Owen Mooney), 흑인 여성 래퍼 아젤리아 뱅크스(Azealia Banks) 등 왕의 성추행 사실을 알린 ‘미투’ 폭로 증언을 보도했다. 오웬 무늬는 2017년 미국 뉴욕 클럽에서 왕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백했으며, 아젤리아 뱅크스는 2019년 트렌스젠더 남성의 성추행 시도를 했다면서 2015년부터 세 사건이 더 있음을 알렸다. 이뿐 아니라 최근에는 왕이 약물을 먹인 후 성추행을 시도했다는 고발이 이어지고 있으며, ‘마약 중독자’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이에 성 추문이 일파만파 확산하자 왕은 1일 영국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과 인터뷰에서 무고를 주장했다. 그는 “지난 며칠 근거 없는 허위 의혹을 받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증거도 없고,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비공개 혹은 익명의 명예 훼손 자료들을 게시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소셜 미디어 계정에 의해 잘못된 방식으로 증폭되고 있다”라며 “나에 관한 거짓말들이 진실처럼 비치는 데 정말 화가 났다. 나는 설명된 잔인한 행동에 가담한 적이 없으며, 주장된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이러한 주장을 제기하고 온라인에 악의적으로 퍼트린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패션계 마약 추문이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천재 디자이너로 불리며 매 시즌 실험적인 전위적 컬렉션으로 극찬을 받았던 알렉산더 맥퀸은 어머니 장례식 하루 전날,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힌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41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공식적으로는 어머니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 우울증이 원인이었지만 마약 남용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알렉산더 맥퀸은 1998년, 2007년 전 세계적 금융위기로 럭셔리 패션계가 몇 차례 위기를 겪은 시기 활동한 디자이너다. 그가 스튜디오를 오픈한 1992년은 1998년 경제 위기 직전 럭셔리 패션계의 성장이 극에 달한 시기로, 그의 기존 틀을 깨는 실험정신이 강한 전위적 디자인은 ‘꼼 데 가르송(COMME des GARÇONS)’ 레이 카와쿠보(Rei Kawakubo) 등에 의해 전성기를 맞은 포스트모더니즘이 패션가를 장악했던 시기와 맞물려 열풍을 일으켰다.
이처럼 세기말을 앞둔 1990년대인 10여 년, 패션계를 지배한 파격은 단지 디자인에만 영향력이 한정되지 않았다.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인 패션계의 오픈마인드(open mindedness)는 새로운 실험적 시도뿐 아니라 마약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듯하다. 이는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자 앤드루 윌슨이 기록한 ‘알렉산더 맥퀸, 광기와 매혹’에 그대로 기술돼있다.
이 책에 따르면 알렉산더 맥퀸의 동성 연인 글렌 앤드로 티우는 “그는 패션계에서 코카인을 배웠다며 패션계를 증오했어요”라고 말해 당시 패션계에 만연한 마약 남용과 맥퀸의 중독 정도를 짐작게 했다. 이뿐 아니라 맥퀸은 자신을 톱스타 위치에 올렸지만 마약 중독인 자신을 방치한 패션계를 증오했음을 알 수 있는 발언을 공식 석상에서 하기도 했다. 맥퀸은 2005년 10월 컬렉션을 마친 후 “그녀는 패션계에서 처음으로 코카인을 한 사람이 아니에요. 마지막도 아닐 거고요”라며 당시 마약 스캔들로 위기에 몰린 케이트 모스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맥퀸의 주변인들은 그의 마약 집착을 우려했지만 말리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책의 기록은 당시 패션계가 맥퀸의 마약 중독 증세와 컬렉션의 혁신을 정비례 관계쯤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짐작게 한다. 맥퀸은 자신을 향해 “집착이 널 파괴할 거야”라며 자조 섞인 말을 내뱉기도 했다고 한다.
