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다감하고 이성적 매력이 넘치는 누군가 있다면 당신은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112에 신고해야 할지 모른다. ‘보이스’는 내 주변에 가장 믿을 만하고 믿고 싶은 인물이 사이코패스일 수 있다는 ‘악의 평범성’으로 서두를 연다.
사람들은 악을 선과 구분 짓고 공존 불가능한 격리된 존재로 여긴다. 선과 분리된 악은 일상성을 벗어난 존재로 인지돼 공포의 대상으로서 무게가 박탈된다. 범인(凡人)들의 이런 계산법은 편향적이다. 극히 일부를 제외한 범인(犯人)들의 대부분은 내 이웃, 내 형제, 내 연인이다.
뇌 과학자 나카노 노부코는 그의 저서 ‘사이코패스 : 정상의 가면을 쓴 사람들’에서 “살인귀와 훈남 사이를 태연히 오갈 수 있는 냉철함이 바로 사이코패스의 특징이다”라며 사이코패스가 일반인과 구별되는 극단적 이중성을 설명했다.
그가 기술한 사이코패스의 특징은 범죄적 요소를 포함하지만, 교만, 거짓 등 몇몇은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내 주변 인물 혹은 나에게도 있는 모습이어서 섬뜩하다. 이 중 겉모습이나 말솜씨가 지나치게 매력적이고 강한 자기애, 사람을 대하는 좋은 태도와 달리 낮은 개인적인 공감 능력은 허구로 위안 삼았던 ‘보이스’의 악역과 정학하게 일치한다.
OCN, tvN ‘보이스’ 악역은 4차례 시즌 모두 이 같은 사이코패스 전형을 갖추되 인물마다 개성을 더해 소리 추적 스릴러의 긴장감을 살렸다.
시즌1의 성공적 포문을 연 재벌 후계자 모태구는 세상 가장 섹시한 사이코패스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간 등장한 연쇄살인범들과 달리 모델 출신 김재욱의 비주얼로 시각적 매력이 극대화됐다. 매력적인 악역으로 화제가 된 ‘보이스’는 시즌 2에서 완벽주의 살인마 방제수를 배치해 획일적이지 않은 악마의 다면성을 보여주며 성공 신화를 이어갔다. 방제수 역할을 맡은 권율은 햇빛을 한 번도 보지 않았을 듯한 냉기 어린 하얀 피부로 인해 방제수의 깊은 어둠의 사실성을 더했다.
‘보이스’의 악역 퍼레이드는 이제 더 뭐가 있을까 하는 우려를 깨고 새로운 이미지의 매력적인 사이코패스 캐릭터를 시청자 앞에 세웠다. 시즌 3 재일교포 교수 카네키 마사유키는 상대에게 신뢰를 주는 반듯한 외모의 지적인 살인마로, 시즌 4 분장사 동방민은 시작부터 다정한 모습과 의뭉스러운 면을 동시에 보여줘 익숙한 듯 새로운 서늘한 분위기로 시선을 끌었다. 부드러운 듯 날카로운 이중적 느낌의 박병은, 선한 얼굴 이면에 악의적 장난기를 품고 있을 듯한 이규형은 앞서 두 시즌의 연이은 성공 부담을 딛고 각각 시즌 3, 4에서 개성 있는 악역으로 몰입도를 높였다.
모태구의 남다른 귀족적 풍모, 카네키 마사유키의 지적인 아우라, 동방민의 박애주의적 면모는 슈트 차림과 어우러져 평범함과 비범함을 오가는 매력적인 악의 일상성을 완성했다.
모태구는 몸 선을 살린 실루엣과 베스트에 행커치프까지 격식을 갖춘 영국식 잰틀맨 룩, 카네키 마사유키는 가벼운 색감, 몸에 꼭 맞는 실루엣 등 일본식 젠틀맨 룩, 동방민은 노타이의 세련되면서 편안한 비즈니스캐주얼로 각자의 정체성과 호감도 높은 이미지를 연출했다.
범죄 심리학자, 프로파일러들이 악의 평범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는 연쇄살인범 강호순 역시 수려한 외모로 검거 당시 팬카페까지 개설될 정도로 화제가 됐다. 이뿐 아니라 안정된 재력과 점잖은 성품으로도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각인돼있었다. 그는 고급 중형차에 가족사진을 걸고 다니며 피해자를 물색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평판을 범죄에 이용했다.
극 중 연쇄살인범 3인의 세련된 슈트 차림은 귀족적 풍모로 호감 가는 수준을 넘어선 동경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강호순이 피해자를 물색할 때 사용한 고급스러운 세단이 주는 ‘후광 효과’를 이용한 것과 비견된다. 이처럼 이들은 쾌락형 살인마들의 특징적 성향을 공유한다.
KBS2 ‘표리부동’에서 표창원은 프로파일링이 국내에서 활발해진 계기가 된 사건으로 3년간 8명을 연쇄살인하고 암매장한 강호순을 언급했다. ‘캘린더 살인마’라고 불린 그에 대해 프로파일러 표창원은 “살인 자체를 자신의 쾌감, 쾌락을 얻는 방법으로 사용했다”라며 ‘그 순간의 쾌락을 위한 살인’이라고 분석했다. 범죄 심리학자 이수정은 “본인의 욕망, 만족감, 이런 것들이 목표”라며 ‘자신의 성적 욕망이 표출된 살인’으로 해석했다.
