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이상 Dec 29. 2021

‘지옥’, 왜곡된 믿음이 초래한 잔혹한 현실

인간은 전능(全能)해질 수록은 전지(全知)와는 멀어지는 듯하다. 인간의 전능은 죽음 정복의 욕망에 이르고 전지의 길을 막아 현재가 지옥이 되는 잔혹한 결말을 향해간다. ‘지옥’은 예고된 죽음 앞에 무력해진 인간의 왜곡된 믿음이 초래한 잔혹한 비극을 재현한다.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옥’은 최근 영화와 드라마에서 무한 반복되는 ‘이단’과 ‘종교’를 향한 원망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보다는 인간의 믿음을 향해있다. 인간은 영혼 불멸에 기반을 둔 종교에 의지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한다. 그러나 종교가 주장하는 사후 세계가 때로는 현실을 지옥으로 만들기도 한다. ‘지옥’은 현실이 지옥이 되는 고통을 자초하는 인간의 믿음을 정곡으로 파고들어 이단보다는 종교의 폐단, 이단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어리석은 ‘믿음’을 자각게 한다.       


종교와 이단에 관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한 이단 연구자 탁지일은 그의 저서 ‘이단이 알고 싶다’에서 이단이 종교와 사회에서 분리돼 절대악으로 독자 생존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는 “이단이 없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단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그 존재 이유가 있다”라는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의 말을 인용하고, 자신 역시 “교회에도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을, 단지 이단이라는 전제와 선입관으로 인해 비판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조심스럽게 검증하게 된다”라며 종교의 문제를 이단의 탓으로 돌리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이단은 한 발 떨어져서 보면 교리와 제의에 수긍하기 어려운 요소가 많다. 그러나 사회적, 윤리적 기준에 맞는 보편타당한 인지 도식만으로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때 다중은 군중심리에 휩쓸리듯 보편성을 벗어난 이단에 빠져들게 된다. 과거 한 지인은 이단으로 분류되는 교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친한 친구에 대해 “그 친구가 행복하면 된 거지. 그렇게 정리했어, 난”이라며 교회의 문제점보다 그 교회에서 친구가 받는 위안이 더 크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옥’


‘지옥’에서 새진리회는 방송을 통해 실시간으로 방영하는 ‘시연’을 제외하고는 종교에서 중요한 체계적 ‘제의’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새진리회를 기독교와 관련해 판단할 만한 근거는 없다. 정진수(유아인)는 특정 종교의 인격화된 신이 아닌 관념으로서 ‘신’을 언급했을 뿐 정기적으로 이뤄지는 종교 의례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2대 의장으로 지명한 김정칠(이동희)이 목사라는 점, 지옥행을 고지를 받은 사람들을 찾아내 관리 감독하는 행동대장 유지(류경수)의 직함이 사제라는 점에서 기독교의 형식을 갖춘 이단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같은 설정은 이단으로서 새진리회의 폐단이 아닌, 강압적 통제에 자신들의 일상을 내맡기는 다중의 왜곡된 믿음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김정칠을 중심으로 한 새진리회는 공개 처형하듯 지옥행 고지를 받은 자들의 죄를 공지하고 전 세계에 생중계 시연을 하는 것이 의례의 전부다. 그런데도 불특정 다수에게 고지되는 지옥행에 관해 제시한 단순 명료한 접근 방식은 유일무이한 권위를 갖게 된다.      


새진리회는 ‘행위로 인한 죄 그리고 그로 인한 지옥행’으로 고지를 받는 자들의 ‘죄’와 ‘죽음’를 정의한다. 이처럼 ‘사회적 합의가 가능한 죄를 범한 자’를 고지 받은 자가 된 이유로 규정함으로써 자신들의 폭력적 강제를 정당화한다. 고지 받은 자들의 죄를 공개하고 이들의 설명할 수 없는 죽음을 공개 처형 방식으로 의례화해 ‘나도 될 수 있다’는 다중의 공포와 불안을 자극하고 통제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옥’


새진리회의 교리를 세운 1대 의장 정진수(유아인)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왜 지옥행 고지를 받았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그가 세운 교리는 다중의 맹목적 믿음을 끌어낼 수 있었으나, 자신만은 끝까지 믿음 안에 속하지 못했다.   

      

그는 이를 지적하는 민혜린(김현주)에게 “이런 기괴한 일이 벌어지는 데 아무 이유가 없으면 사람들이 버틸 수 있을까요? 아마 엄청난 폭동과 정신적 공황이 찾아올 거예요. 이유가 있어야 해요. 이런 기괴한 일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벌어지고 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일어나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해요”라며 “그래서 확실한 악인이 있어 지옥에 가는 것처럼 만들어야 했어요”라며 왜곡된 믿음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자신의 해석에 관한 의문을 불식하기 위해 폭행 강간 살인을 저지르고도 멀쩡히 사는 가해자가 지옥행 고지를 받고 죽은 것처럼 위장하고 자신의 죽음을 실종으로 덮는다.      


