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시간대 주말 드라마는 보수적 가족주의의 틀을 고수한다. 유교주의 전통에 근거한 보수성은 여자 주인공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모성의 틀에 가둔다. ‘오케이 광자매’는 모성의 정형에서 탈피한 대신 결혼으로 팔자 고치려는 자매의 기형적 욕구를 가족애로 정당화한다.
KBS2 주말 드라마 ‘오케이 광자매’는 몰락한 양반 가문 세 자매의 결혼 분투기다. 맏이 이광남(홍은희)은 이혼 후 부자 남자에게 자신을 의탁하려다 실패하고 다시 변호사 전남편과 재결합한다. 막내 광태(고원희)는 자신과 같은 흙수저라는 이유로 절연했던 허기진(설정환)의 재력을 알고 난 후 욕망을 감추지 않고 결혼을 밀어붙인다.
‘오케이 광자매’의 광남과 광태는 1847, 48년 출간된 영국 작가 윌리엄 새커리의 소설 ‘허영의 시장’의 아멜리아 세들리와 레베카 샤프를 떠올리게 한다.
주식 중개인의 딸로 유복한 생활을 했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에 이어 남편까지 전사하자 남편 친구에게 의탁해 살아가는 아멜리아, 무시 받는 계급인 화가의 딸에서 고아로 끝없는 추락을 반복하는 인생을 반전하기 위해 남자를 통한 신분상승을 꿈꾸는 레베카. 174년이라는 시차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이들은 닮았다.
소설 속 레베카는 인생 반전을 위해서는 울분과 욕망을 독하게 제어할 줄도, 악랄하게 터뜨릴 줄도 안다. 그는 학교를 떠나면서 자신을 무시한 이들을 향해 보란 듯 기념품 사전을 내던진다. 이를 보고 놀라는 아멜리아에게 “앙심은 사악한 건진 몰라도 자연스러운 거야”라며 앞으로 펼쳐낼 욕망을 예고한다.
수동적으로 누군가에 의지해 살아야만 하는 아멜리아, 능동적인 듯 보이지만 결국 자신이 아닌 타인의 능력에 편승하려는 레베카는 광남과 광태의 모습이다.
광태는 레베카의 재현인 듯 상대의 기대에 따라 행동하면서 남자의 욕망을 충족해준다. 수치심도 없이 자신을 내던지다 더는 이 전술이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된 순간 이내 돌변한다.
기진이 소개해준 남자가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만 보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렇게 하도록 방치한다. 한 술 더 떠 자신의 성적 매력을 과장해 남자를 통한 성공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밀어붙인다. 그러나 자신이 헛된 노력을 하고 있음을 감지한 순간 피해자인 듯, 정의로운 자인 듯 격분하며 돌아선다.
광태의 주장은 단순무식이라고 할 정도로 명확하다. 능력 없는 여자는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야 한다. 가진 거 없는 여자는 잘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느니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 단번에 인생 역전해야 한다. 이 같은 확신에 찬 신념은 마치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여자들은 미련한 비관주의자인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그는 한 술 더 떠 자신의 외모 조건이면 충분히 자격이 된다고 주장한다. ‘남자 편승론’을 여자의 당연한 권리인 듯 여기는 그는 광남에게도 외모밖에 내세울 것도 없는데 더 늙기 전에 결혼해야 한다며 아직 충분히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가 부자라는 이유로 결혼을 독촉한다. 광남의 결혼이 사기임이 밝혀지자 변호사 남자 만나기 어렵다며 또다시 전형부인 배변호(최대철)와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인다.
광태의 논리는 단순하다. 볼 거 없는 집안에 잘나가는 형부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광태는 남들보다 뛰어난 외모를 상품으로 내세워 돈 많은 남자를 만나기 위해 분투한다. 광태는 집안을 일으킨다며 자신만 믿으라고 아빠 이철수(윤주상)에게 용맹한 투사처럼 말한다.
결혼에 인생을 건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채를 써온 자신을 믿지 못하는 예비 시형 허풍진(주석태)에게 거짓 임신 선언을 한다.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행동이 고작 거짓말이다.
