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컬러 백신’, 폭주하는 팬데믹 제동

by 인이상
사진1.jpg 이자벨 마랑 2021 SS, 발망 2021 크루즈 컬렉션

“내게도 색깔이 있는 이름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수도 없이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랬더라면 완벽했을 텐데, 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색채 없는 삶으로 우울감에 시달리던 쓰쿠루가 늘 죽음을 생각한 채 죽음도 삶도 아닌 사자(死者)로 지낸 시간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지난 2020년 2월 24일 국내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후 채 같은 해 3월 11일(현지 시각) 세계보건기구에 의해 팬데믹이 선포돼 위협적인 바이러스의 출현은 부정할 수 없는 생생한 현실이 됐다.


코로나19 팬데믹이 1년을 넘긴 지금까지도 여전히 연일 수백, 수천, 수만 명의 감염자가 쏟아져 나와 일시적 현상이라 기대했던 대중의 기대는 무참히 무너졌다. 백신 접종으로 집단면역 가능성은 커졌지만, 백신을 맞은 이들 가운데 감염자가 발생하는 등 백신의 안전성에 대한 회의적인 보도가 이어져 불안은 해소될 여지를 보이지 않는다.


신이 내린 형벌처럼 2020년은 코로나19로 시작해 여름 폭우와 긴 장마, 전례 없는 겨울 폭설과 한파까지 혹독한 해로 기록됐다. 암흑과 같은 시간은 2021년으로 이어져 5월인 지금까지 잦은 비와 큰 일교차가 계속되는 이상기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코로나19는 과거 흑사병처럼 사망률이 높지 않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암흑기는 지구를 정신병원 폐쇄 병동으로 뒤바꾼 듯하다. 이로 인해 전 세계인 모두 깊은 우울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사망률보다 전염률이 높은 코로나19는 죽음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인간 정신에 더 치명적임을 입증했다. 이처럼 전염병은 현대과학을 무력화했지만, 인간은 죽음의 신에게 반기를 들 듯 화사한 컬러로 자기 성찰과 자가 치유에 나섰다.


인간이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자각게 하는데 색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색채 전문가 장 가브리엘 코스는 그의 저서 ‘색의 놀라운 힘’에서 “엷고 밝고 연한 색이 인지력이나 운동 능력을 섬세하고 원활하게 해 긴장을 풀어준다”라고 서술했다. 또 “핑크처럼 따듯한 색도 긴장을 풀어준다”라며 1979년 시도된 ‘베이커 밀러 핑크(Baker-Miller pink)’ 감옥 사례를 들었다.


베이커 밀러 핑크는 색이 신체와 정서에 미치는 유의미한 관계성을 입증해 이후에도 색과 폭력성에 관한 연구가 이어졌다.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는 그의 저서 ‘컬러의 말’에서 베이커 밀러 핑크에 관한 연구 사례를 소개했다. 1991년 연구는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은 참가자의 수축 및 이완 혈압이 핑크색으로 칠한 방에서 내려간다고 밝혔다. 재소자와 재소자 흉내를 하는 남자 대학생을 대상으로 벌인 연구에 의하면 베이커 밀러 핑크로 칠한 방과 핑크 필터를 거친 조명 아래 노출되면 진정하는데 시간이 덜 걸렸다.


