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컬 드라마는 주인공인 의사를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세운다. 질병은 물질만능주의 현대사회의 금전적 풍요로도 극복할 수 없는 유일한 미점유의 영역이다. 메디컬 드라마에서 의사는 절망과 장애를 극복해가는 여정을 거쳐 환자의 아픔을 끌어안는 진정한 영웅이 된다.
기존 메디컬 드라마들이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의 희망을 찾는다면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율제 유토피아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절망 없는 희망, 갈등 없는 희망. 디스토피아의 현실을 사는 이들에게 무결점 유토피아는 허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 없는 희망, 공허한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는 영웅 찬가에 시청자들은 조용하지만 열띤 반응을 보낸다.
보건의료노조가 9월 2일 극적 타결을 이뤘지만, 3일 일부 지역 병원은 파업 강행을 이어갈 정도로 코로나19 이후 의료계 사정은 더욱 열악해졌다. 대중은 의료인들의 파업 강행에 원망보다는 공감을 표한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파국의 시대에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힘들지만 힘들지 않다’고 노래하고, 시청자들은 실재하지 않는 안온함을 찾아 가상의 공간 ‘율제 유토피아’로 향한다.
메디컬 드라마는 희망 없는 시대가 절박하게 원하는 영웅을 앞세워 대중의 공허한 열망을 충족한다. ‘낭만닥터 김사부’(SBS, 2016, 2020)의 김사부(한석규)는 고뇌하고 갈등하지만 좌절하지 않는 영웅의 모습을 재현해 지상파 메디컬 드라마로서는 드물게 시즌 2까지 제작되며 인기를 끌었다.
시즌 1(2020)에 이어 시즌 2가 방영 중인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간담췌외과 이익준(조정석), 소아외과 안정원(유연석), 흉부외과 김준완(정경호), 산부인과 양석형(김대명), 신경외과 채송화(전미도), 외과의사 5인방은 절망 없는 희망만을 이야기한다.
열악한 환경의 시골 병원에서 백전백패의 실력을 보여주는 ‘트리플 보드’ 김사부의 괴팍함은 시작부터 허구라는 사실을 공유한다. 그러나 외과의 5인방의 친근감은 완벽한 시설을 갖춘 종합병원을 배경으로 갈등 없이 낭만적으로만 전개돼 허구를 현실인 듯 착각하게 한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신원호 PD는 지난 2020년 3월 시즌 1 제작발표회에서 “메디컬 드라마만은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그는 “‘응답하라’, ‘슬기로운 감빵생활’에 이어 병원을 배경으로 사람 사는 이야기를 그렸다. 지극히 소소하고 따뜻한 이야기다”라고 설명했다.
‘사람 사는 이야기’, ‘직업이 의사인 이들의 이야기’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소소하고 따뜻하다. 그러나 가장 치열했던 메디컬 드라마로 평가받는 ‘하얀거탑’에서 의술의 상징인 일반외과 의사 장준혁(김명민)과 인술의 상징인 소화기내과 최도영(이선균)을 합쳐 놓은 무결점 외과의 5인방은 절대 소소하지 않다.
이들은 매사 환자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병원 내에서는 물론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실력을 갖췄다. 무엇보다 독선적으로 일 처리를 하지 않고 동료, 후배들과 협력하며 어떤 일이든 잡음 없이 처리한다.
신문방송학자 김주미는 자신의 저서 ‘메디컬 드라마’에서 메디컬 드라마 속 의사를 ‘슈퍼맨’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의사 영웅(doctor hero)’은 슈퍼맨보다 강력하다. 슈퍼맨은 영웅일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인생 서사를 갖고 있고, 타고난 초인적 능력으로 인류를 구한다. 그러나 의사 영웅은 비범한 능력을 갖췄지만 결국 평범한 인간이다. 메디컬 드라마의 의사 영웅은 현실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어 허구가 마치 실재처럼 생생하게 시청자에게 전달되고 희망이 된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외과의 5인방이 율제 병원에서 보여주는 히포크라테스 정신은 미디어학자 존 피스크의 ‘리얼리즘적(realistic)’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 ‘텔레비전 문화’에서 “현실을 재생산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지배적인 감각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라며 드라마가 ‘리얼리즘적’으로 평가받는 이유를 설명했다. 문학박사 윤석진의 견해 역시 비슷하다. 그는 시청자들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드라마에서 실재인 듯 몰입할 수 있는 것은 ‘정서적 현실성’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경험적 현실성과 구분되는 정서적 현실성은 현실이 아닌 ‘현실에 대한 지배적 감각’과 상응된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외과의 5인방은 최근 변화하는 의사들의 모습을 반영해 ‘정서적 현실성’을 높였다. 동네 지역병원은 물론 대학병원을 가도 과거처럼 마치 죄인처럼 환자를 대하는 과거 의사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환자 보호자로서 경험한 외과의들은 여전히 차갑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부정은 없고 긍정만, 절망은 없고 희망만 존재한다. 그런데도 이 드라마가 이야기하는 희망이 공감대를 얻는 것은 현실에 ‘있음직하다’, 혹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대중들의 ‘지배적인 감각’을 재현하는 아이러니 때문이다.
