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게임’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메타포로 쓴 웃음보다 더 쓰디쓴 여운을 남긴다. 데스 게임 하나하나가 가장 순수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어린 시절 놀이라는 점에서 잔혹동화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는 표피적 요소일 뿐이다. 누군가가 죽어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게임의 잔인한 폭력성은 개인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를 고발하는 듯하다. 이 메시지를 파고 들어가면 친구와 즐기던 놀이가 실은 타인을 짓밟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논리를 주입한 ‘잔인한 사회화’의 시작이었음을 각성케 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지점은 게임의 승자들이 자의든 타의든 살인을 불사해 획득한 상금으로 꿈꾸던 삶을 누리기보다 허무주의에 빠져든다는 점이다. 가장 극악무도한 자본주의 게임에서 승자들은 자본주의의 최대 수혜자가 아닌 개인의 성취가 최우선인 ‘자본주의의 참패’를 입증하는 역할을 한다.
‘승자의 참패’라는 이중적 메시지를 던지는 이 드라마는 그간 절대 논리로 여겨진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타락을 다룬다.
유일한 분단국가 한국 태생의 ‘오징어 게임’이 21세기 자본주의의 중심 미국의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OTT ‘넷플릭스’에서 방영된다는 점은 이 드라마의 이데올로기적 시사성을 더욱 부각한다. 무엇보다 이데올로기 논쟁으로까지 치닫는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지금-여기로 시점을 정조준하면 이 같은 시사점이 더욱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프런트 맨, 대장은 456명의 게임 참가자 모두에게 ‘완전한 평등’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대장은 “이 게임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해”라며 데스 게임 놀이판이 자유주의 근간인 만인의 평등이 실현되는 가장 완벽한 공간임을 강조한다. 이어 하는 말은 더욱더 의미심장하다. 그는 “바깥세상에서 불평등과 차별에 시달려 온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야”라며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는 자유주의가 평등이 아닌 철저한 불평등의 산물임을 시사한다.
“(파시즘은) 사회적 지지 기반과 무수하게 조합된 특정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보면 극도로 이질적이기는 하지만, 민족이 도덕적으로 하강하고 쇠락한다고 감지된 한 시기가 탈자유주의적인 새로운 질서의 재생과 갱신의 길을 내어주고 있다는 중핵 신화로부터 내적 응집력과 추동력을 끌어오는 종이다”
사회학자 장문석은 그의 저서 ‘파시즘’에서 영국 역사가 그리핀의 파시즘 정의를 인용해 자유주의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비난과 회의에서 파시즘이 출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는 ‘오징어 게임’를 조망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 굳이 파시즘을 언급하지 않아도 현 사회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굳건한 신망이 흔들리고 절대 논리라 믿었던 민주주의 사회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오징어 게임’은 자본주의의 생존경쟁 축소판인 게임을 소재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도덕적 타락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더 나아가 ‘완전한 평등’, ‘절대 평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제시하지만, 민주주의 오류에 반기를 든 파시즘처럼 종국에는 평등을 부정하는 뉘앙스를 띤다. 이는 인간의 평등을 부인하고 이상으로서 불평등을 확신한 파시즘을 떠올리게 한다. 또 인간 내면의 잔인한 폭력성을 끌어내고 이를 인간의 보편타당성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제하는 대장의 신념은 독단적이면서 더 나아가 광신적이라는 점에서 파시즘과 연결 짓게 한다.
‘오징어 게임’의 날 선 상징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완전한 평등을 위해 설계된 게임은 철저한 감시 시스템 아래 움직인다. 이는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이 범죄자를 산업사회에 적합한 노동자로 재교육한다는 명분 아래 제안한 ‘파놉티콘’ 프로젝트와도 맥을 같이한다.
벤담은 프랑스 국회 제출된 요약본인 ‘파놉티콘’ 프랑스판에서 “노동, 그것은 부유함의 아버지이며, 가장 훌륭한 재산인데도 왜 저주로 묘사하려 하는가?”라며 파놉티콘이 집단 노동을 통한 범죄자의 사회화에 기여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파놉티콘이 수감자의 재사회화를 위해 노동의 고귀함을 주입하는 것과 달리 데스 게임 놀이판은 악의 일상성을 끌어냄으로써 참가들이 길든 기존 사회체제를 부정한다. 이처럼 방향성을 달리함에도 파놉티콘의 완벽한 감시 체계를 재현함으로써 악의 일상성이라는 목적을 달성한다.
