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위에 살얼음이 언 새빨간 수박 조각이 장식된 주스를 사이에 두고 두 남녀가 결혼 준비에 한창인 듯 태블릿으로 ‘예신예랑’을 검색하고 있다. 사랑이 가든 담긴 눈으로 대화를 나누던 남자의 눈빛이 갑자기 차갑게 식어간다.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잔에 담긴 수박 주스는 한겨울 시리도록 푸른 바다처럼 차가운 냉기가 서린 붉은색이다. 남자의 눈빛이 수박의 살얼음 조각처럼 갈라지듯 얼어붙어 주변을 서늘하게 한다.
산호처럼 따스한 코랄 빛의 카페 내부는 시리도록 파란 테이블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남자의 눈은 테이블보다 차가운 푸른빛으로 물들어 간다. 여자에게서 시선을 때 창가로 돌린 남자의 눈이 햇빛으로 인해 순간 움찔한다. 그러나 단지 시각적 반사작용일 뿐 창을 뚫을 듯하던 태양은 새파란 테이블 위세에 눌린 듯 도로로 미끄러져 내린다.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남자는 다시 여자에게로 시선을 되돌린다. 시선만큼이나 손 역시 부자연스럽다.그러나 허공을 헤매는 시선과 달리 태블릿에 의지한 손은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는다. 마치 가위에 눌린 듯 남자는 태블릿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피부밑의 손뼈 마디마디가 안간힘을 쓰며 꿈틀거리는 게 느껴진다.
태블릿을 여자에게 보란 듯 뒤집었지만, 더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태블릿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여자의 눈에 시선을 맞춘다. 여자는 유리잔에 꽂힌 투명 빨대를 빼서 태블릿을 누르고 있는 남자의 손을 장난스럽게 툭툭 친다. 남자는 빨대의 차가움에 순간 움찔한다. 여자는 수박 조각을 한 입 베어 물고 살얼음의 차가운 미감을 즐기는 듯 무심한 미소를 짓는다.
“뭐야, 그 눈빛은. 설마, 나랑 결혼하자는 게 아이 낳고 꽁냥꽁냥이었어. 우리 둘이 꽁냥꽁냥이 아니라.”
“...”
“나, 인간들이 식탁 위에서 젓가락으로 발라 먹는 생선이야. 물론 걔들과는 좀 다르긴 하지. 여튼. 난 자웅동체였어. 지금은, 뭐. 이런 모습으로 살지만. 아 그래, 체외수정이 있네. 인공수정은 되겠네. 그건 생각 못 했어. 그런데 내 … 그게 가능할까. 그래도 뭐 한 번 해볼 수는 있겠지. 그래, 알아보자.”
“...”
“여튼 방법이야 찾아볼 수 있겠지만. 지금 내 모습이 이렇다고 내가 인간들이 말하는 여자는 아닌 거야. 나는 인간 여자가 아니라 인어. 아니 그건 좀 너무 미화된 표현이고. 왜 인간들은 인어에 환상이 있나 몰라. 뭐,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난 ‘어류 인간’이라고. 성생활은 가능하지. 그런데 딱 거기까지야. 그 이상은 좀 그렇지 않아. 내가 생각해도 좀 으스스하다. 왜 몰랐던 것처럼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데.”
“...”
“이 상황, 내가 눈물 흘리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해야 하는 거야? 아니지.”
남자는 여자가 아무렇지 않은 듯 내뱉는 말을 공중으로 날려 보낸다. 남자는 생각한다. 수박 조각을 삼키지 않고 오물거리고 있는 여자의 입은 어젯밤 나를 가장 평온한 깊은 정적에 빠져들게 했다. 그런데 지금 여자의 입은 가장 불길한 정적으로 밀어 넣고 있다.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사진을 보고 왜 여자에게 묻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이 여자는 나에게 자신의 정체를 감춘 적이 없었다. 오히려 사방에 단서를 흘렸다. 내가 물어주길 바라는 것처럼. 아니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나는 한 번도 이런 상황을 상상하지 않았다. 터질 듯 동시에 밀려 나오는 잔상들이 남자의 시선을 흐리게 했다.
“아! 이랬어야 했구나. “난 어류 인간이야. 자웅동체였는데. 정확하게 인간의 언어로 말하면 간성은 아니고, 웅성선숙? 뭐. 대충 그래. 난 인간 여자는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 남자도 아니야. 그냥 나는 어류 인간. 물론 굳이 구분하면 인간 여자 쪽이라고 할 수 있고. 인간 남자와 성생활은 가능한데 임신은 좀 그렇고. 이래도 좋다면, 오늘부터 1일.” 이런 시작이었어야 하는 거야?”
“...”