표창원과 이수정은 강호순의 살인은 ‘쾌락’과 ‘욕망’의 충족을 위한 것으로, 이전의 연쇄살인범들의 ‘복수’와 구분했다. 유영철, 정남규는 나쁜 세상에 대한 ‘복수’라는 한국형 연쇄살인범의 전형성을 취하고 있는데 반해 강호순은 이유 없는 살인, 즐기기 위한 살인으로 목적 자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복수 살인처럼 대상이 특정되지 않은 쾌락형 살인은 범행이 멈추지 않는다. 쾌락형 살인범들이 가진 성적 매력은 패턴을 벗어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범인으로 특정될 확률이 낮아 검거가 어렵다. 강호순은 재정적으로 부족함이 없었는데도 어설픈 분장을 하고 피해자의 카드로 현금을 인출했다. 그가 이런 행동을 한 이유는 정확히 설명되지 않았지만, 그의 연쇄살인은 이 돌출행동으로 전환점을 맞았다.
이뿐 아니라 강호순은 목숨이 끊어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스타킹을 살해 도구로 사용했다. 그는 차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숨이 붙어있는 피해자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본 사실이 수사 과정을 통해 밝혀졌다.
‘보이스’ 악역과 강호순은 사이코패스 이론을 정확하게 따른다. 특히 모태구, 카네키 마사유키, 동방민은 강호순처럼 살인범의 전형적인 서사인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아닌 타고난 성향이 강조되고 살인 행위가 목적이 아닌 피해자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의 과정을 즐긴다.
피해자의 고통이 가해자의 쾌락이 되는 이 같은 패턴에 하나의 의구심이 든다. 사이코패스가 감정이 없다면 감정을 읽어내는 것 역시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나카노 노부코는 사이코패스는 본능적 감정이 없어서 객관적 관점으로 감정을 학습한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오히려 타인의 감정을 해석하는 능력이 진화한다는 것이다.
극 중에서 사이코패스가 살인하면서 혹은 상대를 자극하면서 분노 감정을 유발하는 상황은 이러한 이론적 근거를 안다면 뻔한 클리셰로 치부할 수 없다. 또 사이코패스가 자신의 손아귀에 잡힌 피해자를 바로 죽이지 않는 이유 역시 설명된다.
‘보이스’의 세 명의 살인마는 강호순처럼 타고난 유전적 성향에 불안한 환경이 시너지를 낸 사이코패스의 전형이다. 나카노 노부코는 사이코패스는 뇌의 기능에서 유전적 영향의 크지만, 자라난 환경이 도화선이 되어 반사회성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어렸을 때 이미 성격장애 진단을 받은 모태구와 동방민은 부모의 두려움과 특권 의식으로 인해 방치된다. 모태구 아버지 모기범 회장(이도경)은 아들의 비정상적인 폭력성을 원대로 분출하고 살도록 수하까지 붙여준다. 7살 때 인격 장애 진단을 받은 동방민은 가정폭력에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 다중인격으로 자신을 철저하게 위장한다. 동방현엽(장항선)은 손자로 키운 아들 민의 폭력성을 알고도 이를 외면하고 집안의 비밀을 알게 되는 주변 인물들을 죽이며 자신의 성을 지킨다.
카네키 마사유키는 아들의 잔인한 폭력성을 인지한 아버지로 인해 죽음 직전 상황까지 내몰리면서 더욱 극악무도한 본성을 드러낸다. 어린 아들을 버릴 수도 그렇다고 살인범으로 고발할 수도 없었던 아버지는 아들을 우물에 던지고 자신이 범인으로 잡혀간다. 우물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그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으로 살인을 시작한다.
‘보이스’는 사이코패스의 외면과 내면의 사실성에 충실하면서 이와 동시에 강박성을 더한 극적 잔혹함으로 악의 연대기를 이어가고 있다. 무작정 기분 내키는 대로 죽이는 모태구의 본능 충실형 살인은 살인을 하나의 작품으로 대하는 카네키 마사유키와 동방민의 기이한 욕망으로 진화된다.
이는 영문학자 테리 이글턴이 그의 저서 ‘악 : 우리 시대의 악과 악한 존재들’에서 언급한 나치의 유대인 집단 살인 방식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지구상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죽이는 일이 나치에게 매혹적인 계획이 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 일이 미적으로 완벽하다는 점이었다”라며 ‘완벽한 파괴’라는 관념에는 ‘악마적 환희’가 있음을 강조했다.
‘범죄상(狀)’이라는 말을 흔히들 한다. 선이 매끈하지 않은 우락부락한 외모의 배우들은 범죄상으로 분류돼 악역을 도맡아 한다. 그러나 최근 범죄물은 소위 범죄상 배우들이 범인이 아닌 형사 혹은 상황을 반전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세련된 외모의 사이코패스는 극 중에서 제아무리 잔혹한 연기를 해도 늘 추종자를 몰고 다닌다. 이는 매끈함의 일차원적 매력에 열광하는 현대사회의 병폐로 지적되기도 한다.
한병철은 그의 저서 ‘투명사회’에서 “전시 가치로 채워진 이미지들은 복합성을 띠지 않는다. 그런 이미지들은 단순 명료하고, 그래서 포로노적이다. 여기서 살펴보고 성찰하고 숙고하게 만드는 굴곡진 구속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라며 사고를 요구하지 않는 시각적 단순함에 중독되는 현대인들의 심리적 공허를 지적했다.
매끈한 슈트를 입고 매끈한 얼굴과 미소로 타인의 심장을 파고드는 ‘보이스’ 연쇄살인범은 사이코패스의 매력적인 외모와 태도가 실은 시각적 유혹에 쉽게 굴복한 현대인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잔혹한 도구일 수 있다는 경고를 던진다.
* 타이틀 사진=tvN ‘보이스4’ 이규형
[* 본 글은 외부에 기고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