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소매 붉은 끝동’이 5.7%로 시작해 15회에서 14.3%까지 치솟은 데 이어 지난 1일 17.3%로 총 17회를 마감했다. 2021년 방영돼 선전한 청춘 사극들과 비교할 때 압도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장 치열한 드라마 격전지인 금, 토, 일 저녁 9시대에 편성돼 거둔 수치라는 점에서 사극 전성기는 물론 그간 드라마 약세를 보인 MBC 귀환으로 해석되고 있다.
동명의 웹 소설 원작의 MBC ‘옷소매 붉은 끝동’은 초반 ‘궁중 로맨스’가 부각돼 다소 가벼운 색채로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이 선택한 삶을 지키고자 한 궁녀’와 ‘사랑보다 나라가 우선이었던 제왕’, 두 인물의 전제를 충실하게 표현해 로맨스 이상의 메시지를 의미 있게 풀어갔다.
청춘 사극 흐름에 편승한 동반 상승으로 평하기에는 ‘옷소매 붉은 끝동’ 기저에 깔린 함의가 절대 가볍지 않다. ‘청춘 사극’이 일으킨 사극 열풍은 한동안 화면에서 잠적한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정통 사극 부활에도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옷소매 붉은 끝동’은 ‘달의 뜨는 강’(KBS2, 2021), ‘보쌈-운명을 훔치다’(MBN, 2021)로 시작해 ‘홍천기’(SBS, 2021), ‘연모’(KBS2, 2021)로 이어지는 청춘 사극들과 다른 결의 전개로 ‘여성주의 사극 멜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남성의 소유물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조선 시대 여인 중에서도 왕에게 최소한의 선택권마저 내어준 궁녀의 삶을 그렸다. 이 드라마는 영, 정조를 내세운 사극에서 늘 쟁점이 돼온 소론과 노론의 당파 싸움을 일평생 살해 위협에 시달렸지만, 개혁의 목표를 수정하지 않았던 ‘나라가 우선’인 정조의 신념을 설명하는 배경으로 축약해 사용했다. 또 여성 중심 사극에 의례적으로 등장하는 당파를 등에 업은 암투 대신 지위에 상관없이 제한된 공간에서 삶을 마감해야 하는 궁에 사는 여성들의 동질성을 부각했다. 이처럼 그간 사극을 보는 이유였던 힘을 가지기 위한 정치적 모략을 뒤로 밀어낸 자리에 전문직 여성으로서 ‘궁인’을 세웠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실존 인물인 궁녀 성덕임(이세영)을 통해 모든 여성이 종속적인 사회구조에 순응한 것만은 아니었을 거라는 가정 아래 스토리를 끌고 나간다.
사극에서 여성 중심 서사는 늘 영웅적 남성주의에 종속돼왔다. ‘장희빈(KBS2, 2002~2011)’은 사극 속 악녀의 전형적인 서사에서, 일본 자객에게 시해당한 비운의 왕비 ‘명성황후’(KBS2, 2001), 수라간 나인에서 어의녀가 된 ‘대장금’(MBC, 2003)은 영웅주의로 인물을 다룸으로써 남성적 사극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현대 사극’이라는 자신만의 장르 개념을 세운 연출가 이병훈은 ‘대장금’ ‘동이’(MBC, 2010) 등 여성을 중심으로 정치를 재구성해 ‘여성 사극’ 열풍을 이끌었다. 언론영상학부 교수 주창윤은 그의 저서 ‘역사 드라마 상상과 왜곡 사이’에서 이병훈을 작가주의 연출가로 구분하고 그가 작품을 통해 여성의 역사를 다시 썼다고 해석했다. 주창윤은 “이병훈의 역사 인식은 ‘비주류의 진정성’이다”라며 그가 그려낸 여성 인물 역시 비주류이지만 진정성 있게 그려졌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병훈이 그려낸 여성 인물은 주창윤의 언급대로 ‘영웅서사의 현대적 변용’이다. 조선시대 여성의 태생적 한계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기보다는 드라마 방영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맞춰 남성들의 성공 패러다임을 적용한데서 크게 진전을 보지 못한다. ‘비주류로서 여성’을 익숙한 남성적 영웅주의 서사 방식으로 풀어냄으로써 기득권인 남성들의 반감을 사지 않으면서 여성까지 시청자로 끌어올 수 있었다.