사진2.jpg 베르사제 진 쿠튀르 2021 SS, 베르사체 2021 리조트 컬렉션


베이커 밀러 핑크는 팬톤의 2021년 올해의 컬러인 일루미네이팅(Illuminating) 옐로, 얼티밋 그레이(Ultimate Grey)와 함께 제시된 2021년 트렌드 컬러인 소르베 파스텔 계열과 유사하다. 시각적으로 온화함과 싱그러움을 동시에 주는 베이커 밀러 핑크 관련 연구는 인간이 정서적으로 극한의 상황에 처했을 때 파스텔 톤처럼 밝고 화사하면서도 안정된 색감에서 평온과 위안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소르베 파스텔은 시즌 색이라는 점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보이지만 강렬함이 제거된 은은한 색감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효과를 낸다. 실제 올해의 컬러로 제시된 옐로와 그레이는 각각 치유, 중용의 색으로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안위의 메시지를 던진다. 소르베 파스텔 역시 치유 효과 때문인지 런웨이에서 시작된 인기가 리얼웨이까지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 특수로 불리며 패션가에서 유일하게 호황을 이어가는 애슬레저 브랜드들은 다채로운 색감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의 니즈를 정확하게 반영한 컬러 레깅스로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높은 성장률을 기록한 ‘젝시믹스’는 올해 들어 다소 부진하다 3월 실적 상승으로 1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50.4% 성장했다. 이는 특유의 비비드 색감을 비롯해 올해 새롭게 출시한 파스텔의 트래깅스 등 컬러 마케팅이 소비자들의 호응을 끌어낸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파스텔이 인기를 끌면서 파스텔 상의에 가장 잘 어울리는 화이트진이 블루진의 자리를 대체하고 파스텔 톤의 바이올렛, 민트, 핑크 등 컬러진이 부상하고 있다. 이처럼 밝고 화사한 컬러 수요 증가는 의례적인 계절 효과만은 아니다. 단절의 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꽉 막힌 일상의 답답함이 초래하는 반대급부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컬러를 향한 갈망을 키우고 있다.



사진3.jpg 샤넬, 이자벨 마랑, 셀린느, 헤븐 바이 마크 제이콥스 2021 SS 컬렉션(왼쪽부터 시계방향)


한 해외 매체는 런웨이 트렌드 분석 결과를 토대로 올 봄여름은 뉴트럴의 지루함과 네온의 강렬함에서 벗어나 모네의 수채화 같은 파스텔 색조의 컬러 파레트를 선택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파스텔 데님 룩은 럭셔리 디자이너 브랜드들의 런웨이를 통해 주목할 만한 트렌드로 부상했다.


여전히 블랙, 화이트의 기본색이 등장하지만, 파스텔은 단연 압도적이다. 무엇보다 드레스다운에 적용된 소르베 파스텔은 색감 특유의 드레스업 무드로 인해 페미닌도 머스큘린도 아닌 앤드로지너스의 신비감을 발산한다.


샤넬(Chanel)은 ‘샤넬 클래식’으로 꼽히는 트위드 재킷 디자인을 적용한 오버사이즈 핑크 데님 재킷과 같은 컬러의 마이크로미니 스커트, 올해 잇 아이템으로 꼽히는 와이드 팬츠를 적용한 핑크 데님 팬츠 등 중성적 신비감으로 재해석된 소르베 파스텔 룩 트렌드를 이끈다.


베르사체(Versace),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는 각각 베르사체 진 쿠튀르(Versace Jeans Couture), 헤븐 바이 마크 제이콥스(heaven by Marc Jacobs)에서 소르베 파스텔로 전혀 새로운 분위기의 자유분방한 스트리트 룩을 구성했다. 베르사체 진 쿠튀르는 바이올렛 핑크와 그레이가 배색 된 날염 데님 재킷과 팬츠의 세트업으로 세련된 아웃피트를, 헤븐 바이 마크 제이콥스는 느슨한 실루엣의 핑크 팬츠에 히피 감성의 티셔츠 혹은 셔츠를 조합해 할렘 특유의 위트 넘치는 반항기를 연출했다.


올해는 파스텔 조합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런웨이 그대로 리얼웨이에서도 상, 하의에 신발까지 단일 컬러를 사용하되 톤 온 톤으로 미묘한 차이를 두거나 민트에 핑크 혹은 그린을 배합하는 등 블랙이나 화이트를 몸에서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 단, 갑작스러운 변화가 망설여진다면 셀린느(Celine)처럼 바이올렛, 핑크, 옐로 등 미니 백으로 가볍게 소르베 파스텔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다.


파스텔은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 효과를 낸다. 이런 이유로 파스텔 가전이 백색 가전을 대체하고 가구 역시 강렬하지 않은 밝고 화사한 색감이 인기를 끄는 등 인테리어에서도 파스텔이 대세다.


인재(人災)인 경쟁에 목숨 걸며 질주하던 현대인들은 무채색 속에 살아왔다. 그러나 천재(天災)인 전염병에 맞닥뜨린 인간들은 이제야 쓰쿠루처럼 색 없는 일상의 무료함과 무기력함을 자각하는 듯하다.


* 타이틀 사진=발망 2021 크루즈 컬렉션

[* 본 글은 외부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코로나 블루, 우울한 청춘의 ‘재미 이탈’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