“당신, 그 눈빛. 그 눈빛을 보니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나네. 할머니는 햇살이 바다 표면을 뚫고 들어와 정원의 하얀 대리석 조각상이 빛날 때면 늘 우셨어. 그 조각상 때문에 막냇동생이 인간을 동경하게 됐다고. 동생의 불행이 그 조각상 때문이라고. 그 조각상을 평생 저주하셨지만, 부숴버리지는 못하셨지. 참 내가 얘기했나? 당신, 그 조각상 닮았어.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바다나 육지나 그 사랑이 뭔지 말이야”
“...”
“여튼. 그때 막내 이모할머니는 다리를 가진 대신 목소리를 잃었는데. 그건 인간들도 아는 이야기고. 지금 나는 이렇게 말 잘하잖아. 할머니는 늘 내가 막내 이모할머니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하셨어. 특히, 목소리. 할머니는 감정이 복받쳐 오를 때면 내 노래를 듣고 싶어 하셨는데. 그때마다 눈물을 흘리셨지. 당신도 반한 이 내 목소리는 할머니의 기쁨이면서 슬픔이었어. 내가 이 목소리를 사수할 수 있었던 건 사실 내 선택은 아니었어. 인간 과학자들은 진짜 같은 가짜를 원했고, 그래서 외양이 완벽해야 했지. 완벽한 외양. 진짜 같은 가짜. 우리 어류 인간이 인간에게 인기가 많은 이유지. 대신 과학자들은 생식기능은 어쩌지 못하는 상태로 방치했어. 생식을 완전히 차단하면 생리적 구별이 되는 거니까. 되레 어류 인간의 존재를 공공연히 인정하는 표식이 될 수 있었지. 또, 어류 인간 수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인종주의 문제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계산도 있었고. 어차피 그냥 둬도 자연임신은 불가능하고. 인공수정은 성공 확률도 어차피 희박하고. 그래서 내가 당신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이렇게 당신 앞에 있는 거야.”
남자는 고등학교 때 읽었던 소설 ‘멋진 신세계’가 갑자기 생각났다. 갓 태어난 아기들이 공산품처럼 누워있는 인간 생산 공장 상황을 묘사한 장을 읽으며 계속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에 갓난아이들이 올려있는 장면을 상상했다. 자연 임신을 법으로 금지한 사회 설정에 등골이 오싹해져 책을 덮었다. 그날 이후 남자는 그 책을 다시 펴지 않았다. 올더스 헉슬리를 혐오했다. 한참 후에는 왜 그런 책을 예언처럼 썼는지, 올더스 헉슬리를 원망하기까지 했다.
불과 20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인간과 어류 인간이 공존하고 있다. 국가는 출산율이 떨어져 적정 인구밀도를 유지할 수 없자 궁여지책으로 인간종에 위해를 가할 위험성이 적은 생식이 불가능한 어류 인간에게 법적 인간 허가증을 발급해줬다. 오염된 바다에서 더는 살 수 없었던 선택된 몇몇 어류들은 ‘비인종 공존 진화 프로젝트’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붙여진 개량 과정을 거쳐 인간의 모습을 가질 수 있었고, 인간처럼 숨 쉴 수 있는 대체 기관도 이식했다.
공상과학 소설에나 있을 법한 끔찍한 과학의 진보는 어처구니없게도 미개한 풍속이라는 이유로 사라져가는 해녀에 의해 시작됐다. 해녀에 의해 발견된 이 어류들은 반인 반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학계는 인어가 동화 속 상상이 아니라는 사실에 경악한 것도 잠시, 줄어드는 인구수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환호했다.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망상이 현실이 됐다. 그리고 지금은 인간과 어류 인간이 공존하고 있다.
“영혼이란 거 말이야. 우리 막내 이모할머니는 인간의 영혼을 동경했어. 당신이 책으로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가족들과 함께 하는 3백 년의 평화로운 삶을 단 하루 만에 포기할 정도로. 그런데 막상 내가 인간이라는 허울 쓰고 인간들과 생활해보니. 영혼이란 거, 사실 그거 오래 살지 못하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판타지 같은 거잖아. 당신이 영혼을 믿는다면 그건 존중하지만. 인간 중에 영혼이 있다고 진짜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냥 영혼이 있다고 생각해야 아등바등하고 사는 현재의 삶이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으니까, 믿는 척, 있는 척하고 사는 거지. 그래도 난 우리 이모할머니가 그렇게 원하던 불멸의 영혼을 갖게 됐다고 믿고 싶어. 이런 마음이 드는 걸 보면 이러다 나 진짜 인간 되는 거 아냐?”
인간들은 비인종 공존 진화 프로젝트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 때문에 사회는 혼종파와 순종파으로 나뉘었고, 한동안 양측이 팽팽하게 대립하며 꽤 오랜 시간 백의(白衣) 시위가 이어졌다. 백색, 화이트. 백인을 뜻했던 화이트는 미국이 무력화되면서 한때 백인성과 인종주의를 상징한 이유가 됐던 ‘모든 색이면서 아무 색도 아닌’ 인간 표준으로서 중립적인 색이 다인종 사회를 의미하는 기호가 됐다. 하얀색 옷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듯했다. 이 전복된 기호가 제대로 힘을 과시할 기회를 맞은 것이었다. 순수 인간 혈통의 상징이 된 이 색은 전 세계를 뒤덮었지만, 거대 자본주의의 시작이었던 미국에서 그랬듯 폭력적인 인종 차별의 상징으로 치부되며 결국 시위를 무력화했다.