최근 사극 열풍을 이끄는 청춘 사극은 여성이 더 적극적으로 전면에 부상한다. 이는 남성적 서사에 여성 서사를 맞춘 이병훈의 현대 사극과는 또 다른 사극 패러다임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현대극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차용해 판타지, 스릴러 등 신선한 접근이 돋보인다. 그러나 현대극에서 여론에 의해 밀려나고 있는 복잡한 애정 관계가 갈등의 축으로 등장해 사극에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진중함의 한계를 드러낸다. 지난해 방영돼 성과를 거둔 다수의 사극이 여성들을 주인공을 내세웠지만, 여성을 억압한 시대적 배경이 현대극에서 충족하지 못하는 일탈의 아찔함과 긴장감만 높였을 뿐 여성주의 서사를 충족하지 못한다.
‘옷소매 붉은 끝동’ 역시 여성주의 서사 관점에 전제돼야 하는 궁녀 성덕임의 신념이 모호하게 그려진다. 덕임의 시선이 오롯이 이산(이준호)만을 향하면서 궁인으로서 직업의식과 남자 이산을 향한 애정, 두 감정선이 기획 의도와 달리 시청자 입장에서 명확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드라마의 극적 전개 속성으로 인해 성덕임이 이산과 거리를 두려는 이유가 연인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행동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았다. 무엇보다 이산이 덕임의 모호한 행동에 혼란을 느끼면서 보이는 강압적인 말과 행동은 현대극에서라면 논란이 있을 법할 정도로 폭력적 뉘앙스를 강하게 띠었다. 몇몇 장면은 ‘가을동화’(KBS2, 2000)의 망나니 재벌가 아들 한태석(원빈)의 “얼마면 되는데”를 연상하게 하는 K 멜로의 부정적 단면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마지막 16, 17회에서 뒤늦게나마 보여준 서사적 설명이 이산이 왕이 된 후에도 여전히 그의 곁에 궁인으로만 곁에 있겠다고 버텼던 덕임의 바람을 납득하게 했다. 정조는 죽은 순간까지도 덕임을 완벽하게 소유하지 못한 데 대한 분노와 아픔을 호소한다. 반면 덕임은 결국 정조의 요구를 받아들이지만, 주체적인 궁녀로서 삶을 살고 싶은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희생한 대가를 치러야 했기에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않은 채 정조 곁을 떠난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일개 궁녀에서 정1품 빈의 자리에 올라 죽는 순간까지 왕의 총애를 받은 성덕임의 성공 서사가 아니다. 그보다는 능력 있는 궁인이었지만 무력한 빈이 될 수밖에 없었던 조선 시대 여인의 현실적인 생을 그렸다.
‘사임당 빛의 일기’(SBS, 2017년)는 영웅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조선 시대 여성들의 아픈 역사를 담담하게 담아냈다. 천재적인 예술가였지만 결국 한 남자의 아내로서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던 역시나 어쩔 수 없었던 사임당의 삶을 다뤘다. 예술가이자 사업가이기도 했던 적극적인 여성 영웅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여성으로서 한계에 초점을 맞추는 여성주의 서사를 삽입했다.
사임당은 남자들처럼 관직에 나가 뜻을 펼칠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것을 원망하는 딸 이매창에게 “이 어미도 네 나이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조선에서 여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주 답답하다고 불공평하다고 느껴질 것이야”라며 여성이라는 태생적 한계에 절망했었음을 인정한다. 사임당은 평생 남편 곁을 지키지만, 드라마는 그에게 첫사랑이었던 이겸과 함께 예술가로서 삶을 나누는 금강산에서의 시간을 허락함으로써 여성주의 사극 멜로의 가능성을 열었다.