파놉티콘은 6층의 원형감옥 가운데 감시탑이 있는 구조다. 각 층과 각 층의 방은 감시탑을 향해있고 2층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도록 설계돼있다 감시탑에 처진 발은 감독관이 수감자들을 볼 수 있어도 수감자들은 감시자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게 함으로써 비가시적 감시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벤담이 굳건하게 믿은 이상적인 감옥 파놉티콘은 말 그대로 ‘이상적’ 계획에 그쳤다. 그러나 현 사회는 CCTV, 모바일 등이 감시탑을 대체해 벤담의 이상은 200여 년이 지나 완벽한 ‘보이지 않는 감시체계’를 실현했다.
‘오징어 게임’은 파놉티콘의 21세기 버전을 압축적으로 재현했다. 방 정 중앙을 비워두고 위로 겹쳐서 침대가 배치돼있고, 방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게 천장에 밀착해서 거대한 화면이 걸려있다. 소설 ‘1984’의 빅 브라더의 감시 체계를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방 구조는 파놉티콘을 완벽하게 재현한 구조다.
찬장에 설치되는 투명한 원형 장치물은 파놉티콘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 하워드가 제안한 하늘을 볼 수 있는 구조의 감옥과 대비된다. ‘오징어 게임’의 원형 장치물과 하워드 감옥 모델에서의 하늘은 일상과 격리된 참가자와 수감자에게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자극하는 기능을 한다. 특히 ‘오징어 게임’에서 패배자들이 나올 때마다 원형 장치물로 쏟아지는 돈은 죽음에 애도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
이들에게 제공되는 최소한 음식 역시 파놉티콘에서 제러미 벤담이 강조한 제한조건과 일치한다.
“수감자의 음식은 국가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싸고 평범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수감자들이 노동자는 빈민계층보다 좋은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식욕을 돋울 필요가 없으므로 (양념 등의 자극적인) 어떤 것도 섞지 말아야 하고, 음료는 물 이외에 발효된 음료(술)는 절대 안 되며, 빵은 가장 싼 것만 제공한. 식욕을 돋우는 것은 작업장이다”
수감자들에게 제공되는 최소한 음식은 노동의 가치를 일깨우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오징어 게임’에서도 게임 참가자들에게 제공되는 최소한 음식은 죽여야 사는 게임에 필요한 살기를 돋우는 역할을 한다.
‘오징어게임’의 녹색 트레이닝복 역시 파놉티콘의 수감자 의상과 유사한 기능을 한다. 벤담은 “의복은 본보기로서의 중요한 목적에 부응하도록 몇 가지 모욕의 표시를 담고 있어 한다”라며 소매 길이를 다르게 디자인된 옷을 제안했다.
데스 게임 참가자들의 녹색 트레이닝복은 완벽한 평등을 상징하는 코드이면서 감시자로부터 피 감시자인 참가자들을 구별하는 표식이기도 하다. 이들은 옷에 새겨진 번호로 불리고, 흙바닥에 나자빠지고 뒹굴고, 땀으로 뒤범벅이 되지만, 옷을 갈아입을 기회를 박탈당해 더럽혀진 채로 게임을 이어간다. 마지막 남은 3명에게 주어지는 스테이크 풀코스 요리와 연미복은 연명 수준의 음식과 더럽혀진 옷이 함의한 모욕의 의미를 드러낸다.
‘오징어 게임’는 그런데도 세상은 살만하다는 식의 장밋빛 미래를 제시하지 않는다. 모두가 당연시하는 지배 체제에 대한 회의는 재앙적인 폭력성으로 이어진다. 장문석은 “파시스트는 기회주의자와 허무주의자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서 “파시즘의 허무주의는 총체적인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전쟁에서 찾았다. 이미 파시즘은 등장 초기부터 부패하고 누추한 사회의 정화 수단으로 전쟁을 찬양한 바 있다. 더러운 것을 불로 지져 깨끗이 한다는 제의적 발상이야말로 파시즘 특유의 것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무력해 보이는 허무주의가 실은 극단적인 폭력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오징어 게임’은 지난 10월 13일 기준으로 1억 1천만 1백만 유료 가입 가구가 시청해 넷플릭스 역대 최초로 1억 가구 시청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오징어 게임’에 공감하는 대중의 내면에 현 사회에 대한 회의와 허무가 깔려있음을 부정할 수 있을까.
* 타이틀 사진=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 게임’
[* 본 글은 외부에 기고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