혼종에 대한 대중의 공포감을 묵살할 수도, 줄어드는 인구로 인해 적정 소비 규모 유지가 불가능해 무너지는 경제를 외면할 수도 없었던 전 세계 국가 연합체는 어류 인간들을 구분하는 최소한의 서류상 차이마저 없앴다. 자신들이 밝히지 않는 이상 인간은 어류 인간을 구분할 수 없다. 모르는 채 살아라. 그게 국가가 택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모르는 채 살지 못했다. 늘 주변을 의심했다. 의심은 국가에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이어졌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순응하는 부류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시위하던 이들의 서슬 퍼런 침묵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순응의 침묵이 됐다.
남자는 친구들과 이 문제로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나, 어류 인간이야”라고 아웃팅하면 어떻게 할지. 몇몇 친구들은 “국가가 인정한 인간인데 무슨 문제야”라며 비혼자들이 넘치는 세상에 그렇게라도 꼭 결혼할 거라며 웃었다. 몇몇 친구들은 이 말에 구역질하는 듯한 행동을 취하면서 “나 비위 약해. 밥 먹다 갑자기 내 앞에 앉아있는 상대가 생선 비늘로 뒤덮여 있는 모습이 떠오를 거 같아. 끔찍하지 않냐”라며 결혼을 못 할지라도 절대 어류 인간을 결혼 상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다. 남자는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해? 혹시 식탁 위에서 지글지글 타고 있는 내 종족.”
남자는 여자가 내뱉는 말들이 자책인지 책망인지 혼란스러웠다. “아니야”라며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결혼 준비를 이어갈지, “미안합니다”라며 몰랐던 사이처럼 일어서서 나가야 할지. 여자의 입을 잠시라도 막고 싶었다. 그러나 태블릿 위 올려진 손은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가위에 눌린 것처럼 입술은 조금도 열리지 않았다.
“나도 내 종족 좋아해. 유익하잖아. 말했지, 내 임무. 내가 많이 소비하려면 이 몸매를 유지해야 하는데. 다이어트에 내 종족만 한 게 없어서. 가슴 아프지만 어쩌겠어. 대신 진심을 다해 경건한 마음을 갖지, 친구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 위해.”
남자는 그제야 생각났다. 여자는 생선 요리를 정말 좋아했다. 게걸스럽다고 느낄 정도로 정말 맛있게 먹었다. 남자는 여자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생선 요리를 좋아하는 어류 인간. 어찌 보면 정말 당연한 자연 섭리인데. 남자는 인간 요리를 좋아해서는 안 되는 인간.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난 이 인위적 규칙에 의심을 품어 본 적이 없다. 왜 국가는 인간과 어류 인간을 공존하게 하면서 자연의 섭리를 벗어난 인간들의 인위적 규칙을 재조정하지 않았을까. 남자의 물음표는 그 어느 것도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그의 머리를 어지럽힌다.
“자, 나를 봐. 나는 인간의 다리를 갖고 싶어 목소리를 바친 내 막내 이모할머니가 아냐. 그분처럼 내가 바다의 고귀한 왕족 혈통이라는 것만 빼면 공통점은 전혀 없어. 이렇게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잖아. 걸을 때마다 칼에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끼지도 않고, 물이 아니어도 숨 쉬는데 전혀 문제없어. 막내 이모할머니를 닮은 목소리는 여전히 당신에게 말을 걸고 있고 장미처럼 투명하고 발그스레한 내 얼굴은 이렇게 당신을 향해 있어. 아, 미안. 당신을 미소짓게 했던 내 목소리, 내 피부, 이게 지금, 이 순간 저주의 시작이었나? 물론, 이렇게 물이든 주스든 수분 섭취를 계속해야 하지만. 그래도 사는 데 불편하지 않아. 그냥 인간보다 조금 많이 마시는 정도니까. 무엇보다 수분 섭취를 많이 하니, 평생 자연 다이어트 중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이런 몸매, 이런 피부를 유지하고, 내 임무에 충실할 수 있지.”
남자는 어린 시절 엄마가 ‘인어공주’ 동화책을 읽어주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저 잠에 빠져들게 하는 엄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좋았을 뿐 그 동화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커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안데르센이 잔혹동화 작가라는 의혹을 받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가장 결정적인 건 나는 물거품이 돼 사라지지 않아. 이 정도면 가장 완벽한 해피엔딩 아냐?”
남자는 생각한다. 나는 내 앞의 이 존재를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어류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그녀’라고 해야 하나, ‘그’라고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