‘지옥’에서 다중을 불안하게 하는 지옥은 그들이 고지 받은 지옥행의 사후 세계로서 ‘지옥’에 한정되지 않는다. 고지 받은 자와 가족이 겪는 사회적 소외, 고지 받는 대상이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사회적 불안이 만들어낸 현실 ‘지옥’의 함의를 더한다. 다중은 사후 세계에 대한 공포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소외와 불안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해 새진리회의 교리에 자신을 내맡긴다.      


민혜린과 함께 소도의 핵심 구성원인 공형준 교수는 “내 딸 죽음이 심판입니까? 사고입니까? 전 제 딸이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해요. 나한테 닥친 불행을 다른 무엇도 아닌 불행 그대로 ‘온전히’ 슬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며 지옥행 고지로 지옥보다 더 잔혹한 사회적 소외에 맞닥뜨리는 예고된 불행의 끔찍함에 대해 말한다.         


이처럼 ‘지옥’은 신은 존재하는지, 신의 실체는 무엇인지, 신은 항상 옳은지, 인간을 단죄하는 신의 기준은 무엇인지, 인간은 신의 단죄에 순응해야 하는지, 신의 행위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등 의문을 제기하며 그간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관념의 근간을 흔든다. 신에 대한 끊임없이 이어지는 의문은 설명되지 않은 현상의 이유를 신에게 돌리는 인간의 왜곡된 믿음의 실체를 향해 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옥’


인간은 모든 현상에 대한 납득할만한 ‘해석과 설명’을 원한다. 지식은 일상을 통제할 수 있고, 일상이 통제되면 안전이 보장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지옥은 본질적으로 살아있는 인간이 확인할 수 없는 관념의 장소다. ‘지옥’에서 인간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지옥은 사후 세계이면서 동시에 불안한 현재를 의미한다. 불가해한 현상에 대한 새진리회의 설명으로 인해 인지적 불안에서 벗어난 인간들은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현재를 ‘생생한 지옥’으로 만든다. 불확실성의 공포에 시달리는 인간들에게 새진리회의 설명은 절대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조작된 설명’에서 얻는 위안은 진실도 사실도 아님을 일깨운다.      


종교학자 김기대는 그의 저서 ‘영화, 종교를 만나다’에서 “어떤 종교가 됐건 경전의 기본 정신은 죽임이 아니라 살림이며 이성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다”라며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살인에 어떤 방식으로든 신의 개입은 존재하지 않음을 시사했다.      


이어 의심은 진리에 닿게 하지만, 인간의 편견, 해석, 전통이 들어간 의심은 결코 진리에 닿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진지한 의심’은 의심이 자신을 향하는 것으로, 인간 자신이 완벽하지 않으면서 모든 판단의 주체가 되려 할 때 진지한지 못한 의심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가 언급한 ‘진지한 의심’은 ‘지옥’에서 인간 세상 전체를 극한의 공포로 몰아넣은 ‘설명의 오류’에 대한 타당한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할 때, 즉 나의 나 됨에 대한 의심이 시작될 때 진리를 향한 인간의 의심은 진지해진다. 의심이 진리를 향하지 않고 두려움을 향하고 있을 때 과감하게 자기의 습을 제거해야 한다. 습이 제거될 때 자신과의 진실한 소통이 이뤄지고 소통의 경험은 타자에게 확대된다”라며 ‘진실한 소통’으로 이어지는 ‘진지한 의심’의 순기능을 강조한다.         


‘지옥’은 끔찍한 죽음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찢기고 태워져 ‘숨이 멎는’ 사멸의 비극보다 왜 죽을 수밖에 없는지, 죽음에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설명 오류가 초래한 비극이 더 비참하다. 잘못된 설명과 이에 대한 왜곡된 믿음은 인간의 현재를 죽음도 삶도 아닌 경계에서, 살아있으되 살아있는 것이 아닌 ‘숨 쉬는’ 잔혹한 지옥으로 만든다.      


새진리회에 쫓기는 민혜린이 무사히 도피할 수 있도록 돕는 택시 기사는 소도 일원은 아니지만, “저는 신이 어떤 놈인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어요. 제가 아는 것은 여기는 인간들의 세상이라는 거예요. 인간들 세상은 인간들이 알아서 하는 거죠. 안 그렇습니까?”라며 잘못된 설명에 의지하느라 놓친 ‘신과 인간의 세상은 합일될 수 없다’는 너무도 보편적 진실을 말한다.     


‘지옥’은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이 아닌 ‘믿음의 방식’ 문제를 다룬다. 인간의 불가해한 문제에 무분별하게 신을 끌어들이는 것은 결국 ‘진지한 의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인간이 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라고 할지라도 자신들이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신의 계시로 성급하게 결론짓는 행위는 문제의 본질로부터 멀어져 더 큰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는 당연한 논리를 ‘지옥’은 일깨운다.   


* 타이틀 사진=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옥’

[* 본 글은 외부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오징어 게임’, 완벽한 평등의 잔혹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