광태의 확고한 신념은 어이없다 못해 순진무구하다는 인상마저 준다. 그는 첫 결혼이 트라우마가 된 둘째 광식(전혜빈)이 공무원을 그만두고 식당을 하는 것을 답답해하는 것도 모자라 잘난 외모, 좋은 학벌에 왜 그러고 사냐며 한심해한다. 막상 광식에게 돈을 받아쓰면서도 남자로 인해 반전될 인생이 허상이 아닌 이미 정해진 현실인 양 늘 당당하다.
광남은 응석받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 특유의 무기력과 무능으로 주변 사람 모두를 가해자로 만든다. 발레리나 만들려는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한 결혼 전 무리한 다이어트 때문에, 변호사라는 허울만 있을 뿐 가진 거 없는 남편 때문에 임신할 수 없었다며 자신을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을 원인 제공자로 몰아붙인다. 아들이 불임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분노한 시어머니 이풍년(이상숙)에게는 돈 없는 변호사와 결혼한 고충을 들먹이며 무례한 행동을 정당화한다.
반면 신마리아(하재숙)는 의존하지 않는 독립된 삶을 살았지만, 끝내 ‘외모 때문에 결국’이라는 뉘앙스로 생의 종지부를 찍고 화면 밖으로 밀려난다. 드라마는 외모가 모든 불행과 불운의 원인인 듯 몰아간다. 그는 못난 외모의 자신을 선택해준 배변호(최대철)의 자비에 감사해하며 떠난 신혼여행지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그의 죽음은 외모만 믿고 자신의 무능을 자랑삼아 살아온 광남에게 반전의 기회가 된다.
받기만 한 결혼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광남이 한 선택은 또 다른 결혼이다. 잘 알아보지도 않고 재혼을 선택해 사기당하고도 또다시 결혼을 선택한다. 전남편의 불륜에 대한 분노가 채 가시지 않고, 재혼의 뼈저린 상처가 아직 선명히 남아있지만, 결혼 외의 선택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신마리아 소유의 아파트에 넓은 도량을 가진 듯 입성한다.
광태와 광남에게 결혼은 인생 반전을 위해서는 몇 번이라도 치러야 할 필생의 과업이다. 애정이니 신뢰니 하는 말은 사치일 뿐 능력이 결혼의 필요충분조건이라는 신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수치심 없이 당당하게 밀어붙이는 성취로서 결혼에 대한 그들의 신념은 이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되레 피해망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다.
무엇보다 이들은 남자 편승론의 빗나간 결혼관을 가족애로 정당화한다. 무능한 자신들의 남자 의존증을 가족을 위한 용기 있는 희생인 듯 여긴다.
둘째 광식은 겉으로는 세 자매 중 유일하게 독립적 사고를 하는 바른 이미지로 보이지만, 모성 결핍에 대한 보상인 듯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보호자처럼 행동한다. 이뿐 아니라 동생 광태의 백수 친구 나편승(손우현)으로 인해 결혼을 올리지 않고도 이혼녀가 됐는데도 비슷한 조건의 가수 지망생 한예슬(김경남)을 선택한다.
광남은 결혼 전에는 자기중심적인 연극성 성향을 보이지만, 이혼으로 모든 것을 다해준 남편이 떠난 후 의탁할 대상을 찾는 의존성 성향을 드러낸다. 광식은 어린 시절 부모의 관심을 충분히 받지 못한 애정 결핍을 보상하기 위해 동반자보다는 보호자 역할을 충족해줄 수 있는 피보호자만을 결혼 상대로 선별하는 듯 보인다. 광태는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정당화하고 자신은 물론 주변 인물까지 자신의 욕망 안으로 끌어들인다.
광태와 광남의 인생 역전 결혼 분투기를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극 중 캐릭터쯤으로 치부하기에는 현재성을 띠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허영의 시장’은 제목과 ‘영웅 없는 소설’의 부제까지 문제적 화두를 제목에 명시했을 뿐 아니라 100년을 훌쩍 넘는 시대 차로 인해 주인공들과 정서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반면 2021년 현재를 담아낸 풍속극인 ‘오케이 광자매’는 세 자매와 이들이 거울이 돼 드러난 일부 젊은 층의 비틀어진 가치관이 생생하게 다가와 가슴이 아리다.
* 타이틀 사진=KBS2 ‘오케이 광자매’ 고원희, 전혜빈, 홍은희
[* 본 글은 외부에 기고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