여성주의 사극 멜로는 최근 희화화 되는 초기 한류 열풍을 일으킨 K 멜로의 클리셰들을 부분적으로 재현하는 청춘 사극과는 명확히 다르다. 당시 허락되지 않은 선택권을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현대적 재해석을 내세워 임의로 쥐여주기 보다 억압에 휘둘리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지키려 했던 여성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여기서 멜로는 여성의 주체적인 삶의 완성이자 목표가 아닌 주인공을 무력화하기도 하고 성장하게 하는 과정으로 그려질 때 여성주의적 진정성을 갖게 된다.
K 멜로는 멜로의 부정적 뉘앙스를 강화하는 데 기여해왔다. 자신을 시네 페미니스트로 정의한 주유신은 그의 저서 ‘시네 페미니즘’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그 자체로서 아니라 남성의 ‘타자’, 즉 남성이라는 ‘기호의 잉여물’ 또는 ‘남성적 상상계의 중추’라는 식으로 정의되고 재현된다”라며 멜로의 기저에 내재한 남성 편향적 시선에 대해 말했다. 이는 한류의 주역이었지만 이제는 희화화되고 있는 ‘오만한 남자’의 이기적 사랑으로 그려지는 K 멜로의 진부한 민낯을 설명한다.
그러나 ‘멜로드라마적 상상력’에서 비교문학자 피터 브룩스는 “멜로드라마는 억압이 돌파되어 철저한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즉 순수한 도덕적, 심리적 정수의 표현 가능을 보이는 매체로서 나타난다”는 말에서 멜로에 대한 긍정적 관점의 전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또 ”멜로드라마 메시지는 또 다른 기호의 사용영역을 통해 표현돼야 한다“는 언급은 멜로가 여성의 현재성과 진정성을 설명하는 여성주의 서사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해석의 여지를 준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남성 우월 서사의 클리셰로 뒤범벅된 K 멜로와 여성주의 멜로를 아슬아슬하게 오갔다. 마지막 죽음을 앞둔 덕임은 “부디 다음 생에서는 신첩을 보시더라도 모른 척 옷깃만 스치고 지나가 주시옵소서. 전하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미워하는 것도 아니옵니다. 그저 다음 생애는 신첩이 원하는 데로 살고 싶은 것이 옵니다”라며 유언처럼 자신의 바람을 전한다. 이는 극에서 중심을 이룬 이산과 긴 밀고 당김이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닌, 사랑이라는 이유로 남자에게 종속되고 싶지 않았던 조선 시대 여인의 이룰 수 없는 소망을 드러낸다.
정조 역시 마지막에 덕임을 여인으로, 가족으로 곁에 두고자 했던 왕으로서, 남자로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요구에 의문을 품는다. 그는 “네가 여전히 궁녀였다면, 후궁이 되라 강요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라며 슬픔에 갇힌 빈으로 생을 마감한 덕임의 죽음에 잠시나마 죄책감을 느낀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개혁 군주 정조와 그가 의빈 성씨 사후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 어제의빈묘표를 기반으로 해 멜로의 몰입도를 높였다. 여기에 덕임의 생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궁인에서 수동적 여성 빈으로, 작가적 상상력이 더해진 영웅주의와 역행하는 서사 방식으로 전개해 뻔할 수 있었던 멜로에 여성주의의 깊은 여운을 더했다.
극은 정조가 마지막까지 덕임에 대한 소유욕을 끊어내지 못한 채 그와 영원의 사랑을 선택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여성주의 사극 멜로라는 관점에서 이 극의 진정한 메시지는 다음 생에는 자신을 모른 척해달라는 유언에 담겨있다.
* 타이틀 사진= MBC ‘옷소매 붉은 끝동’
[* 본 글은 외부에 기고한 칼럼입니다.]