마약 관련 사건을 많이 다뤄 온 박진실 변호사는 “각성 효과가 있는 마약의 경우 한 가지 행동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성향에 있다”면서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일만 하는 마약 남용자의 경우, 본인은 집중이 잘 된다고 하지만 실제 결과물은 좋을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
기자들에 의해 작성된 마약 관련 서적 ‘중독 인생’에서 전 강남 을지병원 원장(현 치료감호소 소장) 조성남은 “마약류는 도파민 분비와 관련이 있다. 마약류는 뇌의 보상회로 측면에서 도파민 분비를 촉진한다. 도파민이 많이 분비될수록(도파민 농도가 올라갈수록) 기분이 좋아진다”라며 중독과정을 언급한 후 “마약류는 도파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파괴한다. 도파민이 과다 분비되도록 할 뿐 아니라 도파민이 생성되는 체계를 무너뜨린다”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마약이 그럴듯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해도 일회성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소위 아티스트라고 불리거나 불리기를 원하는 이들의 마약 남용 의혹들을 일부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치부하기에는 책임 전가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떨치기 어렵다. 특히 맥퀸이 활동하던 1990년대 패션계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에 일부 디자이너와 모델들의 일탈을 조장하고 방관했다는 주장을 피할 수 없을 듯하다.
다이애너 크레인(Diana Crane)은 그의 저서 ‘패션의 문화와 사회사(Fashion and ITS SOCIAL AGENDAS)에서 “패션디자인의 한 요소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작품들이 모호함과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에 뭐라 특징짓기 어렵다. 전위 예술가는 저항의 태도를 취함으로써 미적 관례를 뒤엎으려고 시도하지만, 포스트 모더니스트는 모호한 결과를 만들어 내거나 패러디에 열중하면서 인습적인 규범과 비인습적 규범 사이를 오간다”라고 예술가로서 디자이너의 작업 방식에 관해 언급했다.
이어 “작품은 확고한 의미가 전혀 없거나 다의적이다. 믿을 만한 해석은 예상할 수도, 가능하지도 않다”라고 말해 포스트 모더니스트 디자이너가 만들어낸 파격에서 위태로운 파괴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추정을 하게 했다.
맥퀸의 사례에서 짐작되는 패션계의 마약 추문을 왕의 성 추문으로 연결할 수 없다. 마약, 성 추문 등 범죄적 행위에 대한 패션의 은밀한 관용은 현재가 아닌 과거다. 이는 유행의 시간성으로서 패션의 속성과 인간 윤리를 중시하는 최근 패션의 조류, 두 가지 관점에 근거한다. 패션은 이미 마약의 환시 효과에 더는 매혹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연 중시와 함께 윤리적 패션이 화두로 부각되면서 파격에는 열광하되 파괴를 거부하는 흐름에 공감하고 있다.
이는 최근 불거진 왕의 성추문 사건에 관한 모델 단체들의 반응에서도 알 수 있다. 30일 왕의 성추문 사건이 불거진 후 뉴욕 기반 모델 권리 변호 단체 모델 얼라이언스(Model Alliance)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우리 모델 연합은 알렉산더 왕에 의한 성적 학대에 관한 고발을 공유한 사람들과 연대하고 있다”라며 “패션 산업은 투명성과 책임감이 부족해 성별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모델이 학대에 취약하다”라고 패션계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어 “그렇기 때문에 모델들이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행동, 전문적인 조사, 실질적인 결과를 안전하게 보고할 수 있는 적절한 불만 메커니즘을 제공하는 ‘RESPECT 프로그램’을 위해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라며 왕의 미투 고발에 관한 적극적인 대응을 선포했다.
시트 모델 매니지먼트(shit model management) 역시 비슷한 시기 인스타그램에 “알렉산더 왕은 몇 년 전부터 성폭행 혐의로 기소돼왔다. 이런 사건들에 덮어두는 대신 이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할 때이다”라며 “이제는 패션 업계의 학대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때이다. 남성 모델과 트랜스 모델은 모델 업게 성폭행 대화에서 종종 간과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유명인들이 존경을 받는다고 해서 성폭행죄를 모면하게 할 수는 없다. 그들은 다른 학대자들처럼 책임져야 한다”라며 성폭행 의혹을 부인하는 왕이 가해자로 처벌받아야 함을 주장했다.
마약이 아니라도 술이든 담배든 중독성 매개체는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파괴한다. 물론 술처럼 마약도 종류와 사용법에 따라 윤리적 판단 기준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그런데도 중독의 심각성을 간과할 수 없다. 패션이 마약을 유행으로 받아들여 늘 그렇듯 오래 애정을 쏟지 않고 폐기처분을 했지만, 패션계가 열광하는 ‘파격’은 늘 ‘위태로운 파괴성’을 내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 본 글은 외부(미디어 리퍼블릭)에 기고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