김주미는 메디컬 드라마의 캐릭터를 초인적 영웅, 결함 있는 영웅, 실천가로서 영웅으로 구분하고, 시대별 ‘의사 영웅’을 제시했다. 한국 메디컬 드라마의 효시인 ‘소망’(KBS1, 1980~83)의 닥터리는 환자의 질병뿐 아니라 인생을 구원해주는 ‘초인적 영웅’으로, ‘하얀거탑’(MBC, 2007)의 천재적 외과의 장준혁은 과장이 되기 위해 비굴하다 못해 야비해지지만 담관암 선고를 받고 죽음으로써 영웅적 서사를 완결한 ‘결함 있는 영웅’으로, 외상외과 이국종 교수를 모델로 한 ‘골든 타임’(MBC, 2012)의 최인혁은 의술을 넘어 의료 환경 개선을 위해 앞장서는 선구자적 행위를 보여주는 ‘실천가로서 영웅’으로 분류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시대를 거슬러 초인적 영웅시대로 회귀했다. 외과의 5인방은 환자의 질병은 물론 마음마저 치료해 인생을 리셋하는 조력자로 이타적인 삶을 실현한다. 단, 과거 초인적 영웅으로서 의사가 부권사회의 권위에 근거했다면,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외과의 5인방은 합리적 개인주의의 가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들은 환자를 가족처럼 여기고 동료들을 애틋하게 생각하지만, 동료와 후배는 물론 친구들과도 개인 대 개인의 거리를 유지한다. 정원은 동료 후배 의사와 연인 관계이지만 친구들과의 밴드 연습에는 동행하지 않고, 송화는 친구들과 허물없는 사이지만, 나 홀로 캠핑을 즐긴다. 익준은 여자관계가 다소 미덥지 않아 하던 준완이 동생과 사귀는 사실을 알지만 모르는 척한다.
이들은 결함 있는 영웅의 면모도 보여준다. 송화는 환자는 애틋하게 보살피고 완치해주지만, 정작 엄마의 파킨슨 증세는 알아보지 못했다. 석형은 불임과 난임으로 고생하는 산모들을 위로하고 치료해주지만, 정작 아내의 고통은 외면했던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익준은 환자들에게 늘 웃음을 주지만, 아들에게는 시간을 충분히 내주지 못해 늘 미안해한다.
가족의 희생으로 이들의 인류애는 더욱 빛을 발하고 영웅적 서사는 더욱 단단해진다. 그러나 정작 가족의 아픔은 감춰지고 소소한 에피소드에 그친다.
이 드라마의 ‘정서적 현실성’은 ‘실천가로서 영웅’ 면모를 통해 더욱 공고해진다. 정원은 병원을 소유한 율제 그룹 회장인 아버지가 남긴 후계 상속권을 포기하고 그 대신의 VIP 병동의 수익 운영권만 요구한다. 그는 이 수익을 소아 환자들을 위한 ‘키다리 아저씨’ 활동 자금으로 사용한다. 정원에게 ‘키다리 아저씨’를 이양받은 송화는 소아뿐 아니라 수술비 조달이 어려운 환자들로 대상을 확대하고 필요한 자금 확보를 위해 힘든 VIP 수술을 도맡아 한다.
SF급의 판타지를 그려온 그간의 메디컬 드라마도 이보다 더 완벽한 의사 영웅을 내세우지 않았다. 수술 실력 대신 인간미가 결여돼있거나, 인간미는 넘치지만 실력은 한끝 모자란 인물이었다. 그도 아니면 실력도 인간미도 좋지만 환경의 장벽에 가로막히는 등 결함 혹은 장애가 그들을 담금질 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사람 사는 소박한 이야기를 지향하지만, 인간 사회에 늘 존재하는 절망과 갈등을 제거했다. 절망 없는 희망의 메시지는 공허하다. 그러나 극복할 수 없는 극한의 절망은 되레 공허한 희망에 의지하게 한다. 절망할 수 있는 순간, 절망과 대면할 수 있는 순간에는 희망이 있지만, 현재 상황은 절망마저도 사치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현재 절망의 깊이를 대변하는 희망 없는 공허한 찬가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렵다.
* 타이틀 사진=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 본 글은 외부에 기고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